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택과 의원회관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당한 이광재 의원이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고통스런 심경을 토로했다. 사진은 지난 4월15일 유전의혹 해명 기자회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노무현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인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이 정치생명의 기로에 섰다. 옛 철도청의 러시아 유전개발 투자의혹, 이른바 ‘오일 게이트’의 중심인물로 부각되면서다. 이미 자택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 등 11곳이 검찰에 의해 압수수색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본인 스스로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으로까지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 ‘노 대통령 당선의 1등 공신’ ‘386 최고의 전략 기획통’ 등의 찬사를 동반하며 어느 자리에 있던 주목을 받아 왔던 이 의원. ‘주군’인 노 대통령이 “나 개인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평가할 만큼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온 이 의원은 2002년 대선 때부터 정권의 ‘키맨’(Key Man)으로 불리면서 험로역정 속에 자신의 정치적 진로를 개척해 왔다.
강원도 평창 출신인 이 의원은 1남6녀 중 외아들. 그의 부친은 평창읍 사무소에서 일한 공무원이었다. 이 의원이 정치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원주고등학교를 다닐 당시 생명사상으로 유명한, 지금은 고인이 된 장일순씨를 만나면서다. 이 의원은 장씨에 대해 “한 인간이 인간의 정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고 술회한 적 있다.
이 의원과 노 대통령의 인연은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통에 그다지 신선감을 주지 못하는 뉴스다. 연세대 4학년 시절인 1987년 시국사건으로 수배를 받아 도피생활을 하다 우연히 부산의 주물공장에 의탁하게 되고, 그곳에서 이호철씨(현 청와대 제도개선비서관)의 소개로 ‘노 변호사’를 만난 후 줄곧 동고동락하다 정권창출의 주역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의원은 93년 노 대통령이 설립한 자치경영연구소의 기획실장, 95년 조순 전 서울시장 선대위 기획실장 등을 지내면서 능력 있는 기획참모로 정치권에서 인정받았다. 특히 2002년 대선 당시엔 노무현 캠프 및 비서실의 기획팀장을 맡아 활약했고 특히 당시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TV 광고인 ‘노무현의 눈물’ ‘기타 치는 대통령’ 등을 만들어 대박을 터뜨리며 미디어 선거전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 의원은 무엇보다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와 같은 사상 초유의 ‘기록’을 남긴 지난 대선에서 외곽을 돌며 노 후보에게 여론동향을 가감 없이 전달, 정확한 민심 파악을 도왔고 노 후보의 단일화 결단을 이끌어 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이 같은 기획력과 정치적 감각을 토대로 2002년 12월18일 대선 당일 상당수 선거 관계자들이 승리를 자신하지 못할 때에도 그는 “50만표 차로 이긴다”고 장담, ‘단일화를 포함한 대선 기획이 철저한 데이터를 기초로 이뤄진 것’이라는 분석을 뒷받침했다. 이 의원의 연세대 후배인 청와대 한 관계자는 “광재형의 기획력과 카리스마는 학생운동 시절 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이른바 ‘언더’활동을 하면서 1~2년 후배들이 그의 한마디에 꼼짝 못할 정도였다”며 “대선 캠프와 청와대 상황실장 시절에도 논란이 되는 사안이 발생하면 결국 문제를 정리하는 것은 광재형의 몫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거칠 것이 없는 듯’했던 이 의원의 행로는 참여정부 출범 후 롤러코스터처럼 심한 부침이 이어졌다. 이 의원은 우선 노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 정보라인의 중추인 국정상황실장으로 근무하다 8개월 만인 2003년 10월17일 ‘아군의 저격’으로 물러나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노 대통령을 함께 만든 ‘1등 공신’인 당시 통합신당 천정배 의원이 그를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실세”라고 비판하자 바로 다음날 청와대를 떠났던 것.
당시 이 의원은 청와대를 떠나면서 “‘권력은 칼날 위의 꿀을 빨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하며 생활해 왔다”며 퇴임소감을 밝힌 바 있다. 자신이 쓴 책인 <우통수의 꿈>에서 “30대에는 정도전처럼, 40대에는 이성계처럼”이란 지향을 밝히며 큰일을 도모하겠다는 야심을 밝힌 바 있는 이 의원으로서는 처음 맛본 뼈아픈 좌절이다. 이 의원은 17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자신을 낙마시킨 ‘주범’인 천 의원이 원내대표에 선출된 후 원내부대표를 맡아 과거의 앙금을 해소했다는 추측이 나돌았으나 본인은 “나는 화해를 거론한 적이 없다. 호사가들의 얘기일 뿐”이라고 일축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이 의원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청와대를 물러난 지 두 달 만인 2003년 12월엔 16대 대선 당시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후배인 문병욱 썬앤문 회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아 ‘좌(左) 희정, 우(右) 광재’로 불리던 또다른 386실세 안희정씨에 건넨 사실이 드러나 불구속 기소 당하는 처지가 됐다. 특히 이 의원은 처음엔 돈을 받은 사실을 부인하다 검찰수사를 통해 전모가 드러나자 뒤늦게 “문제가 되었을 때 진솔한 고백을 하려 했으나 용기가 부족했던 것 같다”고 시인해 도덕적 비난을 샀다.
또 2004년 2월에는 국회 대선자금 청문회에 불려 나와 “정치인 노무현에 대해 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정말 옳지 않다”고 일갈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오일 게이트’ 파문이 본격화된 이후 지인들은 이 의원이 겪었던 시련을 거론하며 고난의 연속인 그의 정치행로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노무현 캠프’의 후배인 청와대 한 관계자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으로 있을 때나 옷을 벗고 있다가 ‘썬앤문’ 사건 등으로 국회 청문회에 불려다닐 당시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광재형이 무척이나 괴로워했던 사실이 떠오른다”며 “17대 총선에서 당선돼 ‘이제는 탄탄대로를 달리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뭐라 위로해야 할지 난감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실제 17대 총선 직후 “내 금배지는 현역의원 3명을 물리치고 얻은 것이어서 무게가 좀 나간다”며 여유섞인 농담을 던지곤 했던 이 의원은 ‘오일 게이트’와 관련해 자택과 의원회관을 압수수색당한 후 오대산 등 강원도 소재 산을 오르며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386 출신 열린우리당 한 의원은 “평소 나서기보다는 조용하게 일을 처리하는 성격인 이 의원이 이번에 또다시 언론의 도마에 오르고, 검찰로부터 압수수색까지 당하는 상황을 맞으면서 심신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것 같다”며 “지금이 이 의원의 정치인생의 최대 고비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지난해 11월 이광재 의원이 열린우리당 의총에서 밝게 웃고 있다. 17대 총선에서 당선돼 탄탄대로를 달릴 것으로 예상됐던 그는 ‘유전게이트’로 회복불능의 상처를 입고 말았다. 오른쪽은 2003년 4월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때의 모습. | ||
이 의원의 그동안 행보에 비판적인 인사들은 그가 여권 내 핵심현안, 특히 인사 문제에서 학연·지연 등 개인적 인연에 얽매여 ‘제 사람 심기’에 몰두해 왔다고 비판한다. 이 의원의 연세대 화공과 은사인 김우식 비서실장을 정점으로 한 청와대 내 ‘연세대 인맥’ 형성을 사실상 주도했다거나, 강원도 원주 출신에 연세대를 나온 모 경제부처 차관의 기용에 개입했다는 등의 얘기는 이미 관가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3월엔 이 의원이 주도하는 의정연구센터 이사장(전 문화체육부 차관)이 이철 전 의원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된 것을 두고 “역시 이광재가 세긴 세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항간에는 인천국제공항공사 국민연금관리공단 한국가스공사 지역난방공사 한국수자원공사 등 주요 정부출자 투자기관장 인선이 이유없이 미뤄지는 이유를 놓고 “그동안 고위직 인사를 좌우해 온 이 의원이 오일 게이트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교통정리’할 겨를이 없기 때문”이란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여권 내에선 오일 게이트의 주역인 김세호 전 건설부 차관과 이 의원의 관계도 관가의 이른바 ‘이광재 사단’ 형성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시각도 적지않다. 김 전 차관은 2001년 이사관으로 승진한 뒤 1년 만에 관리관으로 승진했고 10개월 후 노무현 정부 출범 후 처음 단행한 차관급 인사(2003년 3월)에선 최연소로 철도청장에 발탁됐다. 이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었던 이 의원은 김 전 차관의 파격승진에 대한 논란에 대해 “건교부 직원들의 평가를 들어 보면 철도청장이 아니라 당장 장관을 시켜도 문제가 없을 정도”라고 격찬해 주목을 끌었다.
정부 한 고위 관료는 “현 정권 출범 이후 관가에서는 ‘이광재=여권 핵심부’란 등식이 100% 통용됐다. 이 의원도 청와대 상황실장 시절부터 향후 본격적인 정치권 진입에 대비해 주요 부처의 핵심인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왔으며 17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지역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온 것으로 안다. 관가에서는 이 의원이 지난 3월 열린우리당 강원도당 위원장에 선출된 후 그가 내년 지방선거에서 강원도지사직에 도전할 것이란 얘기가 파다하게 퍼졌다”고 말했다.
실제 이 의원은 <월간중앙>이 지난 2월 정치부 기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해찬 총리,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 다음으로 노 대통령에게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선정돼 주목을 받았고, 지역구인 강원도 평창이 지난해 12월 전북 무주를 제치고 2014년 동계올림픽 후보지로 결정된 것과 관련해서도 실세다운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권 내에선 검찰 소환이 임박한 이 의원이 오일 게이트와 관련해 ‘압력’을 행사한 팩트(fact)가 확인되지 않는다 해도 그의 향후 정치행보에 이번 사건이 커다란 부담이 될 것이란 점에 이견이 없는 상태다.
일부에선 김세호 전 차관이 자신이 이번 사건의 ‘몸통’을 자처하고 나선 만큼 검찰이 이 의원이 ‘권력형 외압’을 행사해 국고 손실을 초래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는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이와 관련, 검찰이 이 의원의 지역구 관계자인 지아무개씨가 전대월씨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을 내세워 이 의원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초강수’를 둔 것을 두고 ‘권력형 비리’로 흘러가던 사건을 단순한 불법 정치자금 수수건으로 축소시키려는 의도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사법처리 여부를 떠나 벌써 이 의원이 입은 정치적 데미지는 ‘회복 불능’이란 얘기가 나올 만큼 심각하다는 것이 중론. 청와대 한 핵심인사는 “개인적으론 이 의원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에게 불리한 상황이 연발하면서 ‘정치인 이광재’의 입지엔 치명상을 입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며 “검찰 수사과정에서 만약 권력형 외압의 근거가 조금이라도 밝혀질 경우엔 이 의원이 여권 전체를 흔들 ‘뇌관’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박준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