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이재오 의원, 김문수 의원, 홍준표 의원 | ||
세 사람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박근혜 대표로 한나라당이 정권재창출을 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부정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재오 의원은 박 대표에 대해 원천 반대론이고, 김문수 의원은 보여주는 게 없어서 반대해야겠다는 소극적 반대론이며, 홍준표 의원은 반대 입장에 가깝지만 조금 더 지켜볼 수 있다는 회의론을 펴고 있다. 반대강도에서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의원의 순서를 보이고 있다.
이재오 의원이 박 대표에게 일격을 당했지만 이대로 물러서리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이재오 의원과 박 대표의 진검승부는 아직도 남아 있으며, 조만간 더 큰 싸움을 예고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거꾸로 박 대표가 대권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 세 사람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한마디로 이들까지 설득시킬 수 있어야 박 대표가 여권 주자를 꺾을 수 있는 대권주자로 비로소 올라설 수 있다는 것이다.
세 사람 중 이재오 김문수 의원은 유신시절에 감옥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재오 의원이 박 대표에게 반대하는 것만은 이해하고 있다. ‘그 사람은 당한 게 많으니까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논리다.
이재오 의원은 유신시대에 세 번에 걸쳐 모두 10년간을 감옥살이로 보냈다. 73년 1차로 투옥돼 2년6개월을 살았고, 77년 2년6개월, 79년 징역 5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모두 긴급조치 위반이다.
이재오 의원은 박 전 대통령에 의해 부당하게 감옥살이를 했고, 고문을 당했다고 말한다. 평소 동료 의원들에게도 그 같은 얘기를 자주 전한다고 한다.
8월29일 의원연찬회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이 의원은 그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군 중위였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얘긴데, 왜 쉬쉬하냐. 이회창 총재 때도 두 아들 병역문제로 말도 못했다. 조사해서 밝혀야 한다. 만델라, 등소평을 예로 들었는데 적절치 않다. 저쪽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파괴한 전력을 사과하라는 거다. 4·19혁명을 5·16으로 엎은 것이 아니냐. 또 자유민주주의 주장한 사람을 반공으로 잡아넣었다. 자유민주주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가 나고, 장관 해임안 반대한 사람을 끌고 가 고문하지 않았냐. 유신헌법은 산업화도 근대화도 아닌 개인의 장기집권을 위한 것이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듣고 있던 박 대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박 대표는 나중에 “저쪽(여권)에서 하는 얘기를 그대로 하는데, 왜 우리 당에 있느냐”고 이 의원을 쏘아부쳤다. 박 대표 말대로 이재오 의원은 열린우리당의 주장과 거의 똑같은 발언을 했고, 더 아프게 꼬집었다.
게다가 이재오 의원의 세 번째 투옥은 박근혜 대표와 직접 관련성을 갖고 있다.
이 의원은 “세 번째 감옥 간 것은 안동댐에 있었던 박근혜 대표 방생기념비가 댐을 건설하다 죽은 사람들 추모비보다 더 앞쪽에, 크게 만들어진 것을 비판했기 때문이다”면서 “당시 막걸리 반공법이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았냐”고 말했다. 당시 박 대표는 새마을 봉사단 총재 자격이었다. 한마디로 박 대표 기념비를 비판하다 감옥에 간 것이다.
이 의원의 발언을 종합해보면 이 의원은 박 대표를 단순히 독재자의 딸로서 바라보는 게 아니다. 독재의 협력자로 보는 것이며, ‘박정희=박근혜’의 등식으로 바라본다.
이재오 의원은 한 방송에서 “우리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딸로서 침묵한 나도 공범자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에 없으니 내가 그 잘못을 안고 가겠다”고 고백해야 한다며 미국으로 망명했던 옛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의 딸을 예로 들었다.
박 대표도 이재오 의원에게 반격을 가하기까지 포용 여부를 고민했다. 진영 대표비서실장은 “한 번은 이재오 의원이 박 대표 면담을 신청했다길래, 빨리 주선했더니, 알고보니 이재웅 의원을 비서실에서 착각한 것이었다”면서 “당시 박 대표도 이재오 의원 면담을 받아들이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대표도 먼저 이재오 의원에게 손을 내밀 생각은 없었다.
이재오 의원측은 “박 대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듯이 이제는 지나간 일에 불과하다. 박 대표는 이 의원을 포용불가로 분류했고, 작심하고 ‘당을 떠나라’고 압박한 것이다.
이재오 의원은 사실 유신시대에 주로 투옥됐고, 마지막 감옥생활을 89년 노태우 정권 시절 했다. 출옥한 후 곧바로 91년 민중당을 결성하면서 정치권 진입에 뜻을 둔 뒤 운동권과 거리를 두었다. 이윽고 95년 신한국당에 입당, 국회의원이 됐다.
이 의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측은 “민정당의 뿌리를 이어받은 신한국당에 입당한 것 자체가 변절”이라면서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과거는 덮어두고 새삼스레 유신의 과거를 들먹이는 것도 난센스”라고 말한다.
이재오 의원은 이회창 전 총재 시절 대선기획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한나라당이 98년 대선에서 패배한 뒤 처음으로 야당생활을 할 때 투쟁 교사가 이 의원이었다. 한나라당에서 대정부투쟁을 해본 사람이 없었던 만큼 이재오, 김문수 의원이 앞장섰고, 한나라당을 야당 기질로 변모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대선 패배 뒤 한나라당이 깨지지 않고 그나마 단일 대오를 유지, 또한번 대선을 치를 수 있게 된 데는 이재오 김문수 의원 등의 투쟁력이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재오 의원은 박 대표 시절에 와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껴버린 것이다. 이재오 의원은 총선 때 박 대표에게 지원유세를 부탁하지만 않았더라도 한층 더 자유스러울 수 있었다. 또 탄핵 역풍만 없었어도 이 의원은 혼자힘으로 당선될 만큼 지역구 관리를 잘하는 의원이었다. 최병렬 전 대표 시절 강성투쟁을 주도했던 이재오 의원의 업보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최악으로 번질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중당에서 신한국당을 거쳐 이회창 전 총재의 신임을 받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다. 김문수 의원이 말한 대로 박 대표의 발언이 제2의 유신이라면, 이재오 의원은 부녀의 대를 이은 독재의 희생양이 될 판이다.
김문수 의원은 크게 보아 이 의원과 비슷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이재오 의원이 당내에서 가장 친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으로 김문수 의원을 꼽는다. 91년 민중당 창당 당시 이재오 의원이 사무총장일 때 김 의원은 노동위원장이었다.
▲ 지난 4월29일 17대총선 한나라당 당선자 연찬회에서 악수하는 이재오 의원(왼쪽)과 박근혜 대표. 최근 친일 및 유신 청산과 관련해 ‘펀치’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조만간 더 큰 싸움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이다. | ||
김 의원은 이 의원만큼 박 대표에 사감을 표시한 적은 없다. 대신 박 대표가 적극적으로 유신에 대해 사과하고,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유신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김 의원은 절제된 언어표현을 하고 있다. 박 대표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
최근 김 의원의 언론인터뷰 중 하나.
“박근혜 리더십은 성공하고 있다. 나는 박 대표가 당을 맡으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주 같은 이미지를 가진 박 대표가 당의 복잡한 계산들을 통합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우려했던 것보다 성공적으로 당을 이끌어가고 있다.”
김 의원은 박 대표의 대권 가능성에 대해서도 “박 대표가 하기 나름”이라고 말했다. 시종일관 박 대표를 공격하는 이재오 의원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박 대표도 김문수 의원의 마음은 이해하는 편이다. 박 대표는 7월22일 3인방 가운데 유일하게 김문수 의원을 불러 독대했다.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박 대표는 김 의원에게 당직을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김 의원은 “아직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고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내 일각에서도 이재오 의원이 서울시장 욕심이 있어 박 대표 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반면, 김 의원은 특별한 사심이 없다고 해석한다. 김 의원이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사심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김 의원이 다만 유신시대 피해를 입은 만큼 박 대표를 적극 지지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반대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어정쩡한 처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당내에서는 김 의원의 유연한 처신을 정반대 측면에서 찾기도 한다. 최병렬 대표가 한때 한나라당의 차기 대선주자로 김문수 의원을 꼽은 것으로 알려졌듯이 김 의원 주변에선 대권까지 염두에 둔 행보를 하고있다는 분석이다. 김 의원이 박 대표를 무조건 반대하기보단 논리적으로 접근, 중간층의 지지를 획득한다는 전술이다. 꼴통이미지만은 피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천심사위원장을 한 덕분에 상당히 많은 의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현역 의원들은 어쨌든 김 의원의 덕을 봤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박 대표 도움 없이 자력으로 당선해 박 대표에 대한 부채 의식도 거의 없다.
김 의원은 다소 무기력하게 보이는 듯한 박 대표 이미지의 한계를 파고들어, 강력한 야당을 주장하며 자신을 내세우고 있다. 김 의원이 박 대표를 비판하는 것도 대부분 투쟁노선과 관련돼 있다. 수도 이전과 관련해 박 대표가 잘못 싸우기 때문에 김 의원이 총대를 멘다는 식이다.
김 의원은 선명한 투쟁을 주창하며 비주류의 중심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이재오 의원이 날개가 꺾인 마당에 비주류는 김 의원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다. 김 의원은 박 대표로 안된다는 분위기가 퍼질 때까지 자신의 이미지를 홍보하며 기회를 엿볼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김문수 의원의 최대 매력은 부패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김 의원은 부천의 20평대 아파트에서 검소한 삶을 살고 있다. 모 의원은 “그 집에 식탁도 없이 판을 펴고 밥을 먹기에 혀를 내둘렀다”고 말했다. 재산도 1억9천만원을 신고했을 뿐이다.
홍준표 의원은 두 사람과는 또다른 분위기다. 홍 의원은 운동권 출신이 아니라 검사 출신이다. 조직폭력배 사건을 많이 다뤄 모래시계 검사로 통했고, 슬롯머신 수사로 박철언 전 의원, 이건개 검사장 등을 구속시켜 유명세를 탔다.
홍 의원은 검사 시절 상층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해 왔다는 점에서 이재오 김문수 의원과 기질이 통했다. 모두 다 독불장군이다. 누구 명령도 듣기 싫어하고, 자신의 고집을 크게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다행히 세 사람은 크게 싸우지 않는다.
홍 의원은 7월20일 홈페이지를 통해 ‘저는 박 대표를 반대하지 않습니다’면서 이른바 전향서를 발표했다. 홍 의원은 워낙 비주류로 찍혀오면서 지역구민들로부터 압박에 시달려왔다. 이로 인해 박 대표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의원은 오로지 좌파정권의 출현을 막는 데 목적이 있고, 박 대표가 대안이 된다면 대여투쟁의 선봉에 나설 수 있다고도 했다.
홍 의원은 의원연찬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8월 중순 미국으로 떠나 9월11일께나 귀국할 예정이다.
박 대표와 비주류의 대결전에서 용케 피해 있었다. 특이한 것은 이명박 서울시장이나 손학규 경기지사가 모두 홍 의원을 자신의 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세 사람은 99년 워싱턴에서 연수생활을 같이 하면서 친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홍 의원도 이 시장이나 손 지사와 친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홍 의원은 이 같은 인연 때문인지 사석에선 “박 대표로 대선을 돌파할 수 있겠나”라며 회의론을 많이 설파하고 있다. 그럼에도 홈페이지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올릴 만큼 요즘 처신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홍 의원은 7·19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다가 막판에 원희룡 의원의 출마선언 때문에 포기했다. 홍 의원은 남경필 원희룡 의원 등 소장파와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사나이 기질의 홍 의원이 볼 때는 소장파가 “하는 일 없이 실속만 챙기는 무위도식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의원 등 세 사람은 모두 TK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의원은 경북 영양-영양고-중앙대, 김 의원은 경북 청도-경북고-서울대 경영학과, 홍 의원은 경남 창녕-대구 영남고-고려대 법학과 출신이다.
지역적으로나 기질적으로 비슷한 세 사람은 자연스레 이회창 전 총재 시절 한 팀에 배속돼 호흡을 맞춰왔다. 박근혜 대표 체제에서 비주류 3인방으로 역시 한 배를 탄 이들은 언제까지 함께 노를 저어갈 수 있을까.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