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성공단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지난 5월2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도라산남북출입사무소를 나서며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현 회장의 평양 방문은 2004년 5월에 이어 두 번째다.
흥미로운 부분은 현 회장이 이번 방문에서 누굴 만났느냐는 점이다.
현 회장의 이번 방북길에는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과 육재희 현대아산 상무, 현 회장의 큰딸인 정지이씨가 동행했다. 하지만 정확한 일정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 회장이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일정을 소화했는지 회사쪽에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민간 방북단과의 공식 일정은 공동취재단의 사진으로 알려지고 있는 정도다.
현 회장 일행이 만경대를 관람할 때 북측은 남측 대표단과는 별도로 안내하고 승용차도 따로 배정하고, 안내원도 따로 배치하는 등 각별한 예우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의 관심은 이번 평양 방문에서 현 회장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는지, 정몽헌 전 회장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대북라인에서 사라진 오너급의 핫채널이 다시 열릴 수 있는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 회장은 지난 2003년 10월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으로 취임한 뒤 2003년 말 인사에서 강명구 전 현대엘리베이터 회장과 김재수 경영전략팀 사장 등을 퇴임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빠르게 그룹을 장악해 나갔다. 이른바 정몽헌 전 회장의 실정에 책임이 있다는 ‘가신’ 정리에 나선 것.
이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김윤규 부회장의 진퇴 문제였다. 김 부회장의 진퇴 여부는 지난 겨울부터 재계의 은밀한 화제였다. 그가 3월 주총에서 ‘퇴진을 한다’, ‘안 한다’는 얘기가 어지럽게 나돌았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윤규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하고 윤만준 현대아산 고문이 사장에 임명된 것. 현대아산측은 대외적인 대북 사업은 김 부회장이, 내부 업무는 윤 사장이 나눠서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부에선 현 회장이 남편의 급작스런 유고로 인해 흐트러졌던 대북사업의 주도권을 다시 정씨 오너 일가에서 다잡는 제스처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이번 방북길에서 김 부회장을 대동한 현 회장이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외 행사’이기에 윤 사장 대신 김 부회장을 대동했지만 정몽헌 회장의 사망 이후 변화된 현대그룹 내부 역학구도와 현 회장의 위치에 대해 북측에서 어떤 화답을 했을지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 지난 2003년 11월19일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가운데)이 KCC와의 경영권 분쟁 이후 현대상선 사옥에서 첫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현 회장은 경영 2년여를 넘기면서 ‘세상물정 모르는 가정주부’라는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 ||
이와 관련된 일화 하나. 현 회장은 지난해 8월 현대그룹 비전 선포식을 갖고 “2010년 매출 20조원 달성, 재계 10위 진입”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때 그는 기념사를 “용기와 자부심의 현대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현 회장의 시아버지이자 현대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이 즐겨쓰던 ‘용기’라는 말과 현대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한 셈이다. 실제로 그는 경영권 분쟁에서도, 가신들의 퇴진에서도 ‘단호함’과 ‘배짱’을 보여줬다. ‘사회 물정 모르는 주부’라는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을 불식시켰다. 현 회장 본인도 “내게 이런 속배짱이 있는 줄 몰랐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과 시숙부의 경영권 공격으로부터 ‘정몽헌가의 현대’를 지키기 위해 30년 가까이 살림만 하던 그가 “두려워할 겨를조차 없이” 현대그룹 회장직을 맡아 2년여를 넘기면서 스스로의 ‘속배짱’에 놀랐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현 회장은 집안 대소사에도 꼬박꼬박 참석한다. 정세영 현대산업 명예회장의 빈소에도, 정인영 전 한라그룹 명예회장의 부인상에도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럼에도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웃는 모습으로 마주했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정상영 명예회장측이 갖고 있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도 여전하다. 정 명예회장쪽에선 지분 보유 목적을 ‘경영 참가’로 밝히고 있는 형편이다.
김윤규 부회장은 지난 봄 현대아산의 대북사업권을 매각해 채권단 관리하에 있는 현대건설을 되찾아오겠다는 의견을 ‘개인 아이디어 차원’에서 내놨다. 현 회장이라고 해서 현대그룹의 모태였던 현대건설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없을리 없다. 다만 그것을 사들일 돈이 없을 뿐이다. 섣불리 나섰다간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상선을 축으로 간신히 안정을 취한 현대그룹의 근본이 흔들릴 수도 있는 형편이다. 현대건설 인수 이전에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상선의 오너 지분을 높이는 것이 화급한 실정이다.
물론 개성공단 사업의 진행 속도가 더 빨라지고 현대아산이 개발 연고권을 갖고 있는 묘향산이나 백두산, 개마고원 일대의 관광개발이 속도를 낼 경우 현대그룹의 재앙의 근원이었던 현대아산이 달러박스로 ‘환골탈태’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지난 3년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넘겨온 현 회장이 향후 운도 함께 따라주는 경영자가 될지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