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희 회장 | ||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부친 시절에도 그랬다.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 건재하던 시절,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에게는 으레 ‘돈병철’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지만, 그만큼 두 사람은 대를 이어 한국 최고의 부자임에 틀림없다는 얘기다.
가장 대중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이건희 회장이지만, 정작 그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의 이름을 되뇌는 사람들도 이 회장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설사 안다 해도 그것은 피상적일 것이다. 이것은 이 회장의 카리스마가 약간은 그의 은둔적인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회장은 자신의 모습이 대중들에게 쉽게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한다. 그동안 많은 언론들이 이 회장한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간간이 일부 언론에 이 회장과의 인터뷰가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 직접 대면보다는 서면으로 이루어졌거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된 것일 뿐이다. 이 회장에 대한 ‘신화성’을 노출을 거부하는 그의 특성과 연결짓는 이들도 있다.
최근 재계의 본산이라고 불리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이건희 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회장단에서 만장일치로 결의까지 하고 이 회장에게 수락을 종용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퇴짜를 맞았다.
아직 이 회장이 이 문제에 최종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여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회장은 이 단체의 회장직을 맡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전경련 회장을 맡으면, 요즘 같은 시국에 자연스럽게 노출빈도가 높아질 것이고, 결국 이 회장이 그동안 쌓아온 카리스마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설사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맡을 의사가 있다손 치더라도 이 회장의 신비성을 지켜야 할 삼성그룹 내부 인사들로선 당연히 이 회장을 막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명함은 간단하다. ‘삼성전자 회장.’ 돈과 관련된 직위는 이것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직함이 있을 뿐이다. IOC 위원은 명예직에 가까운 것이고,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이나 삼성복지재단 이사장도 상징적인 자리다.
하지만 전경련 회장은 상징성도 있지만, 실질적인 활동도 필요하다. 전경련은 상근 조직이 있는 단체이고, 대통령이 참석하는 국가 행사 등에 전경련 회장 자격으로 참석해야 할 일도 많다. 이는 자칫하면 삼성과 삼성 구조조정본부에서 쌓아온 이건희 회장의 카리스마에 ‘누수 요인’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라는 브랜드가 그만큼 삼성 구조본의 섬세한 관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지난 93년 삼성 신경영 선언도 삼성 구조본의 작품으로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이 회장을 움직이는 데는 구조본의 전략적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된다.
실제로 지난 1월20일 한남동 승지원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모임 뒤에 벌어진 일도 구조본과 이 회장의 미묘한 간극을 보여 준다. 그날 강신호 전경련 회장과 김준성 이수화학 명예회장, 이용태 삼보컴퓨터 회장 등 재계 원로들은 이건희 회장을 만나 차기 전경련 회장직 수락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에 대해 이건희 회장은 거듭 고사하다 원로들의 강권하다시피한 부탁에 “신중히 생각해 봅시다”라고 얘기했다는 것. 듣기에 따라선 이 회장이 완전히 고사한 것은 아니다는 쪽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삼성 구조본쪽에선 “정중한 거절이었다”며 더 단호한 고사의사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구조본쪽에서 이 회장의 전경련 회장 취임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때문에 재계 일각에선 이 회장의 전경련 회장 취임에 대해서 물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재계에선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수행하게 될 경우 재계가 줄기차게 개정을 요구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 문제나 이재용씨의 사전 상속 관련 송사에서 삼성이 부담을 느끼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이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주미대사 내정 등과 맞물려 현 정부와 삼성의 정치적 친밀도가 지나치게 커지는 게 아니냐는 부담감도 있다.
실제로 참여정부 출범 초기부터 삼성은 강소국 프로젝트나 동북아 허브 프로젝트 등 국가프로젝트에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진대제 정통부 장관에 이어 삼성중공업 건설부문 대표이사를 지낸 한행수씨가 현 정부 출범 이후 만들어진 열린우리당 재정위원장을 지내고 주택공사 사장을 지내는 등 삼성 출신 인맥의 약진도 부담인 상황이다.
게다가 이건희 회장의 아들인 이재용 상무에 대한 송사가 여러 건 진행되고 있고, 삼성 지배구조의 핵심인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 문제가 금융지주법에 걸려 삼성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이런 민원을 안고 있는 당사자가 재계의 대정부 대표발언권자로 통하는 전경련 회장직을 맡는 게 삼성으로선 부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삼성 구조본에선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맡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수차 반복하고 있다.
민감한 사안이 있는 경우 삼성에선 대개 구조본이 나서서 이 회장의 뜻을 전했다. 이는 이 회장이 구조본 역할에 대해 그만큼 신뢰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구조본이 이 회장의 생각을 전체 삼성에 전달하는 통로이자 삼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최고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는 것. 물론 구조본에서도 이건희 회장에게 ‘극상’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순이익 10조원 클럽에 가입한 삼성전자 신화도 일찌감치 반도체에 눈을 뜬 이건희 회장의 ‘탁월한 안목과 혜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오늘날 삼성의 영광을 이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으로 돌리고 있다.
이건희 회장도 이런 구조본의 역할에 대해 만족해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겨울철이면 스키경영에 나서고 있는 이건희 회장은 올해도 처가쪽에서 운영하는 보광피닉스파크를 찾아 스키를 즐겼다. 혼자 즐긴 게 아니라 그룹 임원들도 초청했다.
재미있는 점은 삼성전자 사장단을 먼저 부른 게 아니라 구조본 인사들을 먼저 부른 점이다. 1월14~16일에 구조본 팀장들을 먼저 초청했고, 이어 1월28~30일에 삼성전자 사장단을 부른 것.
▲ 지난 2003년 3월 이건희 회장이 피닉스파크에서 스키를 배우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해부터 임원들을 스키장으로 초청해 ‘스키경영’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시사저널 | ||
이 회장의 아들 이재용 상무에 대한 사전 재산상속과 관련해 구조본에서 상속세를 피하려 편법을 쓰는 바람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는 비난도 받고 있지만 이 회장의 신임은 굳건한 것.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이 펴내는 경제 주간지인 <니케이비즈테크>에서도 삼성의 성공 요인에 대해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과 함께 “최고 경영진이 적절한 경영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그룹 전체의 전략을 짜는 구조조정본부도 성공의 한축으로 작용했다”고 보도하며 구조본의 기능을 인정했다.
이 스키경영 사례에서 나타나는 점은 이 회장의 경영스타일이다. 이 회장은 좋은 게 있으면 본인만 즐기는 게 아니라 주위와 나누는 스타일이다.
지난해 추석 때는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DVD를 제작해 임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또 몇 해 전에는 비타민도 챙겨줬다. 지난해 12월에는 구조본 임원들과 함께 조용필 콘서트를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주요 임원들을 초청한 스키 캠프도 연회비 1천만원짜리 마스터즈 코스였다.
일 잘하고 성과를 내는 경영진들에게 스킨십을 높이는 카드를 끊임없이 건네며 성과를 독려하고 있는 것.
윤종용 부회장 등 환갑을 전후한 경영진들은 고령의 초보 스키어라는 부담속에서도 이 회장과 동감을 나누기 위해 슬로프에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열심히 스키를 배웠다고 한다. 이 회장은 이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이들의 레슨 시간에는 스키를 타지 않고 자유롭게 배울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재를 끌어오는 임직원에게 인사고과에서 가산점을 주는 삼성 인재경영의 전도사다운 배려인 것.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경영 인생의 절정을 맛봤다.
지난 2002년 삼성전자가 7조원의 순익을 거두면서 최고 전성기인 줄 알았더니 한해 숨을 고르더니 2004 회계연도에 10조원대 순익 고지에 오르면서 다시 한번 절정에 올라섰다.
87년 삼성 회장 취임 뒤 93년까지 은인자중하다 93년 ‘마누라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을 한 뒤 10년 동안 삼성은 기록적인 성장을 했다.
92년 35조7천억원이던 매출이 2002년엔 1백41조원으로 4배가 늘었고, 부채비율은 336%에서 68%로 줄었다. 또 같은 기간 세전이익은 2천3백억원대에서 14조원대로 늘어났다. 삼성의 주력기업인 삼성전자는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공인받는 순익 10조원 클럽에 가입했다.
물론 이런 성공의 뒤에는 실패도 있었다.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과 함께 내놓은 ‘신수종 사업’의 이식이 거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삼성영상사업단으로 대변되는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콘텐츠 사업은 IMF가 오면서 서둘러 문을 닫았고, 이 회장이 야심차게 시작했던 자동차 사업은 2조4천억원의 부채를 남기고 프랑스 르노에 매각됐다. 제일기획에서 최근 청산한 e삼성은 이재용 상무의 주도 아래 구조본에서 지원했던 야심찬 프로젝트였지만 이재용 상무에게는 부정적인 평가를, 삼성 계열사들에게는 재정부담만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삼성자동차에서 비롯된 2조4천억원의 부채와 이에 갈음하는 삼성생명 주식 매각 문제는 삼성그룹 지배구조문제와 맞물려 삼성의 현안이 되고 있다. ‘삼성전자 순익 10조원 시대’의 영광에 가려 부각되고 있지 않을 뿐인 것.
이 회장은 삼성 신경영 선언 이유에 대해서도 미래에 먹고 살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삼성은 그 뒤 기존의 사업분야이던 반도체 분야에서의 기술혁신을 통해 예상외의 성과를 올렸다.
삼성 구조본쪽에선 이건희 회장의 전경련 회장직 고사 이유에 대해서 ‘이제 막 초일류기업 반열에 들어선 삼성전자의 성공을 확실히 하기 위해선 이건희 회장이 삼성전자 경영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극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성장 곡선을 지난 2002~2004년 그래프처럼 연봉으로 만들면서 더 큰 봉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선 내부역량 강화에 치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2005년 12월이 되면 이건희 회장은 삼성그룹의 수장이 된 지 18년차를 맞이한다.
그리고 회장 취임 20주년이 되는 2007년엔 삼성그룹의 덩치가 세계 5강기업에 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은 이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총력전을 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올 초 구조본에 특별지시를 내렸다. 삼성전자의 신화를 이어갈 차세대 사업을 구상하라는 것이었다. 반도체, 휴대폰 사업을 대체할 신수종 사업을 만들지 못하면 더이상 삼성의 미래는 보장받을 수 없다는 위기감도 갖고 있다. 이 회장에겐 당장 전경련을 맡느냐 아니냐는 문제는 중요치 않다. 다음 세대를 위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