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실성과 청렴성으로 군내 신망이 두터운 남재준 육군참모총장. 하지만 이같이 지나친 ‘도덕적 결벽증’이 군 최고 수뇌부로서 오히려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일보 | ||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맞은 24일, 남 총장은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미 계룡대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만나는 장교들마다 서로 인사 비리에 대한 투서 내용의 진실 여부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기 바빴다. “결국 참모총장이 옷을 벗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여의도’에서는 국정조사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육본은 온갖 비리의 온상으로 낙인찍히고 있었다.
평소 부대 내에서 활기찬 모습을 잃지 않았던 남 총장도 눈에 띄게 정적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애꿎은 줄담배만 계속 이어졌다. 가끔씩 업무 관계로 만나는 부하 장교들이 “총장님 기운 내십시오. 저희들은 총장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을 할 때,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비장함은 감추지 못했다.
24일에 이어 25일 오전까지 남 총장의 컴퓨터에는 장교들이 보내온 격려성 이메일이 계속 들어왔다. 남 총장은 이날 오전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로 직접 해명성 전화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육본에서 자료 제출을 거부한 적이 없다”며 윤광웅 국방장관과 군검찰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그 방대한 인사 자료 전체를 요구하기에 혐의가 있는 내용에 대해서만 자료를 적시해달라고 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육본의 한 간부는 “압수수색에 대해서도 총장님이 동의했다”고 전했다.
이때를 정점으로 여론의 시각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투서의 내용에 대해서도 신빙성이 약한 것으로 판명났다. 군검찰단에서도 남 총장의 반박에 대해서 ‘재반박’으로 대응하진 않았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던 이날 오후, 육본은 다시 한번 난리가 났다. 남 총장이 윤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의를 표명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항명이라느니, 도의적 책임이라느니, 의혹은 더욱 확산됐다. 육본의 한 관계자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압수수색에 동의하면서 사의까지 생각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만큼 총장님 스스로 결백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고 본다”고 추정했다.
그날 저녁 뉴스에선 청와대에서 사의가 반려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다시 술렁거림이 일었다. “남 총장이 대통령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사의를 계속 고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육본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께서 반려하셨는데도 남 총장이 계속 사의를 고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항명이 되는 것인데,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결국 26일 남 총장이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 정상적인 업무에 들어감으로 해서 상황은 봉합의 국면을 맞았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군은 엄청난 생채기를 입었고, 남 총장 역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두 개의 혼동된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 도덕성과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대쪽 같은 군인의 모습’이 하나고, 고집과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군의 보수성을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 역할자로서의 모습’이 또 다른 하나다. 하지만 군 주변에서는 대체로 전자 쪽에 무게를 싣고 있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실제 남재준은 대체 어떤 군인인가. 남 총장은 동기생들 사이에서 ‘생도 3학년’이라는 별명을 듣고 있다. 육사 생도 3학년은 학교 내에서 군기의 표상으로 통하고 있다. 육사 25기 동기생인 A씨는 “생도 시절부터 그의 엄격한 자기 관리와 장교로서의 품위 유지에 대한 자존심이 남달랐다”고 평했다. A씨는 “간혹 언론에서 그에 대한 프로필로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지만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세다’는 평을 하는데, 이는 사실과 좀 다르다. 함부로 타협하지는 않지만 합리적인 면이 강하다”고 전했다.
남 총장 또한 자신에게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뒤따른다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융통성은 방책의 다양성이지 처세술은 결코 아니다. 처세술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유리한 면만 추구하기 때문에 스스로 죽을 수가 없고 죽을 수 없는 사람은 전투를 할 수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남 총장은 현재 육사 25기 동기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그만큼 동기들 사이에서도 비교적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A씨는 “동기 가운데 합참의장과 육참총장이 모두 포함되다 보니 지난해부터 동기모임 자체가 부담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그래도 간혹 부회장을 중심으로 모이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회장인 남 총장에게 전화로 ‘보고’만 한다”고 전했다.
1944년생으로 서울 출신인 남 총장은 배재고를 졸업하고 1965년 동기생들보다 한두 살 많은 나이에 육사에 입학했다. 그는 비교적 유교적 가풍이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선친이 한학에 뛰어나서 그 역시 한시 등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는 평도 이런 집안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는 얘기가 있다.
또 다른 동기생 B씨는 “남 총장이 항상 진급 1순위로 순탄한 길을 걸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는 영관급 시절에 진급이 안돼 옷을 벗을 결심도 했었다”고 전했다. 실제 남 총장도 지난해 5월 육군본부에서의 한 강연에서 “중령 시절 진급이 안돼 포장마차를 하려고 알아봤더니, 실제 그 수입이 중령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대개 80년대 이전만 해도 육사 출신들은 큰 하자가 없는 이상, 대령 진급까지는 시켜준다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이었다. 특히 남 총장은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대령 진급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B씨는 “중령까지는 성실성 하나만으로도 진급할 수 있지만, 대령부터는 이제 ‘정치력’이 뒤따르는 법”이라는 말로 남 총장 성격의 한 단면을 우회적으로 설명했다. 즉 남 총장이 성실성은 타고났지만 정치력은 취약했다는 점을 대변해주는 대목이다.
육참총장에 임명된 직후 그가 첫 일성으로 유난히 군 인사의 투명성을 강조해온 것도 그의 전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영관 시절의 마음고생이 한 몫을 했으리란 얘기도 나오고, 인사 분야의 핵심 보직인 육본 인사참모부장을 맡으면서 군 인사의 내부 문제점을 절감했으리란 게 주변의 평이다.
지난 9월 이른바 ‘정중부 발언설’보다도 이번 투서 파문에 남 총장이 더 상심했던 것 또한, 그만큼 그 자신이 재임기간 중 인사에 관련된 비리나 잡음만큼은 철저하게 뿌리뽑겠다는 의지가 확실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남 총장이 직접 기자들을 상대로 해명 인터뷰를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정치력’이 부족한 남 총장이 육참총장에는 어떻게 발탁됐을까. 남 총장이 노무현 대통령과 처음 만난 것은 당선자 시절인 지난해 1월이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한미연합사를 방문해서 라포트 사령관과 환담했는데, 여기에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었던 남 총장이 배석했다. 이후 노 대통령은 군 인사 자료를 보고받는 과정에서 남 총장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를 갖게 됐다고 한다. 성실성과 청렴성으로 군내의 신망이 두텁다는 평이 다수였다는 것. 참여정부 첫 육참총장에 임명된 배경으로 분석된다.
남 총장이 워낙 정치적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는 탓에 현 정권에 대한 호감도를 엿보기 어렵지만, 당초에는 ‘그나마 군 내에서 참여정부와 비교적 코드가 맞을 수도 있는 장성’이라는 평이 우세하기도 했다. 그가 도덕성을 유난히 강조하고, 비정치적 성향이라는 점, 그리고 과거의 관행을 깨트리고자 하는 일련의 개혁 조치를 취한 부분을 근거로 들기도 했다.
심지어는 노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 일대기를 다룬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권장한 바가 있는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남 총장 또한 부하들 앞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각별히 표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장군은 자기 관사에 있는 오동나무 한 그루를 달라는 상관의 요구를 거절한 대가로 변방을 10년씩이나 전전했지만 폐선 12척으로 적선 3백여 척을 물리칠 수 있었다. 때론 고지식할 만큼 정직한 장수만이 적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남 총장의 이 같은 지나친 ‘도덕적 결벽증’이 군 최고 수뇌부로서는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예비역 장성은 “어차피 별을 세 개 네 개 달고 참모총장까지 오르게 되면 어느 정도 정치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장군이란 신분 자체가 정치권에서 임명하고 평가하는 것 아닌가. 총장은 군 내부의 사기도 중요하지만 군 외부의 평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정치력이 필요한 것이다”고 평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들리는 얘기에 따르면 남 총장이 골프를 안 치기 때문에 대통령의 군 수뇌부 골프 초청에도 응하지 않고 다른 이를 대신 내보낸다고 한다. 이는 군 내부의 시각으로는 혹시 소신 있는 행동으로 비칠지도 모르겠으나, 최고 지휘관으로서 적절한 처신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현 정권과 남 총장의 삐걱거림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사법개혁과 관련한 군검찰의 독립화에 남 총장이 반대 의견을 표명하면서부터였다. ‘정중부 발언설’도 이때 불거졌다. 일단 사실이 아닌 것으로 봉합됐지만 사실상 여권에서는 이때부터 남 총장을 군 개혁의 걸림돌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열린우리당에서는 남 총장을 가리켜 ‘고지식 그 자체’라는 말까지 나온다.
확실한 근거가 다소 미약한데도 불구하고 정중부 발언설에 이어 진급비리 투서 파문이 연이어 다소 과장될 정도로 크게 불거지자, 정치권과 군 주변에서 여권 개혁 주도세력들의 ‘남 총장 죽이기 시나리오’라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