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학수 삼성구조본 부회장이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지난 9일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지난해 3월4일 대검에 소환된 모습.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대한민국 첫 번째는 대통령이고, 두 번째는 이건희 회장, 세 번째가 삼성 구조조정본부장 이학수 부회장이라는 얘기다. ‘리앤리’의 앞의 리는 이건희 회장이고, 뒤의 리는 이학수 부회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그는 전문 경영인으로 삼성 내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다. 그룹 회장실에서 발전한 구조조정본부를 통해 그룹 경영을 하는 삼성식 ‘신권(臣權)정치’의 꼭대기에 그가 있다. 물론 ‘주군’이자 오너인 이건희 회장에게 무한한 존경과 충성을 바치면서 말이다.
그의 이런 독특한 위치는 최근 공개된 안기부 도청문건, 이른바 ‘X파일’ 녹취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이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주미대사와 함께 이건희 회장의 주요한 조언자라는 게 드러났다. 물론 이 부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녹취록에 따르면 홍 대사는 이 부회장에게 “비서실에서 판단하세요. 나는 비서실에서 주는 대로 잘 처리할테니까요”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목에서 이 부회장은 한 전직 경제 부총리를 가리키며 “그 양반은 사실 내가 결정적으로 밀어줬거든요”라고 말했다. 이런 대목은 이 부회장의 삼성 내 위치와 사회 전반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가늠하게 해준다.
경남 마산 출신으로 부산상고를 나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의 2인자 소리를 듣는 이학수라는 인물의 스펙트럼이 일반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강력하다는 얘기다.
삼성그룹이라는 거대 선단의 함장은 이건희 회장이다. 그 함장을 보좌하는 조직은 구조본이고, 구조본의 중심엔 재무팀이 있고, 그곳엔 이 부회장이 있다.
삼성전자쯤 되는 거대 계열사는 어느 정도 자율성이 보장되지만 중소형 계열사 사장에게 구조본 재무팀의 임원급은 상전(?) 다름없다. 미리 스케줄도 조정하고, 현안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다.
이런 힘은 이건희 회장에게서 나온다. 지난 94년 신경영 선언 뒤 임원들을 6개월간 현업에서 물러나게 하고 재교육을 보내자 삼성 내부가 술렁거렸다. 그러자 이 회장은 “걱정마, 이학수도 보낸다”라고 사태를 진정시킬 정도였다. 이 회장이 이학수 부회장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것을 삼성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즉각 효과를 보였다.
이 부회장에 대한 이 회장의 신뢰는 두 번의 극적인 순간이 있었다.
첫 번째는 지난 94년 11월. 이 회장은 당시 비서실에서 일하다가 삼성화재 부사장으로 내려간 이 부회장을 큰형(이맹희)의 아들(이재현) 몫인 제일제당(현 CJ)에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파견했다. 부임 이후 이 부회장은 이재현 회장쪽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이 사태는 나중에 장충동 이재현 회장 자택에 대한 감시카메라 설치 등이 외부에 크게 알려지면서 양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물론 이 부회장은 이 회장의 대리인이었고 뒤에 이 회장은 ‘조카를 도와주기 위해 한 일이었는데 오해를 해 서운하다’는 요지의 해명을 했다.
결국 이 부회장은 95년 2월 삼성화재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복귀했다. 이후 사장까지 승진한 뒤 96년 8월 비서실 차장(사장)으로 ‘금의환향’했다. 이병철 회장-소병해 비서에 버금가는 이건희 회장-이학수 비서 시대가 열린 것이다.
두 번째는 지난 외환위기 때 구조본 재무팀과 기획팀의 내부 논리싸움에서 재무팀이 승리하면서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해 삼성 구조본에서 재무팀 우위가 확립하게 된 사건이다. 이후 구조본 재무팀의 이학수 부회장-김인주 사장 라인은 실세 중의 실세로 통하게 됐다.
사무실에 잘 안 나오는 편인 이 회장은 자신의 개인 집무실인 승지원이나 자택, 또는 해외 출장지에서 열흘이나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 부회장을 불러 현안에 대한 보고를 받고 결재를 한다. 당연히 세세하게 따지는 스타일이 아닌 믿고 맡기는 스타일이다. 그가 이 회장에게 통하는 공식적인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이 회장의 처남인 홍 대사도 이 부회장에게 “이 얘기는 일본에 가서 이 회장에게 꼭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할 정도다.
이 회장의 신임을 받는 이 부회장은 구조본을 통해 그룹을 장악하고 있다. 이 부회장의 오른팔격인 김인주 구조본 회장실 사장은 재무팀에서 이 부회장과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사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포스트 이학수 체제에서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구조본은 삼성의 출세코스로도 불린다. 삼성카드의 유석렬 사장, 삼성중국 본사의 박근희 사장, 에스원의 이우희 사장, 삼성재팬의 이창렬 사장, 삼성 SDS의 김인 사장, 삼성중공업의 김징완 사장 등은 모두 구조본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다. 삼성의 고위급 임원 출신 A씨는 “최근 4~5년간 삼성의 50여개 계열사 중 30여개사의 대표이사가 바뀌었는데 대부분 구조본에서 낙점한 인사들”이라고 지적했다.
구조본, 그 중에서도 특히 재무팀의 목소리가 강해졌다는 게 외환위기 이후 삼성 그룹의 특징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삼성의 신수종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구조본 기획팀의 퇴각이다.
자동차 사업에 진출해 르노와의 합작을 통해 SM시리즈를 생산하고 기아차 인수를 추진했던 삼성은 급작스레 외환위기가 터지자 신규 진출 분야였던 자동차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자동차 사업 퇴각론의 선두주자는 재무팀이었고, 이학수 부회장이었다.
▲ 이건희 삼성 회장 | ||
이 과정을 통해 이 부회장과 구조본 재무팀의 영향력은 기획팀과 재무, 인사를 아우르는 구조본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됐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삼성은 요즘 ‘구조조정만 했지, 차세대 신수종 사업이 뭐가 있냐’는 지적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이런 고민이 깊어지는 형국에 등장한 ‘X파일’ 공개는 사태를 한층 꼬이게 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2002년 대선자금 수사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지난 봄 부처님오신날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하지만 ‘이미 끝났던’ 2002년 대선자금 수사가 ‘X파일’ 공개로 다시 시작될 형편이다. 때문에 이 부회장이 이번 수사가 끝난 뒤 진퇴 문제가 다시 불거지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지난 대선 직후의 대선자금 수사 때도 이런 얘기가 나왔었지만 그때 삼성쪽에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부인했다. 재계의 다른 그룹에서 새정부 출범과 함께 물러난 부산상고 출신 임원들을 재발굴해 쓰는 판에 부산상고 출신 중 노무현 대통령 다음으로 큰 인물인 이 부회장을 내칠 이유도 없긴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럴까 하는 시각이 제법 많다. 이미 노 대통령도 임기의 반환점을 돈 상태이고, ‘X파일’을 통해 삼성 수뇌부의 핵심 인물로 드러난 이 부회장과 홍 대사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게 상세한 보고를 받는 정황이 드러난 이건희 회장을 검찰청 포토라인에 세우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이 회장은 검찰에 출두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삼성으로선 이 상황을 전환시킬 만한 카드가 필요하다.
오너인 이 회장이 이 국면을 전환시킬 카드는 몇 개 없다. 그 카드 중엔 이 부회장의 진퇴가 걸려있다. 이 부회장이 이 회장의 분신이라고 알려졌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삼성은 준비를 많이 했다. 일반인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국제적인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대검 출신의 이종왕 변호사를 영입한 것도 지난해 8월이었다. 본인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X파일’을 근거로 삼성을 ‘협박’했다는 사람들이 움직인 것은 99년부터다. 그때부터 삼성 수뇌부에선 이 일을 알고 준비했다는 얘기다.
이번 사건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된 MBC의 취재가 본격화된 것도 지난 겨울부터. 삼성이 ‘국제경쟁력 확보’와 거리가 있어 보이는 중수부나 특수부 검사 출신들을 대거 영입한 것도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삼성이 보강된 맨파워로 이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지난 4년간 내부적으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해봤을 것은 불문가지. 때문에 삼성이 ‘X파일’ 국면이 끝난 뒤 내놓을 카드가 주목받고 있다.
이재용 상무에 대한 후계구도, 이재용씨의 에버랜드 주식 확보 과정에서 나타난 끝도 없는 소송, 그룹의 양대기둥인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의 소유지배구조 문제 등 산적한 현안이 끝도 없는 상황에서 이재용 체제를 인큐베이팅해야 할 문지기 이학수 부회장이 큰 부상을 입었고, 외풍을 막아줄 병풍 노릇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홍석현 대사도 상처를 입었다.
이학수 체제가 지속될지, 김인주 사장 등 구조본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 포스트 이학수로 등장할지 삼성의 카드가 주목받고 있다.
이와 관련, 그동안 삼성의 현안에 대해 원칙적인 자세로 ‘서슬이 퍼런’ 모습을 보이던 김인주 사장이 최근 언론사 등 외부접촉시 그간에 보여줬던 것과는 달리 유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