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되는 김현철씨. 지난 97년 구속 수감된 이후 7년 만에 그는 다시 구속됐다. 사진제공=오마이뉴스 | ||
김씨는 지난 9월11일 전격 구속됐다.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으로부터 지난해 2월부터 12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20억원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다. 과연 그에게 기억하기도 싫은 ‘7년 전 악몽’이 재현되는 걸까.
김씨는 아버지 YS가 재임중이던 지난 97년 5월 수많은 비리 의혹의 꼬리를 남긴 채 특가법상의 알선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검찰 수사 과정에서 92년 YS가 대선을 치르고 남은 대선자금 중 1백20억원가량을 그가 측근들의 수많은 차명 계좌를 통해 관리해왔던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밝혀낸 자금에 대해 ‘최소’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특히 최측근인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을 통해 조동만 당시 한솔텔레콤 부사장에게 대선자금 잉여금 70억원의 관리를 맡기고 ‘활동비’를 받아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는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7년 4개월이 흐른 지금 결과적으로 김씨는 자신의 생애에서 그토록 지우고 싶어 했던 ‘97년’과 또 다시 조우하고 있다. ‘악몽’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충격 탓이었을까. 그는 구속되기 전 송곳으로 복부를 찌르는 자해를 시도했으며, 굵은 눈물까지 펑펑 쏟아내는 등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최근 기자가 만난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그의 구속에 대해 “업보”라는 표현을 썼다. 구속 사유를 탓하기 전에 한때의 실력자였던 김씨가 지난 97년 이후부터 ‘이승의 업보’를 짊어져 오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 전직 간부의 말대로 김씨는 지난 97년 보석 석방 이후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지난 97년 5월17일 난생 처음 구치소에 수감된 그는 6개월간 옥중 생활을 경험했다. 최고의 권세가에서 하루아침에 ‘범법자’가 되어버린 충격에 휩싸인 탓인지 그는 갖가지 병을 얻었다.
당시 그의 법적 숙소가 된 곳은 서울구치소 ‘13동 상 14실’(공교롭게도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걸씨도 2002년 6월 이 방에 수감됐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다친 발목은 부기가 좀처럼 빠지지 않았고, 빨라진 심장 박동, 그로 인한 불면증, 시력 저하, 특히 온갖 약을 복용해도 듣지 않는 변비는 그를 더욱 괴롭혔다.
수감 3개월이 지나면서 그는 구치소 바닥에 자주 쓰러지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변비가 장염으로 번져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 그 해 10월13일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김씨는 화병까지 얻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실형을 선고 당하기까지 하겠느냐’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화를 더욱 돋운 것은 측근들의 ‘외면’과 ‘배신’이었다.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자 1심 전까지만 해도 자주 구치소를 드나들던 측근 정치인, 교수, 기업인 등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정계의 한 관계자는 “당시 김씨가 매우 크게 실망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심 이후 구치소에서 낙으로 삼던 면회를 사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할아버지 김홍조옹, 절친한 친구이자 비서실장격인 노현종, 윤성노씨의 면회도 거부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그는 가뭄 속의 단비 같은 ‘자유’를 얻었다. 서울고법이 11월3일 1억원의 보석 신청을 받아들인 것. 주거는 구기동 빌라 자택으로 제한됐지만 그보다 좋은 휴식처는 없었다. 그러나 여론의 곱지 않은 시선에 다시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해가 바뀌어서도 불운은 계속 이어졌다. 98년 2월17일 항소심에서도 1심 판결이 뒤집어지지 않았던 것. 더군다나 항소심 두 번째 공판에서 조동만 부사장에게 맡긴 7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겠다는 의사를 얼떨결에 말해버려 스스로 혐의를 인정하는 ‘화’를 자초하고 만 것으로 전해졌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팽배하다. 검찰은 지난 9월10일 김씨를 구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김씨가 ‘70억원을 사회에 헌납하겠다’는 각서를 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씨는 검찰 조사와 영장실질심사에서 “기억이 없다”고 부인했다. 김씨의 이같은 반응에 검찰은 기어코 97년 당시 김씨가 쓴 각서를 찾아냈다.
97년 당시 김씨를 수사한 심재륜 전 대검 중수부장도 확실한 ‘선’을 그었다. “각서는 확실하게 썼다. 당시 도움을 줄 구체적인 보육원의 이름까지 거명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해 4월9일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해 간신히 재구속의 위기를 넘긴 김씨는 이내 다시 몸을 낮춰야만 했다. 검찰이 한솔PCS의 인·허가 과정과 자금 출처 등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 것.
측근으로 분류된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 및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에게 검찰의 압수수색영장이 날아들면서 정가 일각에서 PCS사업자 선정에 김씨가 개입했다는 온갖 의혹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김씨는 운신의 폭을 좁히고 상도동 외에는 출타를 자제했다고 한다.
▲ 지난 97년 한보청문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위)과 보석으로 풀려난 뒤 <일요신문> 카메라에 최초로 포착된 김현철씨. | ||
이날 그는 지난 92년 대선 때 집을 팔아 YS에게 선거 자금을 대주었으나 받지 못했다는 오아무개씨 등에 의해 붙들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납치 15분 만에 움직이는 차에서 탈출,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경찰 조사에서는 오씨 일행이 6월5일과 6월9일에도 김씨를 납치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일주일여가 흐른 6월23일. 김씨는 법원의 파기 환송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법정 구속 조치를 면해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는 또 다시 암울한 순간을 맞아야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8·15 사면 대상에 김씨를 추가하는 것을 검토했으나 법무부와 여권의 강력한 저지로 인해 불발된 것이었다. 그는 뒤이어 불거진 측근들의 소식에 또 한 번 풀이 꺾이게 된다.
9월 경성그룹 비리를 재수사하던 검찰이 김씨의 측근인 성균관대 김원용 교수, 전 청와대 비서관 강상일, 김영득씨가 95∼96년 경성그룹 이재학 사장으로부터 지역 민방사업자 선정과 관련, 청탁을 받았다는 혐의를 밝혀낸 것.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씨는 또 다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말았다. 더군다나 10월 절친한 대학 동기인 39쇼핑 박경홍 사장의 자살 소식까지 겹쳐 마음 한구석을 쥐어짜야 했다고 한다.
그 후 경제청문회 증인 출석 여부로 고민하던 김씨는 두 번의 ‘8·15’를 거치며 그토록 힘겨워하던 ‘짐’을 벗어던졌다. 지난 99년 8월15일 광복절 특사로 잔형이 면제되고, 이듬해 8월15일 사면 복권돼 공민권을 회복한 것이었다.
사면 복권이 되기 넉 달 전 김씨는 1년 과정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김씨는 오스틴주립대학 피쉬긴 교수의 객원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정당 정책을 묻는 여론 조사 기법을 주로 연구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악몽은 이어졌다. 그 해 10월 두 번째 납치 위협을 받았던 것. 당시 김씨는 자택으로 들어오는 괴한들을 피해 밖으로 나와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김씨는 이와 관련해 “집으로 침입한 괴한 모두가 특정 지역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현지 사람은 아니었다”라며 정치권의 공작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지난 2001년 6월, 14개월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씨는 다시 한번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정국의 분위기가 조용히 수그러들 무렵, 김씨는 그해 9월1일자로 경남대학교 부설 극동문제연구소의 비상임 연구위원에 임명됐다. 2002년 3월부터는 행정학과 대학원 출강도 계획돼 있었다. 그가 학계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은 당시 경남대 총장인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의 제의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당시 그의 행보를 두고 뒷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씨나 측근들은 “평소에 관심이 많던 국가경영학 활동에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정·재계의 상당수 인사들은 “부산이나 경남 지역에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겠느냐”는 반응이었다. 심지어 지역 정가에서는 “경남 지역 한나라당 공천을 사전 예약해 놓고 내려온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돌았다.
실제 김씨는 이듬해 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당시 YS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관계 개선 분위기가 흐르고, 월드컵 등 각종 이벤트에 대한 관심이 일면서 자연스레 외부 활동을 늘려갔다. 이때부터는 그가 그해 8월 재·보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관측이 대세로 굳어졌다.
그러나 민심은 김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3월부터 경영대학원에서 ‘21세기 국가경영’이란 과목으로 출강하려는 계획은 학생들의 저지로 무산됐다.
이 일은 김씨의 정치적 재기 움직임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했다. 하지만 김씨는 출마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산에 전세 아파트를 얻어 지역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김씨는 당시 한나라당 중진인 강삼재 의원과 김혁규 경남지사 등을 공개적으로 만나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 당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몇몇 지역 시민단체들이 ‘김현철씨 재보선 출마 반대 대책위원회’까지 출범시킬 정도였던 현지 정서도 한몫을 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당시 김씨에 대한 지역 비판 여론이 예상외로 높아 YS를 만난 서청원 당시 대표도 고개를 젓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결국 7월3일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공개적인 이유는 ‘아버지를 위해서’였다.
이후 경남대로 다시 돌아간 김씨는 10월 <너무 늦지 않은 출발이기를>과 <세계화와 21세기 국가경영>이라는 두 권의 수필집을 펴내며 그동안 가슴속에 쌓아두기만 했던 이야기를 공개했다. 이 책에서 김씨는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드러내는 동시에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아버지의 ‘고집’을 비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보궐 선거에서 다시 한번 좌절을 맛봤지만 재기를 향한 그의 집념은 오히려 더 자라났다. 김씨는 지난해 2월부터 17대 총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YS의 고향 거제가 목표였다.
그해 3월 그는 거제 중곡동 덕산 임대아파트로 홀로 이사를 했다. 5월에는 거제미래발전연구소를 개소하고 거제 인근 농촌과 장애인 복지시설, 심지어 굴 공장과 유자 농원까지 모조리 방문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발품을 들이면서 그는 재기가 가능하리란 꿈을 키웠다.
김씨는 올해 2월11일 경남 거제시 장목면 대계리 아버지 YS의 생가에서 총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본격적인 민심 잡기에 나섰다. 실제 2월24일부터 3월5일까지 지역 민심 읽기에 나서 무려 3천명 이상의 거제 정·재계 관계자들 및 주민들을 접촉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김씨에 대한 지지도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거제 지역 한 언론사의 대표는 “김씨가 거제에서 출마 의지를 내비치자 주민들 사이에서 ‘마산에서도 안 되는데 거제에 와서 뭐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는 반발 의식이 강하게 형성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선거사무실 개소식에도 참석해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했지만 주민들의 생각은 좀처럼 변하지를 않았다”며 김씨의 고전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총선 직전 일부 선거운동원들이 금품을 받은 사실이 경찰에 적발되면서 김씨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수사가 진척되면서 자금 출처의 핵으로 자신이 지목되고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게 되자 결국 김씨는 지난 4월4일 총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제 지역 정가의 한 관계자는 “김씨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 심리를 돌려보기 위해 아마 무리수를 둔 듯하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씀씀이가 커졌을 것”이라고 상황을 나름대로 설명했다.
정치권을 통한 재기의 몸부림이 무위로 끝나고 만 뒤 김씨는 다시 ‘무대’를 옮겼다. 지난 6월 고객관계 관리기업 ‘코헤드’를 자본금 1억원에 설립한 뒤 CEO로 또 한번의 변신을 시도했던 것.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제2의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7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에게 권력자의 실세 아들로서 짊어져야 할 ‘업보’가 있다면,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