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기자가 첫 대면했을 때 받았던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이미지였다.
기자는 약 두 시간에 걸쳐 김 전 회장과 사업, 인생 등에 관한 인터뷰를 가졌다. 당시 40대 중반의 나이였던 김 전 회장은 인터뷰 내내 타인이 말할 기회를 별로 주지 않고 자신의 사업구상, 인생관 등을 밝힐 정도로 정열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 얘기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다소 침울한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사업과 관련된 대목에서는 열변을 토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면 그는 직접 펜으로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소상하게 설명하는 세심함도 있었다.
기억해보면 그의 집무실은 매우 고풍스러웠다. 당시 홍보책임자였던 김아무개 전무의 말에 따르면 그의 집무실은 부친인 김성곤 전 회장이 사용하던 집기 등을 거의 대부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집무실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가 용평리조트를 개발할 때 현장에서 직접 공사를 진두지휘하던 모습이 담긴 사진을 큼지막하게 벽에 걸어둔 장면이었다. 용평리조트개발에 대한 그의 애정을 느끼게 한 부분이었다.
기자가 김 전 회장을 만날 당시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그는 90년대 초반 재계에 유행병처럼 돌던 통신사업 진출을 위해 쌍용정보통신이란 회사를 설립했고, 금융산업의 꽃이라던 증권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쌍용증권을 본격 키우는 한편, 쌍용정유와 쌍용자동차를 국제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야심적인 플랜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들 사업에 매달린 것은 기존 주축사업이던 시멘트사업이 급속하게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 가장 큰 이유였던 듯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 전 회장도 스스로 인정했다. 실제로 쌍용시멘트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쌍용의 캐시카우(현금 창출 창구)였지만, 건설산업의 위축과 함께 이 사업은 더이상 황금알을 낳지 못했다.
시멘트사업에서 새로운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하려던 그런 점에서 그의 판단은 옳았다. 그러나 그는 이 대목에서 한 가지 큰 오류를 범했다. 너무나 자신에 찬 나머지 그는 자신의 역량을 올인하는 분야에 대한 선택을 잘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자동차 사업이었다. 쌍용의 자동차사업은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코란도를 만들어 히트친 것 외에도 별 볼일이 없었다. 사실 코란도 붐은 대단했다. 지프형 자동차에 별로 익숙하지 않던 내수시장에 코란도는 새로운 레저형 자동차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현대그룹 계열이던 현대정공이 갤로퍼라는 지프형 자동차를 출시하면서 타격을 받았다.
코란도에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더 큰 야망을 품었다. 자동차사업을 확대하기 위해 그는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이 부분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김 전 회장은 자동차사업에 수조원을 쏟아부으면서 계열사를 모두 동원했다. 결국 자동차사업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그룹 전체가 침몰하는 사태로 전개되고 말았다.
사실 쌍용그룹에는 알짜배기 사업들도 적지 않았다. 쌍용증권이나 쌍용화재, 쌍용정보통신, 쌍용제지, 쌍용정유 등은 전망도 밝았고 수익도 많이 나는 편이었다. 그러나 자동차사업에 거의 모든 돈을 처넣다보니 살아남을 수 없었다.
기자가 김 전 회장을 다시 만난 것은 2년 전쯤이었다. 시내 한 호텔에서 열렸던 행사에서였다. 행사를 주관한 단체는 한때 김 전 회장이 회장으로 있던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는 이 단체의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있었다.
10여 년 만에 다시 본 김 전 회장의 모습은 왠지 초라해 보였다. 자신만만했던 젊은 사업가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었다. 재계랭킹 6위의 재벌 쌍용그룹을 호령하던 재벌 2세의 당당함은 없었다. 이미 쌍용그룹도 해체된 상태여서인지 그는 기자와 눈인사를 나누면서도 명함조차 건네지 못했다.
정선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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