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주영은 자신의 이름에 따라붙는 ‘축구천재’라는 수식어에 대해 “나중에 월드컵과 유럽 무대에서 잘해야 진짜 천재”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임준선 기자 kjilm@ilyo.co.kr | ||
전날 CF 촬영을 하느라 ‘달콤한 휴가’를 헌납한 탓인지 얼굴엔 피곤함이 뚝뚝 묻어났다. 그래도 하루 거른 웨이트트레이닝을 위해 다른 선수들보다 미리 나와 몸을 풀고 있었던 박주영은 사전에 약속된 인터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끼어들기’를 시도하는 기자의 질문에 비교적 편안하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 놓았다.
지난해 10월, 2004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과 최우수선수상을 거머쥔 뒤 일약 특급 스타로 떠오른 박주영을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박주영의 인기는 지금과는 또 달랐다. 그 당시에도 박주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VJ가 밀착 취재를 할 만큼 인기 급상승 중이었는데 6개월이 지난 지금은 당시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달뜬 시선과는 달리 마치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차분하게 운동에만 전념하고 있는, 속이 꽉 찬 ‘애늙은이’이자 ‘축구 천재’를 만나본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인사에 ‘피곤하다’는 말이 스프링처럼 튀어 나온다. 전날 CF 촬영을 하며 밤을 새운 탓도 있겠지만 그 이후 숙면을 취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크다고 한다. 그래도 잠자는 것보단 나와서 운동하는 게 덜 피곤하단다. 프로 데뷔하고 한 달이란 짧은 시간을 보낸 소감부터 물었다. 박주영은 경기별로 적응도를 비교해 냈다.
“네 경기를 뛰었는데 1골 1도움의 성적을 올렸어요. 잘한 건가요? 아직 멀었죠. 첫 게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조차 기억이 안 날 만큼 정신없이 치렀던 것 같아요. 두 번째 성남과의 경기는 꼭 뛸 거라고는 예상 못했어요. 그래도 감독님께서 들여보내 주셔서 감사했죠. 찬스도 쉽게 났고 골도 넣고, 하여튼 기분 좋은 경기였던 것 같아요. 조금씩 조금씩 몸이 되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고 출전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더라구요.”
역시 말을 잘했다. 그 또래의 나이 어린 선수들이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 힘들어 하는 것과는 달리 박주영은 술술 잘도 풀어냈다. 다음은 다소 독특한 ‘박주영식 화법’을 지면에 담기 위해 그와 나눈 내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프로 입단 후부터 줄곧 팀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는데 다른 동료 선배들에게 민망하거나 불편했던 적은 없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봐주는 건 좋긴 한데 너무 많이들 봐 주시니까 나로 인해 다른 부분이 묻힐까봐 걱정이 들어요. 뭐든지 적당한 게 가장 좋은 것 같아요. 과한 관심이나 사랑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때도 있어요. 좋은 팀을 만나서 그런지 팀과의 궁합도 아주 잘 맞아요. 안 좋으면 어떻게든 티가 날 텐데 아직까지 그런 적이 없었어요. 동료, 선배들이 다 아는 분들이라 별다른 적응 없이 지나갔어요. 고약하게 구는 선배들도 없고. 다 잘해주세요. 생활도 재밌고.
―같은 팀 선수들이 ‘박주영’이란 이름 때문에 부담스러워 하진 않나요?
▲매스컴에서만 그렇지 팀에서 전 그냥 신인 선수에 불과해요. 막내니까 공도 챙겨야 하고 청소도 열심히 해야 하고 인사도 잘해야 하고, 그런 거죠. 할 건 다 해요. 그런 거 안 하고 나 잘났다고 하면 아마 ‘왕따’당할 걸요?
―프로 입단하면서 청소년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승용 선수가 많이 불편해 했었어요. 처음엔 약간의 오해도 있었다고 하던데.
▲많은 얘기를 나누며 풀었어요. 승용이도 그런 감정을 오래 담아 두는 스타일이 아니라 금세 풀어졌죠. 툭툭 털어 버리고 이해해 줘서 참 고마웠어요.
―한번 솔직히 얘기해 봐요. 프로 데뷔하기 전 가장 큰 걱정이 있었다면 뭐였나요?
▲공격수니까 게임 뛸 때마다 골을 넣을 거라고 기대하는 부분이 좀 그랬어요. 그러나 기자분들이 걱정하셨던 프로 수비수들과의 거친 몸싸움은 큰 문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막는다고 막히고, 부딪힌다고 넘어지면 잘하는 선수가 아니잖아요. 직접 뛰어 보니까 (상대 수비수들이) 노련한 부분은 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앞으로 더 경험해봐야 알겠죠. 많이 겪다보면 더 잘 될 거예요. 안될 거라곤 생각 안 해봤으니까. 다행인지는 몰라도 나한테 그렇게 반칙 많이 안 하시던데요?
―매사에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요? ‘걱정’과 ‘근심’이란 단어를 모르고 사는 사람 같아요.
▲인생 쉽게 살아야 해요(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무 살밖에 안 된 친구가 자기보다 곱절이나 나이 많은 기자 앞에서 인생 운운하는 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기자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주영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기 싫은 거 안 하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죠. 축구를 시작할 때 부모님이 반대 끝에 승낙하시면서 ‘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두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저한테는 ‘축구=재미’로 인식돼 있어요.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지, 해야 되니까, 돈을 벌어야 되니까 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 당장 축구를 못하게 된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못하게 된 데 대한 좌절보다는 지금 당장 뭘 해서 먹고 살 것인가를 궁리하는 게 더 급선무니까. (기자한테) 인생 금방 금방 가요. 살아보시니까 그렇죠? (이쯤 되면 할 말이 없어진다.)
▲ 박주영은 FC서울 입단 후 네 경기서 1골1도움을 기록하며 특급스타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3월9일 대구FC와의 홈 개막전 모습. | ||
▲CF 촬영이 축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안 찍었을 거예요. 술 마시고 노는 거 아니니까, 크게 방해받는 거 아니니까, 몸 망가지는 거 아니니까, 잠깐 잠깐 시간을 내서 찍은 거예요. 전 언론에 많이 노출되는 것도 가급적 사양하고 싶어요. 인터뷰하는 시간도 아까울 때가 있어요. 그 시간에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떤 요청도 거절할 겁니다.
―그렇다면 축구선수로서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룬 다음에 CF를 찍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땐 CF가 안 들어 올 것 같은데요. 하하. 솔직히 말해서 프로선수가 되니까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더라구요.
―그렇다면 앞으로 CF 제의가 계속 들어오면 응할 생각은 있는 건가요?
▲CF 촬영을 한 지금도 전 그런 쪽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광고업계에서 왜 절 모델로 뽑으셨는지 도통 이해가 안 돼요. 촬영을 하면서도 내가 이걸 왜 하나 싶었으니까요. 절 모델로 내세워서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가 팔릴 거라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차라리 유명한 연예인을 쓰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절 통해서 뭘 팔아 먹을 수 있을까 싶은 거죠. 구단과 에이전트 측에서 잘 알아서 결정해 주실 거라 믿어요.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서면 표정이 굳어지고 어색해 하는 사람이 어떻게 CF를 찍었는지 궁금할 따름이네요.
▲어렵지 않았어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저기 쳐다보라면 저기 쳐다보고 여기로 볼 차라면 그렇게 따르면 되고, 표정 연기 따로 안 해도 되고, 두 편 다 먹는 광고였으니까 맛있게 먹어주면 되는 거고. 만약 표정 연기를 요구하는 CF였다면 못했을 거예요.
―나이키에서 진행한 화보 촬영도 아주 멋있었어요.
▲그것도 사진작가분이 지시한 대로 따른 거예요. 고개를 숙인 다음 눈을 치켜 뜨고 인상 쓰는 장면이 있었는데 별다른 연기가 필요 없었어요. 제가 잠 오는 표정만 짓고 있어도 인상이 험악하다고 하시더라구요. 웃는 건 거의 없고 뻣뻣하게 서서 찍은 장면도 많았고, 있는 그대로의 촬영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죠.
―좀 다른 얘긴데요 지난 번 청소년대표팀 차출 문제로 한창 여론이 들끓었잖아요. 당시 심정이 어땠어요?
▲게임을 뛰고 안 뛰고는 구단에서 결정할 부분이었기 때문에 제 입장에선 달리 할 말이 없었어요. 제가 어떻게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부산에서 게임을 마치고 곧장 대표팀 숙소가 있는 수원으로 향했다가 그냥 돌아온 부분은 좀 기분이 그랬어요. 앞으로 또 좋은 기회가 있겠죠. 그때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드리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TV를 통해 경기를 보니까 우리팀이 너무 잘하더라구요. 제가 안 가도 되겠던데요? 하하.
―박주영이란 이름 앞에 항상 붙는 수식어가 있죠? ‘축구 천재’라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슨 ‘축구 천재’예요. 제가. ‘축구 천재’가 아니라 바보죠. 축구에 미친 바보. 축구만 하다가 딴 거 별로 못해 보고 축구만 알고 산 바보예요. 나중에 월드컵에 나가서 잘하면, 유럽에 진출해서 좋은 모습 보여주면 그땐 진짜 ‘천재’ 소리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지난 번 월드컵 최종 아시아예선전을 봤을 것 같은데 대표팀 경기를 통해 느낀 점이 있다면 뭔가요?
―선배들 플레이를 보면서 배울 점이 많았다고 하던데 좀 설명을 해주세요.
▲유럽에서 뛰는 선배들의 플레이가 정말 기가 막혔어요. 역시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럽 무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 힘든 건데 주전으로 뛰고 계시니까 저한테는 마냥 부러울 따름이죠. (정말 부러운 표정으로) 너무 잘하세요. 지금 상태대로라면 우린 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을 거예요. 대표팀에서 뛰고 있는 게 참 부럽더라구요. 과연 나한테 그런 좋은 기회가 생길까 싶기도 하고. 프로팀에서 잘하고 있으면 저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지겠죠? 그렇게 믿고 싶어요.
―지금 대표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밝히는 거죠?
▲어떤 선수가 대표팀에 뽑히는 걸 싫어하겠어요. 만약 제가 대표팀에 발탁된다면 정말 제 장기들을 다 보여주고 싶어요. (장기가 뭐냐고 묻자) 막 헤집고 다니는 거, 드리블, 돌파력, 키핑력 등이죠. 그런 걸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어요.
―거의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 축구선수로서의 목표가 유럽 진출이라면 인생의 목표는 뭔가요? 너무 거창한 질문인가?
▲한 가지밖에 없어요. 축구를 통해 선교 활동을 벌이는 거. 그건 감독이 돼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상적인 감독상이 있다면?
▲선수들에게 감독이라고 해서 눈치주지 않는 거, 능률적으로 선수들이 알아서 운동할 수 있게끔 자율과 책임을 강조하는 감독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혹시 지금 이장수 감독의 눈치를 보나요?
▲아뇨. 전 눈치 안 봐요. 눈치 볼 필요도 없구요. 저 그런 거 잘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