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수 인천시장. | ||
안상수 인천시장의 항변이다. 2억원이 든 굴비상자 전달 사건에 대한 의혹이 갈수록 자신을 향해 죄여오자 지난 9월23일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억울한 심정을 표출했다. 한나라당에서도 거들고 나섰다. 10월3일 한나라당은 “뇌물을 신고한 시장을 오히려 준범법자로 내몰고 있다”고 수사당국을 강력히 비난했다. “무슨 정치적 음모가 있는 것 같다”는 의심도 감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시장을 바라보는 상당수 국민들의 시선은 갈수록 차갑기만 하다. 왜일까. 그 해답은 인천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가 대신 내놓는다. “처음 했던 말을 일관되게 주장하지 못하고, 자꾸 번복하고 해명하고 또 변명한다. 그런 시장을 지켜봐야 하는 우리 시민들의 심정은 다시 한번 참담해진다.”
성공한 경제 전문가로 정치권에 영입된 안 시장.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 길지 않은 안 시장의 8년 정치 인생은 적지 않은 구설수와 함께 그에 따른 본인의 해명과 변명으로 점철되고 있다. 그를 보면 정치인으로서 흠결 없이 도덕성을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고단해 보인다.
대기업 사장을 지냈던 안상수 시장이 재계를 떠나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것은 1995년 지자체 선거 때였다. 당시 박찬종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입문했다. 박 후보는 낙선했으나, 그는 그 이듬해 15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에 의해 성공한 기업인 케이스로 영입됐다.
당시 김석원 쌍용 회장과 함께 영입됐던 안 시장의 경제계 이력은 사실 그다지 화려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미국에서 석사학위까지 받고 국내 대기업의 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점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분류될 만했다.
동양증권에 있을 때에는 2천만원의 종잣돈으로 주식과 선물을 이용해 1백 배인 20억원으로 불리기도 했을 만큼 수완과 실력이 남달랐다. 하지만 누구보다 야망이 컸고, 성취욕이 강했던 탓이었을까. 목표를 위해서 앞만 보고 내달리는 그의 성격은 재계에서는 추진력이란 장점으로 작용했으나, 신중한 처세가 극히 요구되는 정치권에서는 구설수와 무리수가 뒤따를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결함으로 비치지기도 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재계에 계속 있었다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치권으로 들어온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됐다”는 안타까운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실제 그의 정치 역정은 성공보다는 좌절이 더 많았던 편이다. 96년 총선과 98년 인천시장 선거에서 잇따라 낙선했다. 99년 국회의원 재선거에 나서 당선, 금배지를 달았지만, 곧이은 2000년 총선에서 또 낙선했다. 그러던 중 지난 2002년 3대 민선시장 선거에서 당시 한나라당의 돌풍을 타고 인천시장에 당선됐다.
하지만 다섯 차례의 선거전을 치르면서 안 시장은 철저하게 벗겨졌다. 재계에 몸담을 때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에 그 자신도 당황스러울 만했다. 다소 베일에 싸인 그의 과거에는 선거전을 통해 이른바 ‘4대 의혹’이라는 딱지까지 붙어 버렸다. 심지어 그가 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출생에서부터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당초 51년생으로 알려졌으나, 현재에는 호적이 정정되어 46년생으로 명기돼 있다. 한때는 48년생이라는 말도 나왔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나이는 병역 면제 사유와 맞물리며 또 하나의 의혹을 낳았다. 지난 선거 과정에서 그를 가장 괴롭혔던 이른바 병역 기피 의혹이었다.
안 시장은 병역면제 사유를 77년 11월자 고령에 의한 면제와 77년 12월자 생계곤란으로 인한 면제 두 가지 모두 갖고 있는 아주 특이한 기록의 소유자가 되었다.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해 일부러 호적의 출생연도를 바꾼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충남 태안 출신의 안 시장은 가난한 어부의 집안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것으로 전해졌다. 초등학교 때 인천으로 전학온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제2의 고향 인천이 자신의 ‘지역구’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와 성취욕이 남달랐던 그는 신문배달 등을 하면서 힘겹게 공부해 명문인 경기고와 서울대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전해졌다.
▲ 굴비상자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인천경찰청 수사2계 사무실. | ||
그는 대학원을 진학하고 74년 제세그룹에 창업 멤버로 참여한 것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특히 당시 제세그룹은 경기고 출신들이 모여서 만든 기업으로 재계에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며 오늘날에도 국내 벤처기업의 효시로 통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제세그룹은 74년에 설립된 데 반해 창업 멤버라는 그의 입사 연도는 79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연 경력 허위기재 의혹이 불거졌다. 이에 대해 안 시장은 “정식 입사만 79년일 뿐, 그 이전부터 고교 동기들인 창업 주체들과 계속 사업 계획 논의에 함께 참여했다”고 해명했다.
70년대 화제를 일으켰던 제세그룹이 문을 닫자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트로이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고 선물중개사 자격증도 땄다. 귀국 후 그는 동양그룹에 입사했다. 80년대 동양증권 이사 부사장을 거쳐 92년 동양선물 미현지법인 대표이사에 올랐다. 이후 동양그룹이 데이콤을 인수하자 데이콤 이사와 동양이동통신 사업본부장을 거쳐, 동양그룹 종합조정실장 사장에까지 올랐다.
한때 정가에서는 이 시기의 행적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됐다. 78년에 서울 낙원동의 한 룸살롱에서 사장으로 일했다는 폭로가 불거졌다. 이 같은 내용은 당시 종업원으로 일했다는 김아무개씨의 법정진술서에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 시장은 “생활 형편이 어려워 웨이터로 일한 적만 있을 뿐”이라며 부인했다.
동양증권에 이사로 재직중이던 89년을 두고는 또 난데없는 파친코(슬롯머신) 지분 참여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N호텔의 성인오락실 지분을 보유해서 배당금을 수령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법원에서도 어느 정도 사실로 인정되기도 했다.
2002년 7월 인천 시장에 취임한 후에도 안 시장은 신중치 못한 처신으로 인해 도덕성 시비를 자초하고 말았다. 특히 차량 범칙금 미납 사실과 뇌물수수자의 정무부시장 임명 건은 그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안겼다.
이후 시정에 몰입해 왔던 그는 지난 7월 자신의 인터뷰와 시정 홍보 기사가 크게 실린 한 주간지를 시에서 대량 구매해 각 사회단체에 무료 배포한 것이 알려져 선거법 위반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분명치 못한 처신으로 의혹을 자초하곤 했던 안 시장의 행태는 이번 ‘굴비상자 사건’에서도 또다시 재연되고 말았다. 그는 당초 B건설은 모르며, 문제의 굴비상자를 보냈던 사장인 이아무개씨와도 일면식이 없다고 강조했으나, 단 며칠 만에 이씨와 사석에서 한두 차례 만난 적이 있음을 시인하고 말았다. 자신이 직접 이씨에게 여동생의 집주소를 메모해 줬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인정과 부정으로 해명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이씨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당초에는 “양측 비서진들의 주선으로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가, 곧이어 “15대 전국구 국회의원이던 안아무개씨의 소개로 만났다”며 다시 내용을 수정했다.
당초 이번 파문도 굴비상자의 전달 시점과 그 처리 과정에서 안 시장과 여동생과의 진술이 서로 다른 점(본지 9월12일자)에서부터 의심이 비롯됐다. 오누이 간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면서 혼선을 빚자 뒤늦게서야 그는 “확인해보니 여동생 말이 맞다”고 정정하기도 했다.
인천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시장이 수주업체 대상이 되는 사업자를 공식석상인 자신의 사무실에서 만나지 않고, 단골 카페와 호프집 등 사적인 장소에서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그 자체가 이미 의심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면서 “안 시장 말마따나 뇌물을 신고했으면 그것으로 일단락되어야 하는데도, 의혹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문다면 그 원인이 과연 누구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명확히 직시하고, 제발 좀 확실하고 책임질 수 있는 언행을 보여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연 안 시장의 ‘클린 신고’로 시작된 굴비 파문은 어디까지 이르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검찰의 수사 결과에 따라 안 시장의 정치인으로서의 생명도 궤를 달리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