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 ||
입각을 앞두고 한바탕 물밑 기싸움을 벌이면서 주목을 받았던 정동영 김근태 두 ‘잠룡’이 행정가로 변신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지난 6·30 개각 때 역대 최고의 ‘실세 장관들’로 표현됐던 두 정치인 출신 장관들은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당초 우려를 불식시키고 빠르게 부처 장악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행정가로 변신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여전히 관심을 끄는 것은 이들의 장관 행보가 일종의 ‘대권 수업’으로 여겨지는 탓이다. 입각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통일부에 안착한 정동영 장관, 그리고 통일부 장관직을 둘러싼 신경전에서 밀린 모양새로 보건복지부에 둥지를 튼 김근태 장관. 두 실세 장관의 대권 수업 행보를 5대 비교 포인트 분석을 통해 들여다본다.
1. 부처 장악력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장관직에 입성한 만큼 두 ‘실세 장관’은 부임 첫날부터 경쟁적으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 모두 당·정 협의 과정을 통해 부처 예산을 늘리며 밖으로 ‘실세 장관’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는가 하면 안으로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조기 업무 파악에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정동영 장관은 지난 7월1일 취임부터 지금껏 통일부 업무와 무관한 외부 공식 일정을 갖지 않았다. 외부 강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 대신 15차 남북장관급 회담에 대비한 ‘과외 공부’에 전념했다.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에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하며 전직 장관들의 회의록들을 꼼꼼히 공부했다고 한다. 통일부 관계자가 “(정 장관이) 1차부터 14차 회담의 회의록과 영상자료를 다 외울 정도”라 말할 정도다.
특히 전직 장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개인교습’을 받았던 점이 눈에 띈다. 장관 취임 이후 통일고문회의 이홍구 고문, 박재규 전 장관, 정세현 전 장관 등을 찾아가 면담을 했으며 특히 대북문제에 정통한 임동원 전 장관과는 7월 한 달 동안만 3번 만났다고 한다. 통일부 취임 직전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평에 대해 ‘발품’을 팔아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정 장관이 쉬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남북장관급 회담을 준비하는 통에 덩달아 ‘일복’이 터진 부처 직원들에 대한 장악력도 금세 높아졌다는 평이다.
‘발품’으로 승부를 거는 것은 김근태 장관도 마찬가지. 정 장관이 전직 관료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것에 비해 김 장관은 복지정책의 대상이 돼야할 빈곤계층과 독거노인들을 직접 방문하면서 고충을 듣고 있다. 지난 7월28일 한 시민단체 주선으로 서울 하월곡동 달동네를 찾은 김 장관은 손수 독거노인들에게 ‘국 배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장관의 방문을 받은 노인들이 김 장관을 몰라보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고 한다. 보건복지부는 ‘결식아동들에 대한 대대적인 점심식사 지원’도 계획중이라고 한다.
통일부 입각을 염두에 뒀다가 보건복지부 쪽으로 밀리는 듯한 인상을 풍겼던 김 장관은 장관으로서의 권위를 버리고 먼저 현장을 찾는 정성을 보이면서 다소 침체될 법했던 부처 직원들의 사기를 올린다는 평을 듣는다.
감기약 파동이 벌어지자 김 장관은 지난 6일부터 잡혀있던 여름휴가 계획을 취소하고 거의 매일 밤 12시까지 사무실에서 부처 현안을 검토한다고 한다. 과장급 이상 직원 50여 명과 네 차례 간담회를 가진 데 이어 사무관급 직원과 토론의 장이 예정돼 있고 부서별로 월 1회씩 정기 호프 미팅을 갖는 방안도 추진중이라고 한다.
두 장관 모두 솔선수범을 통한 부처 내 신임 높이기에 주력하는 한편 부처 출입 기자들에게도 적극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7월21일 장관 취임 이후 첫 기자간담회를 자청해서 가진 정 장관은 예상질문과 답변을 준비해 나왔다고 한다. 간단한 ‘티 타임’정도로만 알고 참석한 기자들은 정 장관이 도리어 ‘이런 질문은 안 하느냐’고 되묻자 당황했다고 한다.
반면 김 장관은 너무 겸손한 나머지 ‘빈축’을 사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8월2일 기자실을 찾은 김 장관은 자신이 6일부터 여름휴가 일정이 잡혀있는 것을 밝히며(후에 감기약 파동으로 휴가 자진 취소) 기자들의 휴가일정을 가볍게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 장관은 기자들에게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다. 휴가비도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기자들에게 부드럽게 다가가려다 나온 발언이지만 일부 기자들 사이에선 “출입처 기자들에게 휴가비 지급하는 것은 오래전의 관행인데…” “우리가 무슨 휴가비 받으러 나온 사람들인가”라는 식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 지난달 8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왼쪽)이 신임인사차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
부처 장악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두 장관은 옛 직장 후배들의 ‘칼 가는 소리’를 미처 듣지 못했다. 지난 7월 초 대정부질문에서 초선 의원들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은 것이다.
장관 취임 이후 첫 대정부질문에서 정 장관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설과 관련된 ‘정치적 의도’ 의혹에 대해 집중 추궁당했다. 한 야당 초선의원은 국군 포로 생존자의 정확한 수를 대라며 정 장관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대정부 질문 답변을 마치며 정 장관은 “막상 질의를 받아보니 옆에서 누가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간단치 않더라”며 땀을 닦아내기도 했다.
김 장관의 경우는 더 심했다. 입각 확정 뒤 김 장관이 당 의총에서 ‘과천에 출장 다녀오겠다’는 말을 한 것에 대한 질타가 터져 나왔다. 김 장관은 “의총에서 동료 정치인들과 나눈 덕담 수준의 이야기”라 해명했지만 ‘잔뜩 벼른’ 야당 초선 의원들의 ‘했습니까, 안했습니까’식의 공세는 김 장관이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당시 김 장관의 한 측근은 “마음의 각오를 하고 답변석에 선 것이지만, 말은 안해도 얼굴표정 보면 기분을 알 것 같다”며 김 장관의 심경을 대변하기도 했다.
감기약 파동 이후 국회 출석한 김 장관은 보건복지부 장관의 책임을 물으며 ‘예, 아니오’식의 답변을 강요하는 한 의원을 향해 “장관과 차관을 모욕하지 말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3. 부처 현안
정 장관에겐 통일부 취임 이후 제일 의욕을 보였던 남북 장관급 회담이 무산된 것이 제일 큰 부담이다. 지난 8월3일 예정이었던 이 회담이 행정가로 변신한 정 장관의 화려한 데뷔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김일성 주석 조문 논란이 불거지고 탈북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북측이 회담을 일방적으로 무산시킨 것이다. 전직 장관들을 찾아다니며 ‘개인교습’을 받고 1차~14차 회담 회의록을 외우다시피 했던 노력에 비해 결과가 허탈해진 것.
정 장관은 통일부 예산을 당·정 협의과정을 통해 2천여억원을 늘릴 정도로 부처 사업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여 왔다. 그러나 정작 성과라 할 만한 내용이 없고 향후 남북관계도 당분간 경색국면이 지속될 전망이어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김 장관에겐 갑자기 불거진 감기약 파동이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았다. 보건복지부 외청인 식품의약품안전청(식약청) 소관이지만 지난 5일 감기약 파문과 관련해 국회에 출석한 김 장관은 동료 의원들로부터 따가운 질책을 받아야 했다.
이번 감기약 파동 과정에서 식약청은 김 장관에게 사전 보고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극도의 불쾌감을 표출한 김 장관은 자신의 휴가까지 자진 반납하면서 파문 진화에 나서고 있다.
부처 업무에 대한 열성적인 적응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기 초반부터 중대사를 그르치게 된 두 장관은 전열을 가다듬고 대선주자급 정치인으로서가 아닌 행정인으로서 먼저 인정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정 장관은 일단 남북 장관급 회담 재개에 피치를 올려야 할 입장이다. 일단 통일부는 대북 지원 규모를 늘려서 회담 재개의 물꼬를 튼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용천 사고와 10년만의 폭염 등 악재가 겹치면서 북측이 최악의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고 있기 때문에 남측이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서면 현재의 경색국면은 곧 사라질 것이란 분석이다.
이 같은 노력이 현재 추진설에 그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현실화로까지 이어진다면 정 장관의 대권 레이스에 더할 나위 없는 ‘플러스 알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측이 남측의 유력 대권주자인 정 장관을 ‘길들이기’ 위해 장관급회담을 ‘미끼’로 무리한 요구를 해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장관은 감기약 소관부서인 식약청에 대한 감사 지시와 관련자 문책 등 강경한 대책을 주문했다. 이번 파문으로 국회에서까지 ‘혼쭐난’ 김 장관은 이번 파문 수습 이후 국민연금 문제 해결에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일 태세다. 최근 김 장관 홈페이지를 찾는 네티즌의 성향도 과거 20~30대 젊은층 위주에서 국민연금 문제 해결을 호소하는 중·장년층 계층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4. 여권 장악력
잠재적 대권주자로서 당내 양대 세력을 대표하던 정동영 김근태 두 장관이 행정부로 진출했지만 열린우리당 내 세력 갈등 양상은 여전하다는 평이다. 외형상 양 잠룡의 당내 경쟁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상태지만 양 진영을 대표하는 조직들의 당내 대리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당내 ‘친 정동영계’ 모임인 ‘바른정치모임’의 활동이 눈에 띈다. 민주당 시절부터 당내 소장파 모임으로 주목받았던 이 모임의 주축은 ‘천·신·정’ 트로이카와 함께 김한길 정동채 등 현 여권 실세로 성장한 인사들이다. 이 모임은 최근 ‘친 정동영계’로 분류돼 온 김현미 대변인과 민병두 기획위원장, 박영선 원내부대표 등 핵심 초선 의원들을 대거 영입해 2기 체제를 출범시켰다.
바른정치모임은 수시로 회원들끼리 회합을 갖고 있으며 서로간의 신뢰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 모임 소속 한 의원은 정 장관 지지성향에 대한 언급을 철저히 삼가며 “모임 내에서 대외비로 논의된 내용은 아직까지 한 번도 외부에 유출된 적이 없을 정도로 단단한 결속력을 자랑한다”고 밝혔다.
이 모임은 9월 중순께 모임 소속 인사 20여 명이 부부동반으로 중국 고구려 유적을 탐방하면서 친목을 다질 계획을 갖고 있다.
▲ 지난달 13일 청와대 국무회의에 앞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회의 자료를 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들은 지난 7월 마지막 주말 충북 제천의 한 휴양지에서 10여 명의 현역의원을 비롯한 회원 1백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박3일간의 정기총회를 열고 장영달 의원을 새 이사장에 뽑으면서 세를 과시했다. 이사장 선출 직후 한 인터뷰에서 장영달 의원은 “하루속히 중량감을 갖추고 미래지향적인 지도부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해 친 정동영 성향의 현 지도부를 직접 겨냥하기도 했다.
당초 이 모임에 김근태 장관도 참석하려 했다고 한다. 김 장관은 크게 개의치 않으려 했지만 ‘당내 조직을 관리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다는 주변의 만류 때문에 결국 참석을 포기하고 말았다.
국민정치연구회 소속 한 의원은 “김 장관이 국민정치연구회 총회에 무척 참석하고 싶어했다”라며 “국민정치연구회가 당내 의사결정 과정에서 적극적 활동을 펼쳐준다면 김 장관도 고마워할 것”이라 밝혔다.
국민정치연구회는 현재 당 현역의원 회원수를 34명까지 늘리며 당내 보폭을 확대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려는 듯 김 장관 본인도 얼마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를 방문해 1시간여 동안 김 전 대통령과 ‘독대’하며 남북문제 등에 관해 자문을 받는 등 정중동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여권의 대권주자가 되면 일단 당내 장악력이 제일 중요하다. 박찬종 전 의원처럼 대중적 인기가 높아도 당내 세력이 없으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올 하반기부터 내년 초 전당대회를 향한 세력 경쟁이 더욱 뜨거워질 것”이라 전망했다.
5. 청와대와 관계
정동영 김근태 두 장관은 이제 청와대와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행정가로의 변신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대권 수업’을 제대로 받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으며 그 성적표는 사실상 청와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는 김 장관에 비해 정 장관이 다소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난 1월 열린우리당 의장 경선에서 노 대통령 측근들이 정 장관을 지원해 압도적으로 당선시킨 점이나 김 장관과의 통일부 입각 신경전에서 정 장관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던 점 역시 노 대통령과의 호의적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평이다. 지난 2002년 대선과정이나 열린우리당 창당과정에서 정 장관이 노 대통령을 적극 지원한 인연이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 7월 초 정 장관이 대정부질문 답변 과정에서 ‘곧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발언을 했던 일이 있다. 그 발언이 있기 전 청와대 김종민 대변인이 정상회담에 대해 ‘아직 결정된 바가 없다’가 없다고 밝힌 것에 대치되는 것이었다. 통일부 업무가 정상회담 추진과 직·간접적 관련이 있지만 ‘정 장관이 청와대와의 교감이 있다’는 항간의 소문을 뒷받침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지난 총선 직전 정 장관이 선대위원장과 비례대표 후보직을 전격 사퇴한 배경에도 청와대가 개입됐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정 장관의 선대위원장과 비례대표 사퇴 배경에 청와대가 개입했던 것이 사실”이라 밝혔다. 노 대통령이 국회의원직마저 잃게 된 정 장관에 대한 부채의식이 어느 정도 있었음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반면 김 장관은 정 장관에 비해 노 대통령과 관계가 편하지만은 않다는 평. 입각 직전 ‘계급장을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을 만큼 김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각인돼 있다. ‘정동영을 살리기 위해 모양새를 갖추는 차원에서 김근태도 입각시킨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고 이는 김 장관측 시각이기도 했다.
김근태 장관은 이해찬 총리와의 인연이 깊다. 재야시절부터 이 총리는 자신보다 운동권 선배인 김 장관을 깎듯이 ‘형님’이라 부르면서 예우했고 정치권에 들어와서 국회의원 선수로는 이 총리가 위였지만 이 총리는 다른 의원들 보는 앞에서도 김 장관에게 늘 예의를 차렸다. 지난 4월26일 열린우리당 당선자 워크숍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도 이 총리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김 장관에게 꼬박꼬박 ‘형님’이라 부르면서 민주화운동 시절부터 다져온 인연을 과시했다.
이 총리는 입각을 앞두고 통일부 신경전에서 밀린 모양새가 된 김 장관에게 다분히 신경 써 주는 모습을 보였다. 총리 인준 절차를 마친 직후 이 총리가 직접 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입각 문제로 속이 상한 것 안다. 예우해줄 테니 행정부에서 같이 잘 해보자’는 식의 말을 건넸다고 한다. 김 장관에게 5년 후배인 이해찬 총리가 입각 전 예상처럼 부담스럽게만 느껴지지 않을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