▲ 총선 4일 후인 지난달 19일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1961년 5·16으로 한국정치사에 등장한 그는 10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개혁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후 ‘자의반 타의반’의 외유, 정치 규제, 3당 합당과 민자당 탈당, 자민련 창당, DJP 공동정권 수립에 공동정권 파기, 16대 총선 참패에 이르기까지 JP는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미련을 갖던 ‘10선 고지’를 달성하지 못한 채 정치무대를 떠나겠다고 선언한 JP. 그는 완전히 이 무대를 떠났는가.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지금 아무 말이 없다.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JP는 검찰의 소환에 응할지,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든지 등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4·15총선이 끝난 지 며칠 후 저녁 서울 중구 청구동 JP 자택. 일부 당선자와 측근들이 모였다. 숨 막히는 침묵의 시간들이 흘렀다. 모두들 JP의 한마디를 기다렸다. 오랜 침묵을 깨는 JP의 한마디. “지혜와 용기를 모아 어려움을 대처해 나가주세요. 유일한 보수정당 자민련을 잘 지켜주십시오. 새 지도부를 구성해주세요….”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이날 JP에게 뭔가 듣기를 기대하고 청구동을 찾았던 이들은 침묵 속에 헤어졌다.
지난 16대 총선 당시 지역구(충남 부여)를 승계했던 김학원 원내총무와 다른 측근들이 수시로 청구동을 방문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재임 시절 수뢰 여부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김용채 전 토공 사장의 폭탄발언이 있었다. JP가 수사선상에 오르게 된 발언이었다.
김학원 총무는 “세상이 복잡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김 전 총재를 잠깐 뵌 적이 있는데 이와 관련해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고만 말했다. 유운영 전 대변인도 “김 전 총재가 개인적으로 돈을 받아 챙길 사람은 아니다. 검찰에서 정식 통보가 오면 대응방안을 상의해보겠다”고 밝혔다.
JP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과연 JP의 앞날은 어떨 것인가.
◆JP, 네 번의 기회를 놓치다
그의 몰락은 예고된 것이었다. 단순한 지지도의 추락 때문만은 아니었다. 총선 직전 JP는 충남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가는 곳마다 ‘냉대’를 받았다. 17대 총선 공식선거운동이 한창이던 4월 초 어느 날, JP는 충북지역을 순회 방문했다. 지원유세를 위해서였다. 하루에 10여 군데를 거치는 지원유세 일정이 짜여졌다.
▲ DJ와 JP | ||
A의원은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JP로는 안된다는 징후는 이때부터 있었습니다. 당직자는 물론 자민련 지지자들조차 JP가 오면 될 일도 안된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충청권의 맹주’라던 JP가 왜 이렇게까지 됐을까. 이와 관련, JP의 측근인 B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 안팎에서 자민련의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끊임 없이 요구해온 쇄신방안과 개혁안을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B의원은 그때부터 이미 JP의 판단력에 문제가 생겼다고 평했다.
B의원에 따르면 JP는 자민련 쇄신을 위한 네 번의 기회를 놓쳤다. 지난해 11월 하순 어느 날. 조부영 국회부의장과 정우택 의원이 만나 당 쇄신 실천방안을 숙의했다. 이미 당 쇄신위원장인 정 의원이 그해 초 JP에게 ‘명예총재로의 2선 후퇴’ 등을 골자로 한 당 쇄신책을 올려놓았던 상황이었다. JP는 쇄신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반년 이상을 처박아 놓았다고 한다. 조부영 부의장은 정우택 의원과 논의한 쇄신안을 재차 건의하기로 하고 JP를 찾았다. 하지만 JP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기회는 12월 초순쯤에 찾아왔다. 당의 활로 개척을 위해서는 당 쇄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점에 동의한 조 부의장과 정 의원이 정진석 의원과 이런 내용에 공감하고 정상천 부총재로 하여금 이를 JP에게 건의하게 한 것. 하지만 JP는 또 다시 이를 거부했다. 세 번째는 올해 1월 초순 JP가 일본에 가 있을 때였다. 정 부총재가 일본으로까지 가서 JP에게 또 다시 당 쇄신책 수용을 요청했지만 JP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지막 기회는 올해 1월28일 대전에서 전국지구당위원장대회를 할 때였다. 정우택 의원이 “JP가 명예총재로 한 발 물러서고 전면적인 당 쇄신을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정 의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총재는 그냥 두더라도 당 대표직을 신설해서라도 당의 얼굴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읍소했다. 이에 대한 JP의 답변. “아직도 우리 당에서 내 진심을 몰라주는 사람들이 있어….” 이렇게 JP는 당 쇄신을 위한 마지막 기회를 박차버렸다.
이를 끝으로 개혁과 쇄신을 요구해온 자민련 일부 의원과 당직자들은 그 요구를 포기했다. B의원의 회고다. “시간적으로 탈당하기도 쉽지 않고 한국적 정서에서 ‘탈당〓철새’로 인식되는 만큼, 이제 개인의 능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데 생각을 같이 했습니다. 서로에게 ‘우리 힘으로 살아 돌아오는 수밖에 없다’며 비통함으로 다짐했습니다.” 자민련의 회생 기회는 이렇게 왔다가 그렇게 갔다.
◆JP의 앞날
총선 후인 지난달 19일 JP는 당선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계은퇴의 변을 밝혔다.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43년간 정계에 몸담으면서 나름대로 재가 됐다”고 정치역정을 술회하는 것으로 조용히 정치인생을 접었다. 일각에서는 “충청권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애석한 감이 있지만 이제는 정치적 역할이 다한 것 아닌가 싶다”는 ‘동정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평가는 냉혹했다. “좀 더 일찍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탄핵 역풍 등을 떠나 보수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등의 논평이 잇따랐다.
JP는 완전히 끝났을까. 그의 정치적 재기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한마디로 “예스”이다. 왜일까.
첫째 이유. 무엇보다 그에겐 힘의 원천이 사라졌다. 자민련은 ‘JP당’이었다. JP의 힘의 근원은 충청 유권자들의 지지에서 나왔다. JP가 여러 곡절을 거치면서도 위기상황에서 언제나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충청권이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번 침몰 직전까지 몰렸던 JP에게 충청권은 아낌 없는 지지를 해줬다.
그런데 이 지역기반이 사라졌다. 그 징후는 이미 2000년 16대 총선에서 나타났다. 당시 50명의 장수(현역의원)와 함께 전쟁터(총선)에 나섰지만, 살아돌아온 장수(당선자)는 비례대표를 포함해 17명에 불과했다. 이어 2002년 6·13지방선거에서는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소속 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했고, 그해 16대 대선에서 ‘충청권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운 민주당에 텃밭을 잠식당하면서 충청권 맹주로서의 위상은 사실상 사라졌다. 더군다나 이번 17대 총선 결과는 ‘충남지역 4석’이라는 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조차 낙선하면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이번 선거를 통해 ‘인물지향적 지역주의’는 ‘정책지향적 지역주의’로 변했고, 자민련은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 필연적으로 JP의 퇴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진행된 것이다.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뛰어넘는 지역발전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개혁성향으로 변모하지 못할 경우 JP로 상징되는 자민련은 재기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평이다.
둘째 이유. 판단력이 흐려졌다. 2003년 10월 자민련이 충청지역 기초단체장 재·보선에 모처럼 승리, 이번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 복원을 꿈꿨지만 한-민 동맹에 의한 대통령 탄핵 추진에 뒤늦게 가담하면서 ‘탄핵폭풍’에 치명타를 맞고 재기 불능의 상태로 몰렸다.
▲ JP와 YS | ||
“이때 JP는 총기를 상실했습니다. 나는 탄핵반대론이었고, 최소한 명시적 반대는 하지 않더라도 찬성에 적극 가담하는 것은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탄핵의 역풍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C의원의 말은 계속된다.
“JP는 언제나 이기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40년의 정치역정 속에서 비바람 맞아가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궁극적으로 이기는 선택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줄타기였을지는 몰라도 끝까지 JP와 함께하면 죽는 길로 가지는 않는다는 말이 회자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탄핵이라뇨….”
셋째 이유.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다. 적극적으로는 그를 대신하고 대변하고 고락을 함께할 사람이 없다. 과거엔 ‘좌 (최)각규 우 (김)용환’ 등의 말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옆에서 책략가가 사라진 지는 오래다.
‘포스트 JP’로 거론돼온 심대평 충남도지사가 괜찮은 측근 축에 속했지만 그 역시 “자민련이든 열린우리당이든 당을 떠나 지역을 대변하고 충청을 대표할 정치 세력, 지도자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JP의 시대는 갔다는 뜻이다.
현재 자민련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한 김학원 의원이 현재로는 JP의 유일한 옹호자로 남을 것 같다. 그러나 그조차도 “중요 현안이 있을 때는 JP에게 조언을 구해야 한다”는 입장이면서도 “JP와 일정 거리를 두겠다”고 다짐했다. 조언을 구하겠다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지역구의 여론을 생각한 때문일 거라고 추측된다.
대표 경선 주자의 한 사람인 안대륜 의원은 아예 “JP 시대는 갔다”고 공언하고 “그가 더 이상 당무에 간여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강조했다. 총재권한대행을 맡았던 시절 JP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혼쭐이 났던 이인제 부총재의 입장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론이다.
마지막으로 사법적 심판에 대한 부담이 남아 있다. JP는 그간 검찰에서 정치인에게 적용했던 구속 기준(10억원)을 넘는 불법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어 신병처리 수위에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이다.
애초 진술자인 김용채 전 토공 사장의 변호인이 “피고인이 직무와 상관없이 당 사정이 어려워 고 정몽헌 회장에게 부탁해서 받은 정치자금이므로 뇌물죄가 아닌 정치자금법 위반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변론했고, 검찰도 김 전 총재가 이 돈을 당을 위해 사용했는지 여부를 조사한 뒤 구속수사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긴 하다. 그러나 모든 정치행위가 선하게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제 아무리 천하의 ‘수 쓰기’의 천재인 JP라도 이젠 확실히 물러날 때라는 점을 그 누구보다 자신이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게 JP를 아는 사람들의 결론이다. JP의 최측근 인사이자 중진 의원 출신인 D씨의 말이다.
“JP에게 아쉬움이 하나 있다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달리 1인자가 되지 못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가 10선 의원이 되고자 그렇게 집착했던 이유도 3김 중에 대통령을 하지 못한 유일한 인물인 자신이 다른 두 김씨와는 다른 무엇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JP가 압니다. 물러나야 할 때라는 사실,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은 결코 1인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장고(長考)의 신중함을 견지해온 JP였지만 이젠 정말로 결단할 때입니다. 그 결단을 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정치무대에선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2인자’ JP를 다신 보지 못할 것 같다. 시를 읊고 음악을 논하며 그림을 즐겼던 ‘낭만정객’이 그리워질 때쯤 그를 한번 찾아가야지. ‘아듀’ JP.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