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여년 간 성공한 관료로 살아온 심대평 충남도지사가 자민련을 탈당하고 ‘중부권 신당론’을 주창하며 정치인으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 ||
심대평은 누굴까. 그의 탈당 소식을 접한 중앙 정가는 지방의 한 3선 민선 도지사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충청도 나비의 날갯짓이 자칫 서울 여의도에 폭풍을 몰고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차기 대권 구도는 그의 출현으로 더욱 복잡하게 얽히게 됐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25만여표를 충청도에서 앞서 권력을 차지한 것처럼 차기 대권도 그의 ‘줄서기’ 여부에 따라 판가름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대평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온 좋은 머리에, 40여년 동안 정부의 요직과 도지사 등을 큰 흠결 없이 수행해온 성실성 등 흠 잡을 데가 별로 없는 ‘행정가’다. 하지만 대권의 꿈을 꾸는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에게 또 다른 ‘멋진’ 이력서가 필요하다. 성공한 행정가로서의 심대평과 미래의 정치가 심대평을 짚어보았다.
“심대평 지사는 사람의 아래 위를 가리지 않는다. 도청 옆에서 수십년 동안 구두를 닦아왔지만 심 지사만한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내가 구두를 가지고 들어가면 언제나 내게 인사를 건넨다. 누구 할 것 없이 항상 똑같이 사람들을 대한다. 그전의 도지사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그분만의 고결한 인품이라고 생각한다.”
도청 옆에서 일하고 있는 한 구두미화원이 심대평 충남도지사에 대해 ‘코멘트’한 내용이다. 이것이 심 지사의 인격을 웅변한다고 볼 수 없지만, 적어도 구두를 닦는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그의 올바른 사람됨을 읽을 수 있어 신뢰가 가는 대목이다. 이런 인품과 탁월한 행정 능력으로 그는 전국 14위(89년 도민소득 통계) 충청남도를 2위(96년 도민소득)로 올려놓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입각해 행정가로서 그의 인생 역정을 먼저 따라가 본다.
그는 1941년 4월7일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수신(修身)을 하는 데 최고의 모델은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그의 이름 대평(大平)은 부친의 고향이 공주군 금남면 대평리(지금은 연기군)였고 그도 대평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의 부친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1947년 그는 공주군 사곡면 호계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이때 탤런트 강부자씨와 같은 반이었던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심 지사는 순둥이 같은 외모와 달리 학교 때는 언제나 말썽꾸러기였다고 한다. 싸움대장이 그의 보디가드였고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승부근성이 강해 제기차기를 한번 시작하면 발이 아파서 못 찰 정도까지 해야 했고, 구슬치기를 시작하면 수업이 시작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많이 딸 때까지 놀아야 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승부근성이 복마전 정치판에서 어떤 ‘무기’가 될지 두고볼 일이다.
심 지사는 서울대 경제학과 시절,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강의 하나를 언제나 가슴속에 새겼다고 한다. 바로 인재 관리통장에 대한 강의였다. 돈은 저축했다가 빼내 쓰면 그만이지만 인재 관리통장은 빼내 쓸수록 친교가 더욱 돈독해지는 저축이 된다는 것이다. 그 후 그에게는 친구를 믿음으로 대하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심 지사는 정·재계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점도 훗날 정치인으로서 큰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그는 지난해 5월 명문 대전고 총동창회장을 맡아 입지를 넓히고 있다. 그의 동문 선배로는 박준병 전 자민련 부총재, 나웅배 전 통일원 장관, 송자 전 교육부 장관, 이규성 전 재경부 장관 등 쟁쟁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대전고는 금융사관학교로 불릴 만큼 금융계 인맥이 막강한 것으로 알려진다.
심 지사의 제가(齊家)도 수신 못지 않게 훌륭한 편이다. 부인 안명옥 여사는 일곱 살 연하다. 친구 안병길의 소개로 우연찮게 ‘미팅’을 한 그는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이른다. 자식 농사도 잘 지은 편이다. 우정(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우현(서울대 박사 출신) 우찬(육사 졸업 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등 아들 셋을 두었다. 그는 또한 관가에 소문난 효자로 알려져 있다. 관선 도지사 재직 시절 아픈 부친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내달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치국(治國)은 40여 년 동안 계속해온 공무원 경력으로 대변될 수 있다. 그는 1966년 행정고시 4회에 합격해 40년 가까이 관료생활을 하면서 ‘행정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이에 대한 이견은 거의 없다. 충청 도민들은 대부분 그의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칭송’하고 있다. 그는 전국 우수광역단체 평가에서 3년 연속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심 지사는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과 대통령행정수석비서관으로 일했으나 공무원 생활의 대부분을 중앙보다는 경기 의정부시장, 대전시장, 충남도지사 등 지방에서 근무하며 지방분권 전도사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1970년대 청와대 근무 시절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수도건설 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경력 때문에 그가 신행정수도 이전에 ‘목숨을 거는’ 까닭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그는 1988년 관선 충남도지사로 발탁돼 민선 3기를 합하면 4선 도지사를 한 셈이다.
그가 치국을 성공적으로 이루는 데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JP)의 힘도 컸다. 심 지사가 JP와 처음 만난 것은 한일협정 반대데모가 한창이던 1965년이었다.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이던 심 지사는 4·19 혁명에 참여했고 6·3 한일협정 비준반대 데모에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그 무렵 JP가 서울대 사범대에 찾아와 한일협정 비준의 불가피성에 대해 연설을 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이때 JP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자민련 창당 때 특별보좌역으로 JP와 함께했던 심대평 지사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JP와 결별했다. 사진=자서전 <길은 항상 새롭게 열린다> | ||
하지만 그는 지난해 4월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JP의 총선 출마 제의를 거절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는 자신을 키워준 JP의 ‘마지막’ 부탁을 뿌리쳐 냉정하다는 비판과 보스를 배신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잘나가던 공무원 심 지사의 ‘치국’도 평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지난 97년 충남 공무원들의 최대 독직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그가 직접 연루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재임 때 비리가 저질러져 도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한 98년 6·4 지방선거에서는 심 지사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는 이에 대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98년 선거 때 튀어나왔던 얘기다. 장인이 안산에 있는 조그만 땅을 집사람한테 상속해주었다. 도시계획 지역에 편입돼 값이 좀 올라 그것을 팔아 고향에 땅을 세 필지 샀다. 모두 등록한 재산이다. 화가 나서 얘기하기도 싫지만 집사람이 아들 셋한테 비슷한 땅 한 필지씩 나눠주려는 생각을 한 것 같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런 ‘오점’들이 심 지사의 이력서를 더럽힐 만큼 치명적이진 않았다. 그의 ‘수신제가치국’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이제 그는 마지막 꿈인 ‘평천하(平天下)’를 향한 스타트 라인에 서 있다. 그는 최근 자민련을 탈당하면서 “그동안 우리 지역에 정치적 리더십이 부족했다고 보는데 앞으로 행정중심 리더에서 정치중심 리더가 되겠다. 정당을 떠난 것은 신행정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여야를 아우르는 논리와 충청권의 결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가 “정치중심 리더가 되겠다”고 밝힌 점이 바로 정치권 진입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평천하’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들은 많다. 다음은 대전 지역 언론인 A씨가 밝히는 그의 아킬레스건.
“심 지사는 행정가로서의 능력은 인정받았다. 하지만 전국구로 가기 위해선 ‘맷집’이 있어야 한다. 이제 독립 선언을 한 이상 여권의 집중 견제를 받을 것이다. 40여 년 동안 묵묵히 공무원 생활을 한 그가 이전투구 정치판에서 온갖 견제를 뚫고 살아남을지 아무 것도 검증된 것이 없다.”
언론인 A씨는 탈당 선언 며칠 뒤 심 지사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고 한다. 심 지사는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 많이 가르쳐 달라”고 인사를 했단다. 이에 A씨는 심 지사에게 “그만하면 잘 하는 것이지요”라고 덕담을 건넨 뒤 “그런데 맷집이 강해야 살아남을 텐데 걱정스럽네요”라고 말했다. 심 지사는 평소 신중한 태도에서 벗어나 “아이, 잘 해야지”라며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심 지사가 또 넘어야 할 산은 정치적 명분이다. 그가 행정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대의로 중부권 신당론을 펼치고 있지만 그것이 지역주의에 편승한 정략적 판단에서 나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지난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는데 이는 그의 정치적 소신과 배치된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노무현 후보가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었음에도 그의 성향상 선뜻 노 후보를 지지하지 못하고 결국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것이다. 행정수도 이전 전도사임을 자임한 그로서는 오점으로 작용할 만하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정치권에 진입해 중부권 신당론을 외친다면 양날의 칼을 경험하게 될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3김 이후 지역 논리의 바람이 빠지고 있는 것이 시대 정신이다. 그가 신당을 띄워 내세울 것이라곤 행정수도 성공인데 이는 안으로 충청 민심을 잡을 수 있지만 충청권 밖으로는 반대세력만 확연히 구분하게 해주는 양날의 칼 같은 것이다. 이 점을 극복해야만 정치 아마추어인 그가 충청권의 벽을 넘어 전국적인 인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심 지사측은 탈당 기자회견 뒤 온갖 주변의 정치적 해석에 대해 매우 조심스런 입장이다. 공식 기자회견은 물론 사적인 이야기도 극도로 꺼리고 있다. 심 지사의 최측근인 배운교 전 비서실장은 이에 대해 “기자회견 뒤 언론의 과대포장에 매우 부담스런 입장이다. 당분간 정치적 발언은 일절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정치권 진입의 후퇴로 비쳐서는 안될 것”이라고 방어막을 치기도 했다.
40여 년 동안 오직 공무원 외길을 걸어온 심대평. 그가 골곡도 많은 한국 정치판을 싹 밀어내고 이름처럼 큰 평지(大平)를 한자락 펼쳐낼지, 충청 도민의 기대는 자못 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