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노무현 대통령이 신임 이기준 교육부총리(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잠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기준 부총리는 도덕성 시비가 일면서 5일 만에 낙마했고, 이는 청와대 인사시스템에 대한 총체적 논란으로 이어져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 | ||
인선 과정에서 불거진 갖가지 도덕적 시비는 차치하더라도, 이 부총리 카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청와대가 예상치 못한 여론의 반발로 혼선의 혼선을 거듭했던 것이 어찌 보면 ‘화’를 키웠던 셈이다.
이 전 부총리의 자진 사퇴 이후 즉각 각료 인선을 담당하는 청와대 인사추천위원회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상황이다. 각 언론을 비롯, 교육 단체들이 제기한 이 부총리의 재산 관련 의혹과 서울대 총장 시절 불거진 도덕성 시비 거리가 대부분 사실로 밝혀지면서 인사추천위원회를 둘러싼 논란은 청와대 인사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론’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는 결국 이 부총리를 검증하고 추천하는 과정에 참여한 일부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의 사퇴라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1·4 개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 부총리와는 대학 시절부터 끈끈한 우정을 맺어온 친구 사이로 알려지면서 후보 선정과 추천 배경에 대한 의혹의 목소리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동남아순방을 다녀온 이해찬 국무총리가 교육부총리 제청 과정에서 이 부총리를 적극 추천했다는 고해성사를 하면서 ‘타는 불에 기름 붓는’ 격이 되어 버렸다.
일단 이번 부총리 인사 파문과 관련, 청와대의 대외 정보 수집 및 전달, 검증 라인이 한계를 드러내지 않았냐는 여론이 불붙듯 타오르고 있다. 이 전 부총리에 대한 정보 수집이 단순히 인물 데이터베이스 검색 수준에 그쳤으며, 모은 정보조차 인사추천위원들 내에서도 자유스럽게 공유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그러다보니 인사위원들뿐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도 도덕성 시비가 자주 거론된 이 부총리를 교육부수장으로 임명한 뒤 몰아닥칠 ‘후폭풍’을 예측하기가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도 흘러나오고 있다.
전국 교수협의회, 학부모 협의회 등 교육 관련 단체뿐만 아니라 참여연대 등 각종 시민단체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들 역시 이 전 부총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청와대 내에서 ‘어필’하지 못한 점을 이번 인사의 결정적인 ‘패착’으로 꼽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서울대 교수는 “이미 서울대 총장 재직 시절에 판공비 과다 사용, 사외이사 겸임, 장남의 이중 국적 및 병역 문제 등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이 전 부총리를 그것도 교육부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은 청와대가 짚을 지고 불 숲에 뛰어든 꼴밖에 되지 않느냐”며 “이 전 부총리를 노 대통령에게 천거한 인선위원들이 교육계나 학계의 실질적인 목소리에 조금만 귀를 기울였어도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혔다.
그나마 이 전 부총리가 교육계 내에서 그리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보고된 내부의 정보도 최종 임명 후보 선정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청와대 각 비서실은 다양한 정보 루트를 활용해 이 전 부총리에 대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으며, 일부 관계자들은 사적으로 친한 학계 관계자나 언론 기자들을 통해 이 전 부총리가 서울대 총장 시절 불거진 각종 도덕성 시비로 인해 교육계나 시민단체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확립비서관실에서는 지난 1월3일 인사추천위원회가 열린 시점을 즈음해 여론의 평가를 토대로 ‘이기준씨가 교육부총리가 되기에는 부적격하다’는 보고서까지 올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이번 인사 파문을 둘러싸고 인사추천회의 의장인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 인선을 담당한 정찬용 인사수석, 문재인 시민사회수석, 이병완 홍보수석,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질타하는 여론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특히 이번 인사에서 각료 제청권을 행사한 이해찬 국무총리가 이 부총리를 적극 추천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각료 인사의 키를 쥔 김우식-이해찬 라인이 회의 전에 이미 이 전 부총리를 최종 후보로 낙점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뒤이어 박정규 민정수석이 이 전 부총리 장남의 연세대 특혜 입학 의혹 건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전 정보를 인사 회의 자리에서 보고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사전 내정설’엔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두 사람이 이 전 부총리와 개인적으로 막역한 사이라는 데에 기인한다. 과거 송자 전 연세대 총장 등이 교육부 장관에서 물러난 사유보다 여론이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만한 흠집을 묻어둔 배경에는 사적 인연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전 부총리와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그야말로 동기 이상의 우정을 과시하는 평생지기로 알려졌다. 각각 서울대 화학공학과 과대표와 연세대 화학공학과 과대표로 학창시절부터 인연을 맺게 된 두 사람은 ‘전국공과대학 화공과 학생연합회’를 함께 조직하며 흉허물 없는 사이로 발전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두 사람 모두 서로를 가장 친한 교우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게 교육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실제 인터넷 등의 이 전 부총리와 김 실장에 대한 인물정보란에는 서로의 이름이 ‘가장 친한 교우’로 기재돼 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한국공학기술학회에서는 회장과 부회장, ‘사이언스 북 스타트 운동본부’에서는 공동 대표로, 재단법인 한국공학한림원에서는 회장과 이사로 지난해 3월까지 함께 재직한 바 있다. 또한 서울대 총장과 연세대 총장 재직 시에는 한 업체로부터 장학 프로그램을 동시에 기증받는 등 늘 ‘사고와 행동을 같이하는’ 둘도 없는 파트너였다.
이해찬 국무총리도 이 전 부총리와 상당한 면식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각에서는 이 총리가 98년 초 김대중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정책 분야 간사를 맡을 당시부터 과학기술부장관 후보로 거명된 이 전 부총리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은 DJ정부 출범 후 교육부 장관과 서울대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관계가 두터워졌다는 게 서울대 현직 교수들과 교육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때의 인연 때문에 이 전 부총리가 총장 시절 도덕성 시비에 휘말렸을 때 이 총리가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실제 지난 98년 10월 이 전 부총리가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할 당시 두 아들이 병역 면제된 사실이 밝혀져 위기를 맞았으나 ‘고의적인 병역 회피가 아니다’며 대통령에게 그대로 임용 제청을 한 바 있다.
또한 이 전 부총리가 총장 재임 중 LGCI(LG화학의 지주회사)의 사외이사를 겸임한 사실이 드러나자 거리낌 없이 “이해찬 장관에게 구두로 허가를 받았다”고 해명한 부분에 대해서도 당시 이 총리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묵인해준 바 있다.
이에 대해 국무총리실 관계자는 “당시는 교수들의 사외이사 겸직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안다”면서도 ‘실제 이 전 부총리의 사외이사 겸임을 구두로 허락한 적이 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편 후보 선정뿐 아니라 최종 임명 후보의 검증 과정도 너무나 안일하게 진행되지 않았냐는 지적도 들려오고 있다. 특히 이 전 부총리 소유의 땅 건물주가 미국 국적의 장남인 것으로 뒤늦게 밝혀지는 등 이 전 부총리의 부동산 변동 사항은 거의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 <일요신문>은 이 전 부총리가 서울대 총장 재직 기간 동안 공직자윤리위원회에 신고한 부동산 외에 또 다른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을 단독 확인했다. 98년 12월21일 발행된 관보에 따르면, 이 전 부총리는 충남 아산시 탕정면 갈산리 산 44번지(약7천6백13평), 산 47-6, 47-7(약 14.7평), 산 54-3번지(약2백73평), 경기 수원 인계동 1042-2번지(약1백53평), 용산구 서빙고동 아파트(55평) 등 총 6건의 부동산을 신고했다.
그러나 취재 결과 산 54-1번지 땅(약 3백33평)도 이 전 부총리가 가족 두 사람과 같은 비율로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갈산리 157번지 토지 약 4백49평도 지난 76년 10월30일 증여받아 형제 6명과 똑같은 비율로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지분을 나눠 갖고 있는 부동산은 신고하지 않은 것이다.
이기준 파문으로 청와대 인사 검증 시스템의 난맥상이 드러나면서 청와대는 초상집 분위기다. 분위기 쇄신과 교육 개혁을 외치며 이기준 카드를 뽑아든 노무현 대통령은 오히려 청와대와 여당의 대대적인 인물 구도 재편과 인사 시스템 정비 계획을 신년 벽두부터 고심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