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5월25일 고건 당시 총리가 국무회의에 앞서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국무회의장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고 전 총리는 여전히 ‘차기주자’ 1순위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여권의 한 중진 의원은 “열린우리당과 정부가 국민들의 이해와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현실의 혼탁한 정치가 ‘과거로 돌아간’ 그를 계속 불러들이고 있다”며 “아직 차기 주자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들의 막연한 기대심리가 모아진 물거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5월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 단 한 번도 인터뷰나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일상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가 매일 다닌다는 목욕탕이 기사거리가 될 정도다. 국민에게 그리고 언론에게 그는 아직 ‘진행중인 권력’이기 때문이다.
총리직 퇴임 이후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듯 보였던 고 전 총리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1월1일. 그가 고문으로 있는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신년사를 대신해 올린 ‘선진화의 미래를 기약하며’라는 제목의 글 내용이 알려진 것이다. 고 전 총리는 이 글에서 “해묵은 지역 빈부 노사 계층 갈등에다 이념 세대갈등까지 겹쳐 사회적 대립과 분열은 해방공간의 혼란한 사회상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라며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제 세력들은 21세기 미래전략을 모색하려는 노력보다는 ‘기 싸움’ ‘힘겨루기’ ‘제몫 챙기기’에만 더욱 골몰했으며 실용주의보다는 이념과 명분의 허상을 좇느라 분주했다. 이래서는 우리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고 정치권을 꼬집었다.
지난해 12월24일에는 ‘우민의 의미를 새롭게 마음에 새기며’라는 글을 다산연구소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발송하기도 했다. 자신의 호를 우민(又民 혹은 于民)으로 결정한 것과 관련, “편의상 ‘또다시 민초를’이라는 뜻의 우민을 선택했다”며 감사의 글을 연구소 게시판에 띄웠던 것. ‘겸양과 절제를 지향하는 인생관’을 나타낸 우민(又民)보다 ‘민중과 함께한다’는 우민(于民)에 더 무게를 둔 일부 언론들은 “고 전 총리가 다산연구소를 근거지로 ‘2007년 대권 플랜’을 가동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한발 앞선 관측도 내놓았다.
고 전 총리를 만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는 서울 혜화동 대학로의 사무실을 사전 연락도 없이 불쑥 방문한 지난 1월21일에도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0년 이상 운영해온 이 사무실은 매우 비좁고 소박했다. 다만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과 신문들은 여전히 세상에 촉수를 내밀고 있는 그의 치열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낮잠에서 깨어 기자를 맞은 고 전 총리는 “인터뷰는 안하는데”라며 인사를 대신했다. “차나 한잔 들고 가라”는 말로 시작된 대화의 화두는 그가 지난해 말 제주 중문 단지에서 잡아올린 1m가 넘는 방어 이야기였다. 지금도 그날의 손맛이 남아있는 듯 고기를 잡아끄는 모습을 보인 그는 “내 생애 가장 큰 고기를 잡았어요”라며 그날 찍은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다. 손님을 맞는 소파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는 그 사진들은 고 전 총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무언의 강요를 하는 듯이 느껴졌다. 가벼운 일상에 대한 대화만 가능하다는 무언의 압력.
▲ 고 전 총리는 지난해 말 제주도에서 1m가 넘는 ‘월척’을 낚았다. | ||
서울시장 시절의 일을 기록한 책인 <행정도 예술이다>를 한 권 꺼내주는 고 전 총리에게 “좋은 말씀도 하나 써 달라”고 재촉하자 그는 자신의 공직철학이기도 한 “至誠感民(지성감민)”을 써 주었다.
자세히 보니 고 전 총리는 짝이 다른 양말을 신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흰 양말을 왼쪽에는 검은 양말을. “테니스를 치다가 오른쪽 다리를 조금 다쳤는데 병원에서 작은 보조기를 하나 끼워줬다. 그 때문에 이렇게 다른 양말을 신고 있다”는 그에게 “흑백의 조화가 묘한 느낌을 줍니다”고 묻자 알 수 없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 전 총리는 불쑥 찾아든 기자를 엘리베이터 앞에까지 따라 나와 인사하며 돌려보내는 호의도 베풀었다.
그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국민들을 반하게 한 그의 매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40년이 넘는 공직생활을 했으면서도 그 흔한 스캔들 한번 없었던 ‘클린’한 이미지를 가장 먼저 꼽는다. 그의 별명이기도 한 ‘미스터 클린’의 이미지에 대한 일종 의 찬사인 셈이다. 특히 ‘수서 개발’ 압력을 거부했던 1990년 서울시장 재직시절의 일화나 민선시장 시절 민원 과정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오픈 시스템’을 도입한 것, 참여정부를 떠나면서 원칙을 강조하며 인사제청권을 거부했던 것 등은 국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 전 총리와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진 다산연구소 김용정 대표는 그의 청렴했던 공직생활을 다산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고건 전 총리 하면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행정의 달인’ 이니 ‘미스터 클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관운이 좋을 수 있느냐는 시샘어린 부러움도 뒤따른다. 그러나 ‘그가 바로 그’ 일 수 있는 것은 능력이나 관운만은 아니다.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성감천’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성감민’이어야 참다운 공직자가 될 수 있다고 다짐했고 다산선생의 <목민심서>가 가르치는 ‘지자이렴(知者利廉)’을 마음에 새겨 그 계율을 지켜냈던 것이다.”
그의 행정능력에 대한 기대와 믿음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새마을 운동을 일으켜 성공시켰던 것이나 지난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두 달간 일하면서 안정적인 국정운영 능력을 보여주었던 것 등은 특히 중도 보수 성향의 국민들에게 ‘안정감있는 지도자’로서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 지난 98년 5월 고건 전 총리(오른쪽)의 국민회의 입당식 모습. | ||
지난해 총리 퇴임 이후 시작된 이 움직임은 “마치 ‘제2의 노사모’를 보는 듯하다”는 말도 들을 정도다. 최근 결성된 ‘고건 대통령 만들기 희망운동본부’ 등을 포함한 10여 개의 인터넷 동호회는 단순한 팬클럽 수준을 넘어 직접적인 후원활동을 강화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분명 한계는 존재한다. 현실적으로 정치적인 세력화를 이룰 조직이 없고, 행정가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검증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그의 대권가도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분석이다. 또 고희를 바라보는 그의 나이가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는 시대적인 흐름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40대 정치인, 50대 지도자가 일반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는 요즘 40여 년 행정가 경력의 그가 설 땅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다.
한 중진 정치인은 “고 전 총리에 대해 누구는 조직의 부재, 세력의 부재를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세대적인 한계가 더 크다고 본다. 점점 젊은 정치인을 원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행정가로서의 화려한 경력에 비해 정치인으로서는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 없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고 전 총리는 오는 3월16일 미국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 북한 핵 문제, 한-미 동맹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지난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져온 그의 고민과 생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모처럼 주어진 것이다.
고 전 총리는 퇴임 이후 줄곧 “1년간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겠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그동안 눈에 띄는 행보는 전혀 없었다. 아마도 이 은둔의 끝은 오는 3월 미국방문이 될 것 같다. 작은 사무실에 앉아 세상을 낚고 있는 그가 구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볼 날도 이제 얼마남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