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옥식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연구위원
특히 김일성이 14세인 1926년 10월 17일 만주에서 만들었다는 타도제국주의동맹(異名: ㅌ·ㄷ, 트/드로 읽는다)이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기반으로 한 조선노동당의 뿌리라는 북한의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다. 타도제국주의 동맹이란 말은 1968년 이전 북한의 어느 문헌이나 선전매체에도 나오지 않는다.
‘주체’라는 용어는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의 ‘사상에서의 주체’라는 제목의 연설 이후 1962년 12월 19일자 노동신문에서 처음 사용했고 ‘선군’이란 말은 김일성 사후 한참 지난 후인 1997년 10월 7일 조선중앙방송에 처음 등장한 말인데 이들의 기원이 1926년이란 것은 날조의 극치이다.
조선노동당이 창건된 날은 1949년 6월 30일이다. 1945년 10월 10일은 조선노동당 창당일이 아니라 평양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결성한 날이다. 당시 조선공산당 본부(중앙당)는 서울에 있었고 조선공산당 북한지부가 서울 중앙당의 승인 아래 결성된 것이다.
소련 군정의 로마넨코 민정사령관은 1945년 10일 8일 서울의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당수)인 박헌영을 개성으로 오게 해 평양에서 함께온 김일성과 회동하던 중 논쟁 끝에 서울의 조선공산당을 중앙당으로 인정하고 평양에는 지부인 북조선분국을 둔다고 합의했다.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는 국내파 공산주의자 김용범(金容範)이 선출됐다. 김일성이 북조선분국을 장악한 것은 1945년 12월 17일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총비서에 선출되면서부터다. 김일성의 등장과 관련된 모든 작업은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라는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자 지령에 따라 소련 극동군 제25군 정치위원 스티코프의 치밀한 지휘로 이루어졌다. 김일성은 이후 서울에 본부를 둔 조선공산당과 대등한 위상을 연출하기 위해 1946년 4월 19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 조선정판사사건 등으로 1946년 7월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돼 해산되자 북한은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성에 앞서 1946년 8월 29일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창당하고 이후 1949년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을 통합해 ‘조선노동당’(위원장 김일성, 제1부위원장 박헌영)을 출범시켰다. 따라서 당창건일을 1945년 10월 10일로 기념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자 날조인 것이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4월 17일 경성부(京城府) 황금정(黃金町, 현 을지로)소재 중국음식점 아서원(雅敍園)에서 김재봉(金在鳳), 김낙준(金洛俊, 이명(異名: 金燦), 김약수(金若水), 주종건(朱鍾建), 윤덕병(尹德炳), 진병기(陳秉基), 조동호(趙東祜), 조봉암(曺奉岩), 송봉우(宋奉瑀), 김상주(金尙珠), 유진희(兪鎭熙), 독고전(獨孤佺), 정운해(鄭雲海), 최원택(崔元澤), 이봉수(李鳳洙), 김기수(金基洙), 신동호(申東浩), 박헌영(朴憲永), 홍덕유(洪悳裕) 등 19인이 비밀리에 조직했다.
초대 책임비서는 김재봉이었다. 1928년 12월 일제의 탄압과 내부분열로 해체됐다가 해방 후인 1945년 8월 20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여운형(呂運亨)·허헌(許憲)·김원봉·한빈(韓斌)·이주하(李周河) 등이 함께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1945년 9월 11일에는 공산주의의 ‘1국 1당 원칙’에 따라 소련군정의 승인도 받았다. 이후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과 함께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결성됐다. 결과적으로 조선공산당이 남한지역의 남조선노동당과 김일성의 북조선노동당으로 양립된 것이다. 하지만 남조선노동당은 미군정의 조선공산당불법화 조치와 함께 공산당 간부 체포령으로 박헌영은 월북했고, 나머지 인사들도 모두 숙청·체포됐다.
1958년에 출간된 북한의 ‘조선통사’(과학원 역사연구소 편)에서는 1945년 10월 10일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건일로 기술하고 있으며 1946년 8월 29일 북조선노동당을 창건했고 1949년 6월 북로당과 남로당이 합쳐 현재의 조선노동당이 창건했다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김일성이 ‘소련파’ ‘연안파’ ‘빨치산파’를 차례로 제거하고 김일성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1970년대에 들어 북한의 문헌에서는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역사 날조가 본격화됐다. 이후 북한의 공식 문헌인 ‘정치사전’ ‘력사사전’ ‘현대조선력사’ ‘조선노동당력사’ ‘조선대백과사전’과 교과서들은 1945년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이라고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있다.
이들 문헌과 교과서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립은 아예 기술돼 있지 않다. 1920년대 1차 조선공산당 설립 역사, 그리고 1945년 국내파 공산주의 거두인 박헌영이 주도한 2차 조선공산당 설립 역사도 모두 묻어버린 것이다. 북한이 이처럼 조선노동당 창당일을 조작한 것은 조선공산당 중앙당 박헌영 책임비서의 승인을 받아 북조선분국이 창당됐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지면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시조로 추앙받고있는 김일성의 경력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서이다.
그런데 북한의 조선노동당 창건과 관련 북한의 교과서와 김일성회고록, 선전매체들이 또 하나의 코미디같은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일성이 18세되던 1930년 최초의 공산당 조직인 ‘건설동지사’를 만들고 이것이 조선노동당의 씨앗이자 모태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교과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위한 최초의 공산당조직으로 ‘건설동지사’를 만들었다고 또 하나의 조작된 허구를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카륜회의 직후인 1930년 7월 3일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등과 같이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결성했으며 당의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지 않고 ‘타도제국주의동맹(打倒帝國主義同盟)’의 강령으로 이를 대신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륜회의란 1930년 6월 30일 김일성이 중국 만주 장춘현의 카륜에서 소집했다는 ‘공청(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대회’를 말한다. 북한은 이 회의에서 김일성이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의 원리를 천명했으며 조선혁명의 지도사상과 혁명노선 및 전략전술을 확립했다고 공식선전하고 있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은 김일성이 만주 화전현(樺甸縣)의 화성의숙(樺成義塾)을 중퇴한 직후 1926년 10월 17일 14세에 화전현에서 결성한 것으로 날조해낸 독립운동 조직이다. 대한민국은 1945년의 해방을 현대사의 시발로 보고 있으나 북한은 김일성이 14세때 결성했다고 주장하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선노동당의 뿌리이자 현대사의 시발점, 즉 김일성 혁명역사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있다.
북한의 교과서와 역사서를 비롯한 문헌들은 김일성이 1926년 10월 17일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고 `타도제국주의동맹의 당면과업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며 최종 목적은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며 나아가서는 모든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세계에 공산주의를 건설하자는 것이였다`는 강령을 발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한은 헌법보다 상위 규범인 노동당규약 전문(前文)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192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공산주의적 혁명조직으로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으며 오랜 항일혁명투쟁을 통해 당 창건을 위한 조직적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을 건설하였다`고 명시함으로써 타도제국주의동맹이 노동당의 뿌리이자 김일성 혁명역사의 출발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김일성이 화성의숙 재학시절 타도제국주의동맹을 만들었다는 것은 역사의 허구이자 날조다. 북한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이 처음 언급된 공식자료는 평양의 인문과학사가 1968에 출간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백봉(白峯) 지음)이란 책이다. 1926년이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현대사의 시발이라면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을 만들었다는 보도나 기록이 일제식민지시대를 포함, 1968년 이전에 있어야 하나 당시 북한의 어느 기록이나 문헌, 언론보도에도 그런 내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ㅌ⦁ㄷ은 사실은 이종락(李鍾洛)이 1929-1930년 경 조직한 반제국주의 운동단체인 ‘길흑농민동맹’(吉黑農民同盟)을 이름을 바꿔 1926년에 결성한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만약 타도제국주의동맹이 조선로동당의 뿌리라면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설치(현재 북한이 조선노동당 창당일로 지키고 있는 날) △1945년 12월 17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선출한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위원회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임시위원장으로 선출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 간판 내리고 열린 북조선노동당창당대회 △1947년 2월 17일 제1차 북조선인민회의 △1948년 3월 27일 북조선노동당 제2차 당대회 △1949년 6월 30일 북조선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 합당을 통한 조선노동당 출범식 △1956년 4월 23일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 △1958년 3월 3일 제1차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 △1961년 9월 11일 조선노동당 제4차 당대회 등 초기 인민회의와 노동당대회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언급될만도 하지만 단 한 번도 언급됐다는 기록이 없다.
특히 타도제국주의동맹을 조선노동당의 뿌리라고 규정하면서도 1945년 창당대회에서 이 용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북한의 문헌 기록상 1968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에 처음 언급된 타도제국주의동맹은 1971년의 ‘역사사전’, 1973년의 ‘정치사전’에서 조금씩 언급되다가 1980-1981년 출간된 ‘조선전사’(朝鮮全史)에서 현대사의 기점으로 승격된다. 따라서 ‘건설동지사’가 조선로동당의 뿌리라는 김일성의 주장은 완전한 날조다. 건설동지사가 ‘첫 당조직’ 이란 것은 해방 후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가 1983년에 와서야 조선노동당 기관지 ‘근로자’에 게재된 어용학자 주용목(조선로동당 력사연구소 부소장)의 논문에서 처음 언급된다.
김일성은 1945년 해방 전까지 조선공산당을 만들거나 당원이 된 일이 전혀 없는 인물이다. 김일성은 오히려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1930년대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만주에서, 그리고 1940년대는 소련 극동군 25군 예하 88정찰여단 소속으로 연해주에서 청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중국영토와 소련영토에서 외국인이 당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더구나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의 ‘1국 1당원칙’에 중국공산당이나 소련공산당외에 다른 당을 만들 수 없는 처지였다.
한심한 것은 이처럼 조선노동당 창건의 역사는 철저한 역사 조작인데도 우리 언론들은 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해마다 10월 10일(쌍십절)이면 북한에 벌어지는 행사와 함께 북한 지도자들의 관련 동향을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10월 10일을 무조건 북한 노동당 창건일이라고 보도하는 것은 김씨 세습 전체주의 왕조를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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