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취임인사차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를 방문한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생각에 잠겨 있다. 이종현 기자 | ||
부총리 인선이 발표된 후, 관가 안팎에선 “앉을 사람이 앉았다”, “무난한 인사다”라는 여론이 대세다. 경제전문가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야당의 정치적 공세도 그리 드세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재정경제부 주변 관계자들에 따르면 한 부총리는 아직 ‘좌불안석’의 심정이라고 한다. 정기 인사가 아닌 갑작스러운 바통 터치는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외곽에서 지원만 하다가 난생 처음 ‘경제개혁의 전도사’로 나서야 하는 처지도 부담스럽기는 매 한 가지다.
더구나 부동산 투기 문제로 불명예 퇴진한 선배(이헌재 전 부총리)의 자리를 억지로 꿰찬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 역시 마음 한 구석을 무겁게 한다. 반대로 전북 출신인 진념, 강봉균, 전철환(전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계 거물 선배들의 뒤를 이어 전북의 자존심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 아닌 압박’ 역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 힘들다.
새해 들어 이기준 교육부총리 선임 파동, 이헌재 부총리 퇴진 파동 등이 이어지면서 부총리 자리가 언론과 여론의 집중 타깃인 점도 한 부총리의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요인이다.
통상 업무 실무자로 일해 오면서 20여년 넘게 기자들과 접촉하며 언론의 생리를 잘 파악하고 있고, 또한 인선에 앞서 청와대의 충분한 검증 과정을 통과했다고는 하나 과거 자신의 흠집으로 기억되고 있는 ‘마늘 파동’ 의혹은 물론, 부동산 문제에서부터 개인적인 사생활 등도 다시금 꼼꼼히 챙겨야 할 그다. 갑작스럽게 후보에 오른 관계로 과연 청와대에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졌는지, 자신이 부총리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흠집은 없는지 여부를 처음부터 되짚어봐야 할 입장인 셈이다.
일단 정·재계나 시민단체 등은 한 부총리의 임명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분위기다. 독도 분쟁 등과 관련한 한·일 외교 문제가 핫 이슈로 떠오르면서 상대적으로 한 부총리 인선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 탓도 있다.
그러나 경제 실무자로 오래 공직에 몸담았다는 이유 때문인지 재산이 많다는 것 외에는 딱히 여론을 부추길 만한 도덕적 결함은 거론되지 않고 있다.
여론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부분은 한 부총리가 진념, 강봉균, 이헌재, 전윤철 등 역대 경제 관료들과 줄곧 손발을 맞춰 왔다는 점이다. 정부가 추진해오던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부총리 경질에 따른 경제팀의 대대적인 수술을 피하는 대신 안정적인 조직 운용을 기대할 수 있다는 데 큰 의미를 두는 것이다.
▲ 이헌재 전 부총리(오른쪽)와 한덕수 부총리. | ||
특히 한 부총리가 대선 당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경제교사’ 역할을 맡기도 해 야당 의원들과도 ‘특별한’ 교감을 맺고 있다는 점 역시 고려됐다는 후문이다.
주변에서는 그를 ‘관운’과 ‘사람운’, ‘일복’을 타고난 인물로 꼽는다. 물론 한 부총리의 개인적 능력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경제 관련 인사 때마다 그의 이름이 불거졌던 것을 그저 관운 덕으로만 돌리기는 어려울 듯하다.
실제 한 부총리는 경제 부처 관련 인사 때면 늘 승진 하마평에 오르는 ‘단골손님’이었다. 89년 40세에 상공부 중소기업국 국장으로 승진한 그는 이후 상공부 산업정책국 국장 등 노른자위 자리를 거쳤다.
상공부 국장 시절 시멘트 파동, 공산품 가격 인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으로 나서 주가를 높이더니 94년 YS정부 때는 서울대 경제학과 8년 선배인 박재윤 전 경제수석비서관(현 아주대 총장)의 추천으로 청와대 경제비서실 산업담당비서관으로 입성,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94년 12월 산업자원부에서 명칭이 변경된 통상산업부 통상무역실장을 맡은 후부터는 ‘일복’까지 터졌다. 한·미 자동차 협상 등에서 실무를 진두지휘하며 한국측 협상단의 전략을 조율하고 상대국 관계자들과의 막후 협상 조정역을 맡으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상대 협상 실무자들이 ‘독종’(Malicious person)이라는 말을 자주 내뱉었을 정도로 꼼꼼하고 집요한 협상 테이블 장악력이 돋보였다는 평가다.
통상무역실장 재직 중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조정위원으로 임명된 한 부총리는 96년 12월 특허청장에 오르고 3개월 뒤 다시 통상산업부 차관으로 영전했다. 소위 ‘일은 많고 승진은 없다’고 하는 대외 통상 및 교섭 라인의 불문율이 가차 없이 깨져버린 것도 이때다.
DJ정부 시절에도 쾌속 승진은 계속됐다. 이때도 94년 당시처럼 ‘도우미’가 나섰다. 98년 초 DJ 집권 첫 내각 인선 과정에서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맡은 박정수 전 장관(작고)이 신설 통상산업본부장(장관과 차관의 중간급)으로 경기고 후배로 눈여겨본 한 부총리를 강하게 추천한 것. 당시 한 부총리의 나이는 49세였다.
후보 인선 검증을 맡았던 박주선 당시 법무비서관이 40대라는 점에 난색을 표했으나, 결국 한 부총리의 경기고 9년 선배인 선준영 당시 주 제네바대표부 대사가 본부장 아래인 차관으로 밀려날 정도로 ‘한덕수 카드’는 DJ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다른 차관들이 경질되는 가운데 그만이 유일하게 수평 이동해 경제 관련 부서와 재계에서 한동안 화제의 인물로 오르내렸다고 한다. 특히 한 부총리가 외교통상부 통상산업본부장으로 임명되자 당시 한 부총리와 나이가 엇비슷하거나 많던 외무부 소속 국장과 심의관들이 연일 소주잔을 기울였고, 반면 산업자원부에서 외교통상부로 파견된 직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는 일화 역시 관가에 전설처럼 퍼지기도 했다.
▲ 지난 15일 노무현 대통령이 한덕수 경제부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
2000년 OECD대사 임명 당시에도 이규성 초대 재정경제부 장관이 다른 인사들을 적극 추천했지만 DJ는 한 부총리를 선택했다. 그는 2001년 11월 마침내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입성해 그 후 경제수석비서관까지 지냈다.
한 부총리는 그간 관료로서 대외 행보가 넓은 편이 아니었지만 이때부터 비교적 많은 이들과 교류를 갖게 됐다는 후문이다. 여기저기서 ‘경제수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경기고-서울대 2년 선배인 손학규 경기도지사의 경우엔 직접 ‘부지사 추천’을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2002년 경제수석비서관 재직 때 불거진 ‘마늘 파동’은 승승장구해온 그에게 가장 험난한 시련이었다. 통상교섭본부장 시절 한·중 마늘 협상을 타결한 지 2년이 지나 ‘마늘 협상 당시 한국과 중국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연장 불가 내용에 합의하고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이 와중에 전·현직 경제부처 간부들 사이에 책임 공방전이 벌어졌고, 파동의 여파로 한 부총리는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고 만다. 그 뒤 법무법인 김&장에서 고문으로 한동안 활동했던 그는 이듬해인 2003년 산업연구원장을 맡게 된다. 물론 연구원장 시절에도 한 부총리의 이름은 산자부 장관 후보나 외교통상부 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리고 2년여의 ‘야인’ 생활 끝에 2004년 2월 그는 국무조정실장으로 화려하게 공직에 복귀했다.
‘외유내강형’이라는 평가를 받는 한 부총리는 절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평소 합리적이고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 부총리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선 상대의 지위를 떠나 좀처럼 ‘양보’가 없다는 후문이다. 이런 그의 외고집은 때때로 ‘설화’를 초래하기도 했다.
실제 그는 ‘소신성’ 돌출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것이 한두 번 아니다. 통상교섭본부장 시절 한·중 통상협상이 진행되는 시점에서 “일반 음식점 가격표에 소고기 수입지를 표시토록 한 식품위생법 시행 규칙 개정안은 옳지 못한 안”이라고 세계무역기구(WTO)의 입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해 개정안을 만든 농림부와 보건복지부를 발끈하게 만든 바 있다.
98년에는 ‘스크린쿼터제 무용론’을 제기하고 나서다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으며, 마늘 협상 때는 당시 산자부 장관에게 “무역위원회를 제대로 관리하라”고 면박을 줘 파문이 인 적도 있다. 또한 통상교섭본부장 시절에는 한국무역진흥공사를 외교통상부 산하에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산업자원부와 재경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는 한·미 투자협정체결에 대해 재경부 내에서 비판 기류가 일자 “대안도 없는 국수주의자들”이라고 재경부 사람들을 몰아세우기도 했다. 2000년 7월에는 자동차 수출국에 대해 개방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겠다는 이유로 스웨덴제 ‘사브’를 관용차로 구입했다 시민단체들의 강한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참여정부에서도 ‘소신 있는’ 발언은 끊이질 않았다. 특히 법무법인 김&장의 고문으로 있던 2003년 5월 그와 재정경제부 및 외교통상부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의 일화는 한동안 관가의 화제였다. 이 모임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체결된 한·미 투자협정에 관한 설명이 없자 당시 재정경제부 차관보였던 서울대 경제학과 1년 후배 권태신 현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을 면전에 두고 공개석상에서 현 정부의 정책을 강하게 질타했던 것.
이처럼 소신을 굽히지 않는 외고집 성격을 두고 일각에선 한 부총리가 과연 경제 관련 부처 사이에서 적절한 조율 능력을 보여줄지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주관이 뚜렷한 부총리가 농산물 문제 등 각종 현안 등을 놓고 각 부처와 여론에 민감한 여권과 시시각각 대립각을 세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과거 통상 현안을 놓고 불거진 부처간 불협화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경험이 있는 한 부총리가 과연 참여정부의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은 미지수”라는 입장을 전했다.
한 부총리는 한 쪽이 살면 한 쪽이 죽는다는 ‘제로섬’ 원리를 싫어하고 ‘윈-윈’(Win-Win)을 좋아하는 통상 실무전문가 출신이다. 경제 관료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그가 ‘부유층의 경제 논리’와 상당 부분 상충할 수밖에 없는 서민 경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의문을 사는 대목이다.
물론 그동안 한 부총리는 한미 자동차협상, 공산품에 대한 미국 반덤핑 구제 대응, 대일·대미 무역적자 해소 방안 연구, 뉴라운드 협상 등 대외 무역 통상 업무에서 남다른 역량을 과시한 바 있다. 노무현 정부가 폭풍 속 한국호의 경제 선장을 맡긴 가장 큰 이유도 이 같은 그의 전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과연 한 부총리는 내수 침체 극복과 경기 부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아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