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전북 남원 출신에 70학번, 의욕적으로 활동중인 신 의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선명한 개혁성’이다. 동교동계의 소개로 정계에 입문했지만 지난 2001년 정동영 전 의장과 함께 동교동계에 맞선 정풍운동을 주도했다. 열린우리당 창당과정에서 민주당 선도 탈당을 주장하면서 자칭 타칭 ‘탈레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민주당에선 초·재선의원 모임인 바른정치모임 회장을 지냈다. 정동영 천정배보다도 앞선 개혁성을 무기로 삼고 있다. 지난해 9월 열린우리당 창당과정에서 민주당 구파를 겨냥해 “선혈낭자하게 투쟁하겠다”는 발언은 그의 개혁적 선명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
전남 목포 출신에 71학번인 천정배 원내대표 역시 동교동계 후광을 업고 정계에 입문했지만 신기남-정동영 등과 함께 2001년 정풍운동에 참여해 탈레반의 일원이 되고 천·신·정체제의 한 축이 됐다. 현역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 후보에 대한 공개 지지를 선언했다.
2002년 대선 직후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먼저 주장했다. 서울대 인문계열에 수석합격, 목포가 낳은 3대 수재로 꼽히는 천 의원은 “전두환이 주는 판·검사 임명장을 받을 수 없다”며 변호사의 길을 시작했다. 연수원 졸업 후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의 제의를 받고 국제변호사로 4년간 일했던 천 의원은 <전태일평전>을 쓴 조영래 변호사와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열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라는 딱지를 달게 됐다.
신기남 의장과 천정배 대표는 이상(개혁론)과 현실(타협론)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정치행위는 ‘나 홀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대화와 타협에 의해 이뤄진다는 평범한 진리 속에서 배태되는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의 개혁성은 정치사회적 환경에 의해서는 물론, 종종 스스로에 의해서도 제동이 걸리는 형편이다.
상황1 지난 18일 신 의장과 박 대표는 광주 망월동국립묘지에서 거행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양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조우했다. 이날 박 대표는 신 의장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등 차갑게 대하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박 대표는 한화갑 민주당 대표와는 반갑게 악수를 나눈 반면 신 의장과는 불편한 표정으로 손을 맞잡았다.
신 의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행사 도중 기자들과 만난 신 의장은 “5·18의 근원은 유신독재와 5·16쿠데타”라면서 “5·18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그 위에까지 소급해서 객관적 차원에서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 전 대통령에게 5·18 책임론을 제기함으로써 그의 딸인 박 대표를 우회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 지난18일 5·18 기념식에 참석한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오른쪽)이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위). 새로 선출된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오른쪽)와 홍재형 정책위의장이 지난 13일 한나라당을 방문하기 위해 가고 있다. | ||
신 의원의 발언을 접한 박 대표는 “신 의원이 똑똑하고 점잖은 분인 줄 알았는데…”라며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박근혜 대표의 불쾌감은 당시 신 의장이 “박정희에게 손자가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내뱉은 말에서 최고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17대 국회가 상생의 정치를 약속한 마당에,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집권여당 최고 지도부로서의 책임감을 신 의장이 언제까지 간과할 수는 없는 노릇. 신 의장은 5·18 기념식 현장에서 박 대표를 비난한 지 사흘 뒤에 박 대표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일개 정치인 신기남이 아니라 당 의장이라는 위상 때문이다.
상황2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의 한나라당 천막당사.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이 신임인사차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찾았다. 박 대표는 내내 신 의장에게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신 의장은 자신의 부친과 박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신 의장은 “제 선친과 박 대표의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 친구사이였다. 한국전쟁 때도 같이 싸웠고, (박 전 대통령이) 한때 강원도 춘천에 있는 부대 사단장을 하실 때, 거기서 저희 아버님과 교류가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신 의장은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을 할 때 초청장에 저희 아버님의 이름이 초청인(청첩인)으로 박혀 있었다”는 비화도 소개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그런가. 몰랐다”고 짧게 답하고는 입을 닫았다. 박 대표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신 의장의 표정에는 초조함마저 비쳤다. 신 의장은 “천막당사는 낡은 정치를 청산하겠다는 박 대표의 개혁 의지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한다”며 ‘립 서비스’를 했지만 박 대표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대야관계뿐이 아니다. 신기남 체제는 당내에서도 끊임 없이 문제제기에 시달리면서 도전받고 있다. 문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신기남-천정배 투톱체제를 적극 인정하거나 대접해주질 않는다는 것이다. 권위가 형성될 리 만무다.
상황3 다시 18일 오후, 광주공항 귀빈실. 5·18 기념행사를 마친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이 귀빈실에 들어섰다. 그는 메인소파의 상석에 앉지 않고 소파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다. 곧 이어 열린우리당의 여러 의원이 속속 귀빈실로 들어왔다. 문희상 대통령 정치특보, 유인태 당선자, 김태홍 유시민 의원, 정의용 당선자 등이 자리를 잡았다. 신 의장이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오니 이미 그 자리는 김덕규 의원이 차지했다. 신 의장은 상석이 비어 있는데도 소파 뒤편에 있는 간이의자에 앉았다.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고 상석을 권유하지도 않았다.
신 의장이 당의 수장이면서도 ‘당내 어른’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일화다. 신 의장은 취임 직후 당내 비주류인 김부겸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해 당내 화합 의지를 과시했지만, 신 의장에 대한 견제 움직임이 가시질 않는다. 소장개혁파 의원의 모임인 ‘참여정치를 연구하는 의원들의 모임’은 최근 회의에서 “총선을 치르고 나면 새 지도부가 구성되는 게 일반적인 관례”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7∼8월 또는 내년 1월 전당대회를 치르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이들은 또 중앙위원회의에서 전당대회 개최문제도 공식 논의키로 했다.
신 의장도 당내 인사들의 이 같은 냉랭한 시선에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나보고 소장파고 경륜이 없다고 하는데 잘못 생각하는 거다. 내 나이가 52세다. 토니 블레어보다 한 살이 많다. 정치적 경력을 봐도 최고위원을 했고 상임중앙위원도 동시에 했다”며 “나만큼 준비된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소장파의 전당대회 개최 움직임에 대해 “언제라도 좋다. 한번 붙는 거지”라고 전의를 드러내기도 했다.
앞으로의 정국과 관련, 두 개의 전망이 동시에 나온다. 우선 원내 제1당이자 과반여당의 힘에 의지해 정국이 개혁 드라이브로 요동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당연히 이는 신-천체제의 성격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들이 살아온 자취나 인생궤적을 살펴보건대 현실과의 타협이 쉽게 이뤄지겠느냐는 것이다. 17대국회에서 열린우리당 주도로 언론개혁과 사법개혁 등 그동안 산적해 있던 개혁과제의 입법화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전망이 여기서 나온다.
천정배 대표가 “어떤 사안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더 높고 시급한 것인가를 따지겠다”고 발언했음에도 불구, 행정 교육 권력기구개혁, 언론 사법개혁 등 국정 전반의 산적한 개혁과제가 이들의 손에 강력히 추진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이미 여권 내부에서는 마지막 개혁과제라는 언론개혁에 대한 논의가 뜨겁게 일고 있고 대체적인 개혁안이 마련된 상태다.
▲ 지난 17일 정동영 의장이 의장직에서 물러나며 신기남 신임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 ||
하지만 이런 전망은 이내 현실론이란 벽과 만나게 된다. 이미 앞서 천막당사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찾은 신 의장에게서 나온 태도에서 현실론의 모습은 잘 표출됐다. 신 의장이 24일 총선과 관련해 한나라당과 지도부, 박근혜 대표를 상대로 한 고발사건을 모두 취하하겠다며 “당 법률지원단은 조건 없이 모든 고발을 취하하는 절차를 밟으라”고 지시한 것도 상생의 시대에 걸맞은 행보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신 의장은 대변인으로 임명된 임종석 김현미 당선자에게도 “한나라당에 대한, 비난을 위한 비난 논평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신 의장뿐 아니다. 천정배 대표도 최근 “나는 결코 맹목적 개혁주의자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열린우리당 내부를 겨냥해서도 “원내대표라고 해서 의원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거나 교육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원내대표는 사견을 내세울 권리가 없다”고 강조했다. 원내대표 출마선언문 때 이미 이 같은 생각의 단초가 엿보였다. 선언문에서 천 대표는 “어떠한 형태의 계파나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분들의 뜻을 받들겠다. 작은 이견이라도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하겠다”고 화해의 행보를 약속했다.
결론적으로 앞으로의 정국은 두 개의 전망, 즉 소신 개혁 드라이브냐 또는 타협을 통한 상생정치 실현이냐 중 일단은 후자의 모양새로 갈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이것이 신-천 두 사람의 개혁구상 자체를 형해화하거나 지운다는 것과의 동의어는 아니다. 개혁은 태생적인 것이고 어찌보면 천성적인 것인 만큼 이는 언젠가는 주머니 속에 숨겨진 송곳처럼 드러날 것이다.
즉 신-천체제의 타협은 ‘칼날을 숨긴 타협’이다. 송곳이 언제 주머니 바깥으로 삐져나와 천부(天賦)개혁을 실현하게 될지에 관심이 쏠린다.
신-천 투톱체제의 지속성 여부를 가늠하기 위한 첫 사건은 6·5재보선이다. 이는 신-천체제가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이다. 부산시장과 경남지사 등 4개 광역자치단체장 재보궐선거 결과에 따라 당내에서는 천·신·정으로 대별되는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대결이, 당밖으로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간의 힘겨루기가 첨예화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열린우리당이 4곳의 광역단체장 선거 가운데 3곳 이상을 이길 경우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를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6월쯤으로 예상되는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전 원내대표의 입각을 계기로 힘의 공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문희상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차기 당권주자로 거명되는 인사들의 행보도 신-천체제를 위협하는 변수가 될 수 있다. 또 일각에서의 조기 전당대회 개최론이 힘을 받을 경우 신기남 의장 체제는 1백일 천하에 그칠 수도 있다. 나아가 2000년 말 민주당 정풍쇄신운동을 기점으로 맺어진 천신정의 탈레반 연대가 언제까지 이어질지가 또 하나의 변수가 될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 들어 신기남 의장이 롱런(long run)체제 굳히기에 나섰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정동영 전 의장으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지 보름 가량 만에 과도체제의 성격에서 탈피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최근 일련의 스타일 변화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독주성향을 내던지고 다양한 계파와 폭 넓은 이념적 정치적 성향을 화합하는 역할을 하려 한다는 지적이다. 변화의 계기는 탕평책이다. 특히 신기남 의장이 유시민 의원 등 개혁당파와 원로 및 비당권파를 감싸안고, 천정배 대표가 원내 요직에 두루 계파안배를 하는 것이 신-천체제 안정토대 구축에 기여하고 있나는 평가다.
이에 따라 당내에선 신-천 투톱체제에 대해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비판이 나오는 한편으로,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내는’ 근본적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상당기간 유지할지 모른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는 형국이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