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대표하는 특정 색상은 곧 그 기업의 이미지와도 직결된다. 스타벅스를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초록색이, 그리고 코카콜라를 생각하면 빨간색이 떠오른다. 하지만 과연 다 똑같은 초록색이고, 다 똑같은 빨간색일까. 정답은 ‘아니오’이다. 이 색상들에는 모두 고유의 번호가 있으며, 다른 초록색이나 빨간색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 에메랄드 시티의 현란한 색상, 도로시가 신은 빨간 구두의 색에도 역시 저마다 고유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팬톤 14-0957(스펙트라 옐로)’ ‘팬톤 16-6339(바이브란트 그린)’ ‘팬톤 17-1664(포피 레드)’ 등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유명한 색상들은 미국의 글로벌 색채전문기업 ‘팬톤(Pantone)’이 제작한 고유의 색상들이다. 모두 특허로 보호되고 있으며, 정확한 색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팬톤 색상 번호를 알아야 한다.
팬톤의 상징인 팬톤 컬러칩. 세계 최초로 색채를 표준화한 기업이 바로 팬톤이다. 사진=팬톤 페이스북
팬톤 색상은 전 세계 미술, 건축, 인쇄, 광고, 화장품, 패션 등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바이블처럼 여겨진다. 수없이 많은 색상 가운데 세계 최초로 색채를 표준화한 기업이 바로 팬톤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팬톤의 창업주인 로렌스 허버트였다.
허버트가 처음 팬톤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던 1950년대만 해도 색상에는 표준이란 것이 없었다. 같은 파란색이어도 정확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인쇄업자마다 혹은 출판업자마다 서로 다른 색을 사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업체마다 혼선을 빚고 있었으며, 재작업을 하거나 재인쇄를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틈새시장을 포착했던 허버트는 자신의 전공인 화학을 살려 색상의 규격을 통일하고자 했다. 1962년 본래 화장품 회사를 위한 색견본 카드를 제작하는 회사였던 팬톤을 인수한 허버트는 이듬해 팬톤 매칭 시스템(PMS)을 개발했다. 먼저 기본 색소 열두 가지를 이용해 다양한 색을 배합한 후 각각의 색에 특정 기호와 번호를 부여했다. 이렇게 시작한 PMS는 처음에는 열 개의 표준 색상밖에 없었지만 현재는 1만 개에 달한다.
PMS의 등장은 곧 업계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섬유, 플라스틱, 페인트 등 디자인 산업에 일대 혁신을 불러왔으며, 디자이너, 인쇄업자,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주절주절 색상을 설명할 필요 없이 그저 번호 하나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2007년 허버트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그 후 팬톤은 색상계측장비회사인 ‘X-라이트’에 인수됐다. 당시 인수 금액은 1억 8000만 달러(약 2000억 원)였다.
팬톤은 매년 말 다음해의 컬러를 발표한다. 2016년 올해의 컬러는 ‘로즈 쿼츠’와 ‘세레니티’다. 사진=팬톤 홈페이지 캡처
그렇다면 팬톤의 핵심적인 성공 비결은 뭘까. 물론 PMS를 통한 일대 혁신과 이를 통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비결이지만, 이밖에 색상을 활용한 똑똑한 마케팅도 기업의 성공에 한몫했다. 기업의 역할을 단순히 색상에 번호를 부여하거나 새로운 색상을 창조하는 데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하나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확장시킨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올해의 컬러’다. 매년 12월 발표되는 ‘올해의 컬러’는 패션, 인테리어, 화장품, 인쇄, 출판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컬러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2016년 ‘올해의 컬러’로 선정된 색상은 로즈 쿼츠(Pantone 13-1520)와 세레니티(Pantone 15-3919)였다.
이를 위해 팬톤은 컬러 심리학자와 컬러 경제학자를 고용한다. 이들은 색상의 화학적 구성뿐만 아니라 색상이 재현해내는 느낌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2016년의 로즈 쿼츠 색상에 대해서는 “소비자들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명상과 웰빙을 추구함에 따라 안정감과 안도감을 주는 색상이 각광받고 있다. ‘로즈 쿼츠’와 ‘세레니티’는 따뜻한 느낌의 장미 톤과 서늘하고 편안한 푸른색 사이의 내재된 균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팬톤 호텔. 층마다 다른 색상을 테마로 사용하며, 컬러 컨설턴트를 통해 컬러 상담 및 컬러 치료 교실에도 참여할 수 있다. 사진=팬톤 호텔 페이스북
팬톤이 라이선스로 거둬들이는 수익도 무시할 수 없다. 쇼핑몰 ‘팬톤 유니버스’를 통해 머그, 수건, 목욕 용품, 의류, 열쇠고리, 문구류, 가방, 접이식 의자 등 다양한 소비재를 생산하고 있다. 이는 보다 대중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사업 전략이었다. 사실 디자이너들, 인쇄업자들, 출판업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하지만 일반인들은 팬톤이란 기업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 이렇게 라이선스로 벌어들이는 팬톤의 수익은 전체 매출액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문을 연 ‘팬톤 호텔’ 역시 이런 맥락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7층 건물인 이 호텔은 각 층이 팬톤의 대표 색상으로 꾸며져 있으며, 객실 역시 저마다 다른 주제의 색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고객들은 호텔에 상주하는 팬톤 컬러 컨설턴트를 통해 컬러 상담 및 컬러 치료 교실에도 참여할 수 있다.
모로코에서 팝업 형태로 운영되는 팬톤 카페. ‘색을 맛보세요’라는 구호 아래 모든 메뉴에 고유 색상이 부여되어 있다. 사진=팬톤 카페 페이스북
지난해부터 모로코에서 팝업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팬톤 카페’를 통해 식음료업계에도 진출한 상태다. 매년 6∼9월 여름에만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팬톤 카페’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색상에 있다. ‘색을 맛보세요’라는 구호처럼 이곳에서 판매되는 커피, 주스, 샌드위치, 샐러드, 패스트리, 칵테일에는 모두 팬톤 색상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오렌지 주스를 주문할 때는 “바이브런트 오렌지(Vibrant Orange) 16-1364 주세요”라고 말하거나 토마토 모차렐라 샌드위치를 주문할 때는 “토마토 레드 모차 화이트(Tomato Red Mozza White) 18-1660 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메뉴뿐만이 아니다. 냅킨, 테이블, 의자, 커피 메이커 등 모든 소품에도 색상 번호가 부여되어 있다. 그야말로 색으로 말하는 기업답게 모든 것을 색으로 소통하는 곳이 바로 이 ‘팬톤 카페’다.
그런가 하면 팬톤의 ‘커스텀 컬러(맞춤형 색상)’는 팬톤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잘 나타낸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5번가 티파니 매장 앞에서 쇼윈도를 들여다보는 장면은 꽤나 유명하다. 하지만 사실 이보다 더 유명한 것은 바로 티파니 브랜드의 색상이다. ‘티파니 블루’라고 불리는 이 푸른색에도 고유의 번호가 있다. 바로 ‘팬톤 1837’이다(1837은 티파니앤코의 설립연도). 이 색상은 특허로 보호되고 있다.
애니메이션 <미니언즈>의 노랑인 미니언 옐로, 보석 회사 티파니앤코의 푸른색 티파니 블루에도 팬톤의 색 번호가 붙어 있다. 사진=팬톤/티파니 홈페이지
2015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미니언즈>도 팬톤이 유니버셜픽처 사와 손잡고 개발한 노란색이 사용됐다. 주인공 캐릭터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미니언 옐로’는 희망, 기쁨, 낙천주의를 나타낸다. 팬톤 역사상 최초로 캐릭터 이름이 붙은 ‘미니언 옐로’는 ‘티파니 블루’와 달리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