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동열 코치는 눈치보지 않고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선동열 야구’를 꼭 해보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스타플레이어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불문율을 그가 과연 깰 수 있을까.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잠시 후, 약속 시간에서 1분도 틀리지 않고 삼성 라이온즈의 선동열 수석 코치(41)가 나타났다. 올스타 휴식기를 맞아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으리라 짐작됐지만 인터뷰 전날도 구단 관계자들과 미팅 후 제법 쎈 술을 마셨다며 ‘이젠 몸이 옛날 같지 않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현역 시절엔 ‘국보 투수’로, 유니폼을 벗은 지금은 ‘국보 투수’ 출신 코치로 어디에서나 집중 조명 당하는 기분이 그리 반가운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특히 지난 5월 중순 10연패를 당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이름 앞과 뒤에 붙은 화려한 수식어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일본 주니치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두산과 LG 감독 내정설을 거쳐 삼성의 수석코치로 안착한 선동열 코치. 한때 팀 방어율이 꼴찌로 떨어지는 등 ‘국보 코치’답지 않은 마운드 성적표를 받아 들고 난감한 적도 있었지만 바닥을 치고 올라간 삼성 마운드는 전반기 마지막에 다승과, 방어율, 탈삼진을 모두 석권하며 ‘선동열표 마운드’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이끌어 냈다. 지난 17일 대구 삼성 홈구장에서 선동열 코치를 만났다.
―얼굴이 많이 타셨네요. 그동안 여러 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는데 참 뵙기 힘들었어요.
▲제가 그렇게 튕겼나요? (웃음) 지도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해였고 매스컴에서도 이런저런 기대를 부풀리고, 저 역시 잘하고 싶었지만 성적이 받쳐주질 않으니까 얼굴 드러내기가 좀 그랬어요. 또 제 위에 감독님이 계시는데 제가 나서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아 보이는 것 같아 몸을 사렸죠.
―전반기를 돌아보니 이런저런 시련이 많았어요. 자존심 상하는 일도 몇 차례 있었고.
▲말도 마십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선수 때도 해보지 않은 10연패를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느니 ‘선동열도 별 볼 일 없다’느니 정말 막말 많이 하대요. 솔직히 마음이 초조하고 체면이 서지 않았지만 선수들에 대한 믿음만큼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동계훈련을 하면서 그들한테 느꼈던 열정과 자신감이 언젠가는 눈으로 확인할 때가 올 거라고 자신했으니까요.
―선수들의 체력 훈련에 대해 굉장히 많은 신경을 쓰셨다면서요? 일본에서 피지컬 트레이너를 데려와 선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바람에 고참 선수들의 원성이 자자했다던데.
▲아마 불만이 많았을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1백33게임을 별다른 굴곡 없이 잘 소화해내려면 체력이 필수입니다. 특히 전반기 지나 후반기로 접어들면 선수들은 무더위와 함께 바닥난 체력으로 인해 힘든 레이스를 펼칠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슬럼프를 비켜갈 수 있거든요. 저희 팀이 전반기 중반까지 맥을 못추다 막판에 힘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체력훈련 때문이에요.
―괴로운 기억이지만 지금쯤은 ‘10연패의 추억’ 정도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추억은요, ‘악몽’이었죠. 해태 시절 5연패를 제가 나가서 끊은 적은 있어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한 적은 야구인생 중 한 번도 없었어요. 그때는 정말 답이 안나오더라구요. 연패를 끊기는 끊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약발’이 먹힐지 고민 많았습니다. 우스운 건 연패에 빠지니까 취재진들이 더 많이 몰려오더라구요. ‘썬’이 당하니까 재미있었나봐요.
1승이 목말랐다고 한다. 1승만 하면 분위기를 확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1승이 그때처럼 귀하고 어렵고 소중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승엽, 마해영이 빠진 타선의 약체는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 공격 야구를 지양하고 지키는 야구 쪽으로 돌아선 이유도 타력의 약화 때문이었다. 선동열 코치가 가세한 마운드에서 제 역할만 해준다면 플레이오프 진입은 무난할 것으로 점쳤던 것이 중간에 마운드와 타력의 붕괴로 총체적인 위기에 봉착했던 것.
―그래서인지 김응용 감독과의 불화설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잖아요. 당시 나돌았던 감독과의 불화설에 대해 솔직히 말씀 좀 해주세요.
▲불화설은 언론에서 만든 얘기구요, 팀 사정이 안 좋다보니 작은 의견 차이도 밖에서 보기엔 큰 불씨처럼 보였던 탓이겠죠.
―(김응용 감독과) 의견 차이가 있긴 있으셨나봐요.
▲감독님은 벤치에서 파이팅을 못하게 하세요. 집중이 안 된다고 선수들이 소리 지르고 박수치는 걸 싫어하시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선수들의 플레이에 박수도 치고 응원도 하고 덕아웃이 떠들썩해야 분위기가 살아나는 건데 그걸 못하게 하시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선수들한테 제가 다 책임질 테니 파이팅하자고 앞장섰어요. 감독님께도 따로 찾아가 말씀 드리고. 연패하는데 이런저런 방법은 다 써봐야 하지 않겠어요?
―당시 김 감독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연세가 드셔서 그런지 예전처럼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세요. 화도 잘 안 내시고. 지금은 거의 저한테 많은 걸 맡기시는 편이에요. 8개 구단 중 감독님 연배의 지도자가 안 계시잖아요. 가끔은 외로워 보이실 때도 있어요. 제가 삼성을 택한 이유 중 하나가 감독님의 태산 같은 업적들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가까이서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지금은 그 과정에 있는 거구요.
―투수 로테이션 문제로 마찰을 빚기도 했다는 소문은 어떻게 된 건가요?
▲마찰이라기보다는 의견 차이였죠. 감독님은 선발투수가 실투한다 싶으면 초반에 그냥 바꿔버리는 스타일이잖아요. 그런데 전 선발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5이닝을 넘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벤치에서 선발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그런 문제로 몇 차례 제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오히려 감독님이 제 눈치를 보시는 것 같아요. 투수를 바꾸고 싶으면 절 살짝 쳐다보시거든요. 그 눈빛엔 ‘준비 됐냐?’하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제 방식대로 해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인정해주신 거죠.
▲ 김응용 감독과 선동열 코치가 경기도중 심판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 ||
▲허허. 이런 얘긴 처음인데…. 저 여기 와서 한동안은 ‘왕따’ 아닌 ‘왕따’도 당했어요. 저에게 너무 많은 거리감을 두시더라구요. 유명세 때문이겠죠. 대부분 한창 선배인 코치분들인데도 불구하고 절 너무 어려워 하니까 오히려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던데요. 특히 제 직책이 수석 코치이다 보니 선배님들 입장에선 여러 가지로 불편하셨을 거예요. 그래도 제가 온 뒤로 감독님 스타일이 한층 여유롭고 부드러워졌다며 지금은 절 많이 응원해 주세요. 악역은 제가 거의 다 도맡다시피하거든요. 감독님께 건의드릴 게 있으면 따로 찾아뵙고 말씀 드리면 90%는 수용해 주시는 편이에요. 감독님 스타일을 안다면 미리 겁내거나 혼날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감독님은 여러 사람 있는 데서 싫은 소리 하는 걸 끔찍이 싫어하세요. 하지만 독대하는 자리에선 마음을 열어 놓고 들으시는 편이죠.
―연봉(1억2천만원)만을 놓고 봤을 때 ‘감독급 코치’라는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요. 김응용 감독과 지도자로서의 인연을 맺을 때부터 김 감독의 ‘후계자’라는 구도 설정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왔잖아요. 김 감독이 은퇴하시면 선 코치가 그 바통을 이어받을 거라는 설득력 있는 소문이 나돈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즉답을 회피하며) 소신있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눈치 보지 않고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는 선동열 야구를 꼭 해보고 싶어요. 언젠가 그런 기회가 오겠지만 그 기회가 언제일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지금은 감독님 밑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는 중이에요.
―지난해 주니치 연수를 마치고 두산과의 협상을 위해 귀국했을 때 공항에서 기자들한테 했던 멘트 기억나세요? 그중 한 가지가 코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감독에 올라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얘기였어요. 당시만 해도 두산 감독 내정이 거의 확정된 것처럼 알려진 탓도 있었겠지만,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나요?
▲아뇨. 코치를 거쳐 감독에 오르는 게 순서라고 봐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감독이 된 이후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을 거예요. 여기까지 오기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 당시의 선택은 최고로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하고 있으니까요.
―‘국보 투수’였을 당시 가장 큰 시련기라면 언제였을까요. 언뜻 보기엔 시련이나 좌절 같은 건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정말 그랬다면 제가 사람 됐겠어요? 생각지 못한 시련도 겪고 또 그걸 극복해나가면서 정신적인 성장도 이루는 거라고 봐요. 일본 진출 첫 해 2군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어요. 그 전까지만 해도 전 야구에 관해서만큼은 자신에 차 있었거든요. 그때 처음으로 운동장 나가는 게 두려웠어요. 오늘 하루만 마운드에 안 섰으면 하는 심정이 되기도 했었구요. 마음이 앞서다 보니까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제대로 볼 컨트롤이 되지 않았어요. 그때는 수십 번도 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2년 계약에 발목이 붙잡혀 있어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지만요.
1년 동안 주니치 재활군에서 훈련했던 부분과 재활군의 한 코치를 통해 새롭게 야구에 눈을 떴던 이야기, 다음 해 스프링캠프에서 공 1백50개를 전력투구를 하는 바람에 호시노 감독의 시선을 묶어뒀던 대목, 그리고 시범경기 첫 등판에서 다 이기던 경기를 지금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 중인 이치로의 끝내기 안타 한방으로 허무하게 무릎을 꿇고 또 다시 시즌을 포기할 뻔했던 사연들을 쏟아내는 선동열 코치의 표정은 코치가 아닌 투수 선동열로 돌아가 있었다.
―호시노 감독의 카리스마도 대단했잖아요. 호시노 감독에 대한 감정이 남다를 것 같아요. 워낙 일들이 많아서.
▲한국계라서 그런지 절 대하는 부분이 좀 다르셨어요. 당시 선수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돌았어요. 호시노 감독님 방에 호출돼 가면 선물을 받든가 쥐어터지든가 둘 중 하나라고. 전 주로 선물을 받는 쪽이었죠. 선물도 그냥 선물이 아니에요. 엄청난 고가의 명품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선물의 주인은 제가 아닌 제 와이프였어요. 선수 가족들을 직접 챙기셨죠. 그분이 굴리는 차가 7대였는데 주로 벤츠 이상가는 고급차들이었거든요. 그런 차를 1년 정도 쓰다가 성적 좋은 선수가 있으면 그냥 쓰라고 줘요. 운동장에선 살벌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다가도 경기장 밖에선 선수들을 감동시키는 작전이 보통이 아니었어요. 저도 그런 점을 벤치마킹해보려고 해요.
―다소 뜬금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승엽 선수가 요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지면을 통해서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현역 때 선동열은 ‘국보투수’였고 이승엽은 ‘국민타자’잖아요. 승엽이한테 가장 시급한 것은 ‘국민타자’라는 타이틀을 떼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팬, 매스컴 모두한테 관심을 끊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모든 수식어를 걷어낸 다음 이승엽이 처음 야구를 배울 때의 심정으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안정되고 여유있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인터뷰 말미에 은퇴한 걸 후회한 적 없었냐고 물었다. 은퇴 당시에 메이저리그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상황이 새삼 떠올랐던 탓이다.
“어휴, 가끔은 후회할 때도 있었죠. 하지만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는 생각이 워낙 컸었어요. 그런데 그만두는 것도 너무 힘들더라구요. 막상 공식 발표한 뒤엔 좀 더 해볼까 하는 미련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 안해요. 아, (코치된 이후) 딱 한 번 있었다! 지난 번 10연패에 빠졌을 때는 제가 뛰어들어가서 공을 던지고 싶더라니까요. 제가 하면 연패를 끊을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병이죠 뭐. 못말리는 병.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