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여옥 한나라당 대변인이 최근 단독으로 제1야당의 ‘입’으로 떠올랐다. 그가 ‘장수’할 수 있는 비결로는 강경한 논조와 특유의 감각, 빼어난 글솜씨 등이 꼽히고 있다. 반면 여당에는 ‘토론 기피대상’으로, 진보 네티즌들에게는 ‘궤변을 늘어놓는 정치인’으로 비난 | ||
전 의원이 지난해부터 이어진 총선-탄핵정국-수도이전 위헌 등의 숨가쁜 정국 속에서도 오랫동안 대변인으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먼저 그는 강성 논객을 자임해 야당의 입지가 약했던 험난한 정국을 정면돌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특유의 순발력과 오랜 언론인 활동을 통한 ‘감각’, 그리고 빼어난 글 솜씨도 단독 대변인직으로 가는 데 지름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여당에서는 그가 일방적이고 비논리적인 가치관을 가졌다며 토론 기피 대상 1호로 찍고 있다. 또한 예전에 비난을 퍼붓던 정치인들을 ‘주군’으로 두 번이나 모신 경험 때문에 줏대가 없이 ‘오락가락한다’는 얘기도 듣는다. 당의 공식 ‘저격수’로 나선 전여옥 의원의 ‘장수’ 스토리를 소개해 본다.
한나라당에서는 대변인을 ‘하나’라고 부르나요.”(열린우리당 박영선 원내부대표)
“아나운서 하신 건 알겠는데 그런 것 갖고 논의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한나라당 전여옥 대변인)
지난해 11월25일. 여야가 모처럼 정쟁을 걷고 민생경제를 논의하기 위해 원탁토론회의장에 앉았다. 그런데 회의 초반부터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전날 한나라당 이한구 정책위의장이 라디오방송에서 물건을 세듯 “(열린우리당) 대변인이 하나 나왔다”고 표현한 것을 박 부대표가 문제삼자 전 대변인이 즉각 반격으로 응수한 것이다.
전 대변인의 이런 거침없는 ‘싸움닭’ 기질이 오늘의 그를 있게 한 ‘하드웨어’라고 볼 수 있다. 여당에서는 전 대변인이 ‘비논리적이고 일방적인 주장만 하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강경 논객으로 소문나 여당의 토론 대상 기피 1호라고 알려진다. 어떤 네티즌들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데다 국민의 이목을 끌기 위해 소피스트적인 궤변만 늘어놓는 정치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입장에서 보면 전 대변인은 ‘보물’같은 존재다. 좌고우면 하며 잽만 툭툭 날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권력을 향해 스트레이트를 죽죽 날리며 정면승부를 벌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의원님’들이 체면 때문에 함부로 말 못하는 것도, 소심한 의원들이 안티 세력들을 의식해 소신껏 발언을 못하는 것도, 그의 입에서는 ‘폭탄’이 돼 술술 나오게 된다.
이런 대목은 여러 계파로 나뉜 한나라당 내 의원들이 그를 대변인으로서 ‘이견 없이’ 받아들이는 단초가 된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를 “야당의 대변인으로서의 가져야 할 독특한 컬러와 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하고 있다.
그 컬러란? 바로 대통령과 정부를 속 시원히 비판해 국민의 가려운 등을 시원하게 긁어줄 그런 능력을 가진 대변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를 ‘모시고’ 있는 한나라당 이정현 부대변인은 “그는 오랫동안 언론계에 몸담아 오면서 생활정치를 체득했기 때문에 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풀어내는 탁월한 표현력도 큰 장점이다”라고 분석한다.
▲ 지난해 3월16일 전여옥 대변인이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최병렬 당시 대표 등 당 3역과 입당축하 악수를 나누고 있다. | ||
전 대변인의 비타협적 기질과 ‘정치감각’은 그의 정치철학을 규정짓는 하드웨어에 속한다. 그는 여기에 대변인으로서의 실무적인 능력(소프트웨어)도 겸비하고 있다. 그의 소프트웨어 중 으뜸은 오랜 언론인 생활을 통해 얻은 핵심을 뽑아내는 능력이다. 이는 그를 박 대표의 심중을 정확히 꿰뚫는 당내 몇 안 되는 ‘측근’으로 만들었다.
한나라당 이정현 부대변인은 이에 대해 “전 대변인이 브리핑을 하는 것을 보면 놀랍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는 수많은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해 논란이 되는 부분을 잘 파악해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입이 무겁고 자신의 뜻을 잘 드러내지 않는 박 대표의 ‘내심’을 잘 캐치해낸다. 지금까지 박 대표의 뜻을 전달하는 데 한번의 실수도 없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
또한 그의 친화력도 박 대표의 사랑을 받게 하는 요인이다. 한나라당 한 초선의원은 이에 대해 “박 대표가 전 대변인을 같은 여자로서 굉장히 편안하게 대하는 것 같더라. 아마 전 대변인이 한나라당 내에서 박 대표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인 동시에 가장 많이 전화통화를 하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 대변인은 대변인 행정실이나 의원회관 사무실 식구들과 회식도 하고 시간을 내서 MT도 간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 농담도 자주 하고 ‘망가지는’ 역할도 주저 없이 한다고 한다.
그밖에 전 대변인만이 내세울 수 있는 독특한 소프트웨어는 글 솜씨에 있다. 그는 구태의연하고 관행적인 ‘정치적’ 표현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일반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그의 논평은 지금까지 7개의 책을 낸 글 솜씨에 녹아 싸구려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대중적이고 설득력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밑바탕에는 ‘다독’이라는 또 다른 노력이 숨어 있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책들이(물론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만 주로 본다며 그는 불만이 많지만) 있다. 도서관에서 대출을 가장 많이 하는 의원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원더우먼’ 같은 능력도 한나라당 일부 의원 눈에는 그리 성이 차지 않는 것 같다. 한 초선 의원은 “그는 언론인 출신으로서 당연히 대변인직을 잘 해낼 자질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 그가 대변인 빼고 뭐 다른 일을 할 게 있나”라고 반문한다.
또 다른 초선 의원은 그가 상황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꼬집는다. 그는 “한나라당에 입당하기 전 그는 박 대표를 ‘유신공주’라고 비판한 바 있고, 자신을 끌어준 최병렬 대표가 있는 당을 두고 ‘기생정당’이라고 비꼰 바 있다. 그런데 입당하고 나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표변해 한나라당의 공격수로 나서고 있지 않나. 정치적 가치관이 너무 갑자기 바뀌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강경한 대여 공격에 대해 불편해 하는 의원들도 많다. 김문수 의원은 한때 전여옥 대변인을 두고 “위험할 정도로 선명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일이 있다. 때로 상생과 화합의 정치력이 요구되는 시점에서도 그의 강경 일변도 때문에 정국이 꼬이는 일도 적지 않다며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전 대변인은 “내 사전에 노 코멘트란 없다”라며 이런 반응에 끄떡도 하지 않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전 대변인을 둘러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잠시 그의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여옥은 59년 4월19일 네 자매 중 장녀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이 맏딸에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고 한다. 이런 점을 의식한 때문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평범한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가 너무 가기 싫어 등교 거부를 한 적도 있고, 고교 1학년 때는 “날마다 기도만 하고 ‘사탄이 너희를 괴롭히고 있다’고 헛소리만 하는 학교 목사가 지긋지긋해 학교 간다고 하고 극장 구경을 한 달 내내 다녔던 적”도 있었다(저서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 중에서).
▲ 지난해 4월29일 한나라당 17대 국회 당선자 연찬회에서 인사하는 전여옥 대변인과 박근혜 대표. 전 대변인은 박 대표의 ‘심중’을 꿰뚫고 있다고. | ||
대학을 졸업하고 81년 2월 전여옥은 KBS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유일하게 남녀 구별 없이 일단 시험이라도 치를 수 있는 직종이 기자였으므로 할 수 없이 기자가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여자로 살아남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KBS 생활은 그가 ‘투쟁의 역사’라고 술회할 만큼 고난의 시절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남녀 불평등이란 차별을 몸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깨기 위해 투쟁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를 아는 한 선배는 ‘전여옥이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시한폭탄 같다’고 했다. 그가 현재 남성 중심의 상징처럼 떠오른 여의도 정치판에서 대변인으로 살아남은 것도 15년 동안 KBS에서 투쟁했던 나름의 내공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뒤 그는 도쿄 특파원 자격으로 일본에 2년 8개월 동안 머물면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일본은 없다>가 빅히트 하면서 기자 생활을 접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재일 르포작가 유재순씨가 전 대변인의 베스트 셀러 <일본은 없다>를 상대로 표절 의혹을 제기, 현재 소송이 진행중이다.) 그리고 94년 7월 케이블 TV인 ‘마이 TV’의 주간 서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에 ‘리마주’라는 이름의 독립프로덕션을 차렸고 그 뒤 심리테스트 전문업체인 (주)인류사회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이때 200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를 지지하며 잠시 그의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다(상자기사 참조).
그는 정몽준씨가 단일화 파동으로 대선에 실패하자 미련 없이 정치의 꿈을 접고 현장에 복귀해 프리랜서로서 <조선일보> 등에 ‘극우적인’ 칼럼을 연재해 진보 진영으로부터 인터넷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TV 토론회에 참석해 공격적인 논쟁을 눈여겨본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의 ‘손’을 잡고 정치권에 입문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는 입당할 때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을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다”며 현실 정치 참여의 변을 밝히는데 이때부터 ‘노무현 저격수’가 잉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2007년에 한나라당이 또 다시 집권에 실패한다면 의원직을 내놓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저격수’ 전 대변인은 지금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칠 것이다.
“한나라당이여, 집권당이 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