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운찬 서울대 총장 | ||
장관급인 국내 최고 명문 대학의 총장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 자체는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정 총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 경제계의 ‘빅맨’으로 주목받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새삼 낯설지도, 어색하지도 않다. 하지만 전례 없이 정 총장이 수많은 기사와 시론에 노 대통령과 함께 등장하는 게 심상치 않다. 특히 상당수 언론이 일제히 두 사람의 관계를 대립 구도로 몰아가고 있어 더욱 그렇다.
실제 지난 6월28일 서울대가 2008학년도 대학 입시안을 발표한 이후 정 총장은 노 대통령과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워왔다. 학력차를 반영하지 않는 내신 대신 논술 비중을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시킨 이번 입시안에 대해 노 대통령이 곳곳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지만, 정 총장 역시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대학평준화’를 외치는 대통령의 사고방식을 바꿔 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이 때문인지 그를 바라보는 각계의 시선도 과거와는 딴판이다. 전에도 그는 역대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소신 발언으로 파문의 중심이 되곤 했다. 하지만 정치권이나 관료로의 입각에 미련이 없다며 선을 그었기 때문에 정작 그의 사생활이나 인간적 면모, 인생철학이 부각된 적은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르다. “나는 죽어도 학자로 살고 싶다”는 그의 행보를 두고 여러 해석이 나돌 만큼 세간의 최고 화두가 되어 버렸다.
청와대와 여권이 ‘적당히’가 아닌 전면전까지 불사하는 강경 발언을 쏟아냈던 것만 보더라도 짐작이 간다. 이제 여권 일각에서는 “야당 총재가 하나 더 생긴 게 아니냐”는 푸념 섞인 말도 들린다. 정 총장은 여권 핵심부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존재로 부상했다. 최근 몇몇 설문 조사에서 ‘정운찬’이라는 이름이 차기 야권의 대권 후보 중 하나로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를 수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1946년’ 음력 2월29일 충남 공주 탄천면에서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하나 있고, 나머지 둘은 여동생이다.
현재 각종 프로필에 소개된 그의 생년월일은 잘못됐다. 원래 태어난 해는 1년 뒤다. 부친이 54년 4월 출생 신고를 하면서 학교에 보내려 하자 관청에서 “여덟 살이 돼야 학교에 보낼 수 있다”고 해 부친이 무심코 당시 시점에서 8년을 빼고 46년 2월29일생으로 신고해버린 것이다. 실제 46년에는 2월이 28일까지 있다.
이 때문에 정 총장이 외국을 나갈 때 상당한 고생을 했다는 후문. 특히 신원 사항을 잘 ‘따지는’ 중국에서는 매번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6·25 이후 서울에 올라와 동숭동에 살면서 창경초등학교를 다닌 정 총장은 아버지가 일찍 작고하면서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유년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간호조무 등을 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가정을 꾸려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워낙 공부를 잘했던 정 총장은 선생님 등 주변의 도움으로 경기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 때도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아 명문 경기고에 입학했지만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심지어 도시락도 제대로 싸오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입주과외’를 하면서 자신의 학비를 벌어야만 했다.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적었고, 그토록 좋아하던 독서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경기여고 학생들과 영어 클럽 ‘센추리’를 조직, 영어 실력도 쌓고 일말의 소외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동창들이 기억하는 정 총장은 상당히 사려 깊고 머리가 비상했던 학생이었다. 정 총장과 고3 때 급우였던 한 인사는 “정 총장이 고3 때 반장을 했는데 친구들에게 인기가 참 많았다”며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는 남의 얘기를 들어주기를 좋아했으며, 집안이 가난했다는 점에 스스로 상처를 많이 입었을 텐데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고 회상했다.
“정 총장은 정말 똑똑한 친구였다”고 치켜세운 이 인사는 “보통 수재라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정 총장은 정반대다. 그리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절대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전했다.
▲ 지난 8일 제2회 대학혁신포럼에 참석한 정운찬 총장이 피곤한 듯 회의 도중 안경을 벗고 눈을 닦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애초 화공과로 진학하려 했으나 적성이 맞지 않아 문과로 전환한 정 총장은 한동안 법대 진학을 염두에 뒀다고 한다. 그러나 고교 1년 선배인 김근태 현 보건복지부 장관의 권유로 결국 경제학과를 선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66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제3자의 권유로 방향을 급선회한 탓이었는지 정 총장은 대학 입학 초에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 1년 때 전공 기본 과목인 경제학원론과 회계원리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았던 게 단적인 예라면 예다.
이와 관련, 정 총장이 이화여대 학생과의 단체 미팅을 위해 경제학원론 수업 휴강을 주도해 ‘열’받은 교수가 F학점을 줬다는 일화는 서울대 학생이라면 누구나 들었을 법한 ‘전설’이다.
이때 정 총장의 구세주로 나타난 인물이 조순 전 부총리다. 정 총장은 2학년이던 67년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한 조 전 부총리의 강의에 빠져 그의 수업은 모조리 들었고, 결국 정 총장은 조 전 부총리가 제일 아끼는 수제자가 됐다고 한다.
조 전 부총리가 정 총장이 짝사랑하던 미대 학생을 직접 연결시켜줘 결혼에 골인시킨 일화나 제자 중 유일하게 미국 마이애미로 유학을 보낸 일화 등은 두 사람 각별한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졸업 후 아버지의 부재, 외동아들이라는 이유로 군 면제 판정을 받은 정 총장은 한국은행 외환관리부 외환 창구에서 1년 6개월여 간 근무했다. 학업을 더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또 다시 은사인 조 전 부총리가 나타난다. 우연히 은행에서 제자와 마주친 조 전 부총리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것을 권유한 것. 스승의 제안에 따라 마이애미대학에서 1년간 석사 과정을 마친 정 총장은 당시 경제 석학들이 포진하던 프린스턴대학을 거쳐 컬럼비아대학 조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한 뒤 78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하며, 인생의 궤도를 달리했다.
정 총장에게 미국 유학은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기다. 실제로 정 총장은 경제나 교육 문제에서 현재의 소신을 갖게 된 것은 바로 미국 유학이 결정적이었다는 심정을 자주 털어놓았다고 한다.
서울대 교수로 돌아온 뒤 정 총장은 정부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독설가’로 변신했다. 정 총장은 86년 전두환 정부 시절 개헌을 요구하는 대학 교수들의 서명 운동을 주도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대 ‘간판 교수’로 자리잡은 정 총장은 노태우 정권 때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시론을 통해 정부의 경제 정책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90년 3월에는 <동아일보>를 통해 “금융실명제를 조속히 실시하라”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펴 적잖은 주목을 받기도 했다.
YS의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비판의 수위를 한층 높였다. 정 총장은 일부에서 ‘반YS경제학자’의 선두주자로 꼽힐 만큼 문민정부의 경제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한 인물이었다. 실제 정부의 경제 정책과 반대되는 파격적인 주장으로 YS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95년 <중앙은행론>이라는 책을 통해 한국은행 독립론을 펴 당시 재경원 관계자들과 한바탕 입씨름을 벌였고, YS정부의 무리한 구조조정 정책에 대해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며 YS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문민정부의 부실 금융기관 처리에 대해서도 “썩은 사과를 멀쩡한 사과와 한 바구니에 넣지 마라”는 ‘대담한’ 비유로 정부 관계자들을 아연실색케 했다고 한다. YS가 세계화정책을 기치로 내걸자 곧바로 “개념조차 모호한 세계화는 제2의 성수대교를 잉태한다”는 감정 실린 직설화법으로 이를 맞받아쳐 YS가 격노했다는 일화도 들린다.
DJ정부 때도 소신 발언은 계속됐다. 특히 지난 2000년 4월에는 “DJ정권의 부패 가신과 경제 관료들을 모두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해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 분야의 수장을 맡기고자 ‘삼고초려’했던 김대중 대통령의 심기를 뒤흔든 바 있다.
정 총장은 정부의 정책과 무관한 파격 발언에도 ‘일가견’이 있다. 97년에는 공대 출신을 은행원으로 뽑아야 한다는 이색 논리로 주목을 끌었으며, 지난 2001년 7월에는 삼성 반도체 부분이 적자로 전환했다고 폭탄 발언, 이 때문에 주식시장이 한동안 술렁거린 전례가 있다.
▲ 정운찬 서울대 총장 | ||
특히 교육 문제에 관해서는 노 대통령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사실 정 총장은 교육 문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지난 93년 처음 언급했다.
정 총장은 당시 <한국일보> 시론을 통해 ‘중·고교 입시를 부활하자’고 주장했다. 그 후 10년여 넘도록 대학 본고사 시행 등 소위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정책에 남다른 소신을 드러냈다.
노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대학 평준화를 전제로 하는 대학 개혁론에 힘을 실어주면서 두 사람의 대결은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대선 직후만 해도 노 대통령과 정 총장은 서로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결코 적잖은 인식의 골이 벌써부터 존재했던 셈이다.
정 총장을 주변에서 접한 대학이나 교육계 관계자들은 이번 입시안 파문처럼 정 총장이 정부·여당과의 대립에서 오는 ‘출혈’을 감수하고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배경을 정 총장만의 독특한 ‘엘리트적인 사고’에서 찾고 있다.
정 총장은 사석에서 “(나 자신이) 돈과 소위 ‘백’이 없어 구석으로 밀려났던 과거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면서, 자연스레 각 분야에서 최고 능력의 인재 선별을 중요시하는 엘리트주의를 신봉하게 됐다”는 말을 자주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정 총장의 스타일상 수재와 평범한 학생을 똑같이 대우하려는 대통령과는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정 총장이 학자이면서도 매우 ‘정치적’인 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실제 지난 2002년 총장 선거 때나 김민수 미대 교수의 복직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정 총장은 제3자에게 자신의 논리를 설득시키는 부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입시안 논란에서도 정 총장은 “교육은 교육자에게 맡기자”, “교육이 정부 관리 손 안에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는 식으로 사회적 명제를 자주 어필해 여론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재능’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일단 사태가 수습 국면을 맞으면서 정 총장이 이번 입시안 발표 파장을 어느 정도 선에서 봉합할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그리고 정 총장의 향후 행보에 대해서도 비상한 시선이 쏠리고 있다.
일각에서는 정 총장의 나이가 이제 환갑에 이르고 있고, 내년 7월 총장 임기가 끝난다는 점에서 ‘현실 정치 참여’ 등 또 다른 거취를 예상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정 총장이 그간 교수가 정치 참여하는 부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고, 사석에서도 “교수가 연어처럼 한 번 나간 집을 되돌아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등 나름대로의 철학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큰 변화 없이 총장 임기를 마치지 않겠냐는 의견이 대세다.
야구광이라는 소문이 자자한 정 총장. 특히 두산 베어스의 광팬임을 자처한다는 그가 팀의 마스코트인 곰의 모습처럼 향후에도 특유의 뚝심과 소신을 지켜나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