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25일 언론노조 위원장 출신의 최문순 MBC 사장이 취임하자 내부에선 ‘쓰나미’가 아닌 ‘최나미’가 몰아닥쳤다며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진제공=MBC | ||
지난 2월25일 취임한 최문순 MBC 사장(49)의 대강의 이력이다. 노조위원장 출신의 40대 부장이 1개의 TV 채널, 2개의 라디오 채널, 19개 지방계열사와 7개 자회사 등 29개 관계사, 4개 케이블TV·위성방송 채널을 거느린 국내 제2의 방송 네트워크 수장이 된 것은 당대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KBS에서는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부사장까지 된 사례가 두 차례(이형모, 안동수) 있으나 MBC에서는 지금까지 임원이 된 적도 없었다.
MBC에 쓰나미가 아닌 ‘최나미’가 몰려닥치다 보니 말들도 무성하다. 부장급이었던 최 사장이 취임하면서 연공서열 문제, 노사관계, 경영능력 그리고 다른 언론사에 미칠 영향 등이 초미의 관심사. KBS 정연주 사장 체제와 더불어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방송사에 대한 의존도가 한층 높아질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과연 경쟁력과 신뢰도에서 위기를 맞은 MBC가 최문순 사장 체제를 계기로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을지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돌아온 칼잡이’. 지난 97년 최문순 사장이 MBC에 복직됐을 때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고정된 출입처가 없는 기동취재부로 복직해 ‘카메라 출동’코너의 특종들을 쏟아낸 최 사장의 취재 스타일에 대해 동료들은 ‘독하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고 한다. 그의 동기인 홍수선 기자는 지난 98년 MBC가이드 인터뷰에서 최 사장에 대해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인 데다 고발기사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돋보인다”고 평한 바 있다.
그 ‘칼잡이’가 이제 MBC의 신임 사장이 된 것에 대해 MBC 주변에선 긴장감이 엿보인다. 최 사장 위로 선배 기수 인사들이 대략 2백 명이다. 지난 2월25일 취임사에서 최 사장은 “현재 인력구조와 조직으로는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며 고통분담을 호소했다. 양문석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책위원은 최 사장 내정 보도 이후인 지난 2월23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 출연해 “최 사장 체제 가동 이후 MBC 보도국 내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 예측했다. 최 사장이 주장해온 ‘연공서열 파괴’ ‘대국 소팀제 신설’ 등은 선배들의 입지를 불안케 할 수 있는 요인이다. MBC의 한 기자는 “이미 대대적인 인적 조정이 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한다.
최 사장이 사내 비판여론에 부딪힐 가능성은 노조와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최 사장이 취임하던 지난 2월25일 MBC 노조는 송출기술국의 김상훈 조합원을 새 노조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김 위원장은 최 사장이 초대 언론노조위원장으로 재직할 때 함께 일한 바 있다. 그러나 노조와의 밀월관계보다는 초반부터 어느 정도 충돌이 예상되고 있다. 최 사장이 추진하는 임금 삭감이나 단일 호봉제 폐지는 노조의 근본을 흔들 수 있는 파격적 공약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MBC는 현재 경쟁력과 신뢰도에서 모두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해 사극 <대장금> 이후 이렇다 할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인 재원을 광고에 의존하는 MBC 입장에서 드라마 광고수입을 끌어내지 못하면 심각한 경영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지난해 ‘구찌 핸드백’ 파문으로 도덕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으며 한때 ‘잘나갔던’ <뉴스데스크> 시청률마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 사장 선배 기수들 사이에선 ‘노동운동가로 유명한 최 사장이 위기의 MBC 경영상태를 얼마나 호전시킬 수 있겠는가’란 회의적 시각도 나돈다고 한다. 그러나 ‘조직 내부의 지지가 경영 호전의 밑거름이 된다’는 논리가 MBC 내부에 제법 확산돼 있다고 전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최 사장의 MBC 개혁작업과 경영 청사진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MBC 안팎에서 엿보인다.
노동운동가적 이미지가 강한 최 사장이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방송사 사장이 된 것에 적잖은 놀라움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연공서열이 깨질까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최 사장을 폄하하거나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한결같이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최 사장과 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인사들은 “(최 사장이) MBC 노조위원장과 초대 언론노조위원장을 거치며 강경투쟁 노선을 이끌었지만 인간적으로는 무척 따뜻한 사람이며 선·후배 간에 의리가 두텁기로 소문난 사람”이라 평한다.
최 사장이 언론노련·언론노조 위원장을 거칠 때 곁에서 3년간 보좌했던 안동운 언론노조 조직쟁의실장은 “언론노조 내부 문화를 많이 바꿔놓은 분”이라 평한다. 위원장 재직 시절 최 사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손님이면 누구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먼저 일어나 목례를 하며 접대했다고 한다. 안 실장은 “언론노조사무실에서 가장 인사를 많이 했던 분일 것”이라 회상하기도 한다.
위원장 재직 당시 최 사장은 자신의 책상에 있던 모든 사물함과 책꽂이를 아래로 내려놓았다고 한다. 노조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위원장이 자리에 있나 없나를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안 실장은 “(최 사장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깊이 배어 있는 분”이라며 “사람에 대한 애정과 겸손함을 노동운동의 근간으로 여겼던 분인 만큼 복잡하게 얽힌 MBC 내부문제를 융통성 있게 해결할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관심 속에 이뤄진 최 사장의 첫 인사는 바로 고석만 전 EBS 사장 영입이다. MBC 공채 출신으로 최 사장보다 11년 선배인 고 전 사장은 최 사장 체제에서 프로그램 제작을 진두지휘하는 제작본부장직을 맡아 친정으로 귀환했다. 고 전 사장은 사장공모추천 당시 최 사장의 강력한 경쟁상대이기도 했다. 고 전 사장 영입에 대해선 ‘연공서열 파괴’ 선언으로 동요할 수 있는 내부 포용 카드로 볼 수 있다. 보도제작만 해온 최 사장이 드라마 현장경험이 풍부하고 방송사 경영 경험이 있는 고 전 사장을 ‘모셔옴’으로서 자신에게 부족한 식견과 전문성을 채우려는 포석으로도 풀이된다.
MBC의 한 8년차 기자는 “젊은 기자들 사이에선 최 선배(최문순 사장)가 사장이 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MBC가 큰 위기를 맞고 있는데 이를 개선하려면 개혁이 필요하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개혁의 칼날에서 비켜갈 것이며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 밝혔다. 최 사장에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는 최 사장 선배 기수들에 대한 MBC 직원들의 반감이 높다는 것이다.
일부 보수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이번 최문순 사장 취임으로 MBC 내부에 신구갈등이 일어날 것처럼 예측하는 것에 대해서도 MBC 조직원들은 반감을 갖는다. MBC의 한 기자는 “어차피 사장 후보 공모 당시부터 최문순 사장 또래나 그 후배들은 모두 최 사장을 지지했으며 내부 개혁의 필요성에 모두 공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공서열을 없애겠다는 그의 공언은 2월28일 단행된 국장급 인사에서 잘 드러났다. <느낌표>의 책임프로듀서인 김영희 부장(45)은 지난 2월18일 인사에서 차장에서 부장대우로 승진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예능국장직에 올랐다. 유명 아나운서인 손석희 부장(49)도 고사 끝에 아나운서 국장을 맡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밖에 보도국장에 신용진 해설위원(48), 시사교양국장에 최진용 부장(47), 드라마국장에 이은규 부장(49) 등 주요보직을 모두 40대가 꿰차는 파격적 인사가 이뤄졌다. MBC의 한 기자는 “후배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선배들이 중용된 것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최 사장이 취임하면서 MBC 내 춘천고 인맥도 주목받고 있다. 최 사장의 춘천고 선배이자 당초 유력한 사장 후보로 알려졌던 엄기영 특임이사는 <강원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춘천고 후배인 최 사장이 사장 후보로 거론되자 공모에 참여하지 않고 좋아하는 후배에게 길을 터줬다”고 밝혔다. 엄 이사는 앞으로도 <뉴스데스크> 메인 앵커를 계속 맡을 것으로 알려진다. 그밖에 한광섭 아나운서 2부장이 최 사장의 춘천고-강원대 2년 후배로 눈에 띈다.
손석희 아나운서 1부장의 국장 발탁은 노조 출신 인사들 중용의 신호탄으로 비치고 있다. 손 신임 국장은 MBC 노조집행부 주요 간부를 거쳤으며 지난 92년 파업투쟁 당시엔 불법파업 주동자로 몰려 구속수감된 전력도 있다. 대중적 인기가 높고 후배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손 신임 국장 발탁을 두고 MBC 내부에선 “부장급에서 노조간부 출신 위주의 더욱 파격적인 인사가 이뤄질 것” “사장이 워낙 진보적이라 예상은 했지만 인사 폭이 생각보다 낮은 직급까지 파급돼 뒤숭숭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MBC의 한 고위 인사는 “최 사장 체제 출범 이후 간부들이 출근하면서 농담삼아 ‘김형’ ‘이형’이라 부르기도 했다”라며 국장급 이상 간부들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전하기도 했다.
<기자협회보>의 한 방송사 담당 기자는 “특히 50대 국장급 간부들의 반감이 크다”라며 “50대 인사들로부터 ‘노동운동이나 하던 사람이 경영능력이 있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전했다. MBC 간부들 사이에 “암흑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돈다고 한다. 일부 고위 인사들은 “(최 사장이) 말로는 선배들의 명예로운 업무 환경을 논하지만 40대 위주로 국장급 인선을 한 것은 최 사장 연배(49세) 위로 2백 명이 넘는 선배들 보고 다 나가라는 엄포용”이라고 반감을 드러낸다고 한다. 국장급 인사로부터 시작된 파격 인사가 결국 ‘쓰나미’급 감원 폭풍으로 이어질 것이란 비관적 예측이 나도는 것이다.
당초 방송문화진흥회의 일부 이사들도 최 사장에 대해 ‘경영능력 부재’ ‘강한 노동운동가 이미지’ ‘정치적 독립 가능 여부’ ‘사회에 미칠 충격’ 등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고 한다.
최 사장 체제 출범을 정치권의 역학관계와 결부 짓는 시각도 있다. 한나라당 일부 관계자들은 “청와대가 노동운동가 출신 최문순 사장을 선호했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다.
그러나 여권 관계자들은 물론 사장 후보 심사를 담당했던 방송문화진흥회, 그리고 최 사장 주변 인사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언론노조의 한 관계자는 “조·중·동 중심의 보수언론이 이번 최 사장 관련 보도를 하면서 노조위원장 출신이라는 점을 애써 부각시키는 것 같다”며 “정권의 하수로 비친 강성구 전 사장 퇴진운동을 하다가 MBC에서 해직된 경험이 있는 최 사장을 정치권력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역설한다.
지난 96년 MBC 노조위원장 재직시절 총파업을 이끌었던 최 사장은 당시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MBC 노동조합 파업은 인사권을 통한 방송통제라는 핵심에 대한 문제제기였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대통령 아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거부였다’(<미디어오늘> 96년 10월23일자).
그러나 현 정권에 비판적 자세를 취해온 보수신문과는 적잖은 신경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최 사장은 언론노조위원장 시절부터 신문개혁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왔다. 다음은 <인물과사상> 2000년 10월자에 실린 최 사장 인터뷰 내용.
‘조선일보에 소속된 기자들이 (누군가) 조선일보를 공격하면 자기하고 조선일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서 우리 언론인은 이 나라의 정책, 보편적인 이익을 대변하는 대변인이지 조선일보의 종업원이 아니다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최 사장은 사장직 취임 이전부터 “지금 시점에서 신문·방송의 겸업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신문·방송 겸업을 주장해온 메이저 보수 신문사들을 긴장케 하는 대목이다. 개혁적 성향의 마이너 신문이 방송사와 손을 잡을 경우 메이저 보수신문이 잠식하고 있는 신문시장 판도에 일대 격동이 생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조위원장 출신으로 방송사 사장직에 오른 것은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온 칼잡이’의 칼집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을지, 그리고 그의 개혁은 과연 전폭적 지지 속에 성공을 거둘 것인지에 언론계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시선도 쏠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