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4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서재응이 공을 던지고 있다. 최근 잇단 승리에 대해 서재응은 컨디션이 매우 좋은 데다 부담을 버리고 여유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로이터/뉴시스 | ||
‘나이스 가이’란 별명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서재응(28·뉴욕메츠)과 지난 24일 오후(한국시간)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날 애리조나와의 원정경기에 선발 출장을 앞두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긴장감보다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빨리 내일이 왔음 좋겠다’는 느낌이 전해질 정도였다. 24일 메츠는 14-1로 애리조나 타선을 완전 무너트렸고 서재응이 선발로 나온 25일 경기에선 18-4란 엄청난 스코어로 승리를 챙겼다.
3개월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빅리그 복귀 후 눈부신 호투를 거듭하고 있는 서재응에 대한 찬사는 끊이질 않는다. ‘컨트롤 아티스트’ ‘아트 피칭’ ‘제구력의 마술사’ 등 수식어조차 화려하다. 그러나 전화를 통해 만난 서재응은 오히려 담담하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2003년 루키 신분으로 9승을 챙기며 스타플레이어로 떠오른 뒤 잠시 호흡을 고르다 올시즌 여유있게 부활한 서재응과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경기를 마치고 방금 호텔로 돌아왔다는 서재응은 그곳에 사는 광주일고 출신의 후배가 찾아왔다며 더욱 신나했다. 웬만큼 이름이 알려지고 기자들의 집중 취재 대상으로 떠오른 선수라면 낯가림도 심한데 서재응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기자와 오랜만에 전화 통화를 한 서재응은 최근의 상승세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솔직한 심경을 나타냈다.
―요즘 네티즌들이 ‘서재응 찬가’를 부르는 것 같다. 2003년 9승을 올릴 때와 지금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
▲2003년엔 선발로 한 자리를 차지해서 생활했고 지금은 ‘임시직’이라는 게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한 2003년의 가을은 ‘방학’이었지만 올 시즌엔 가을에도 야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 몰라 많이 기대된다. 그래서인지 2003년보다는 조금 더 부담스럽다.
―오늘(8월24일) 메츠가 애리조나를 상대로 14타점을 올렸다. 내일 등판인데 좀 불안하진 않나. 어떤 네티즌들은 오늘 올린 점수가 내일에도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는 글도 올려놓았던데.
▲솔직히 말해서 나도 걱정이다(웃음). 1-0과 14-1과 이기는 건 똑같지만 팀 분위기에 있어선 천지 차이다. 오늘 더그아웃 분위기가 한 마디로 ‘업’돼 있었다. 내일도 이래야 하는데…(25일 경기에서 메츠는 전날보다 4점을 더 보태 18점을 올렸다).
―야구 전문가들은 올시즌 호투 비결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쏟아내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상승세 비결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컨디션이 무척 좋다. 컨디션이 좋을 때와 좋지 않을 때와는 굉장히 다르다. 전문가들은 구질과 제구력이 좋다고들 말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컨디션이 좋아서 누구와 상대해도 좋은 결과를 내는 것 같다. 이 부분은 (스프링)캠프할 때부터 그랬다. 올해는 왠지 뭔가가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2003년과 비슷한 컨디션이었으니까. 모든 밸런스가 잘 맞아 떨어졌다.
―그러다 곧장 마이너리그로 떨어졌는데 컨디션이 좋았던 상태라 실망도 컸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올초 한국에서 미국으로 들어가면서 난 마음을 비웠다. 아니 마이너로 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사실 2004년에 마이너로 떨어졌을 땐 굉장히 실망했고 슬럼프도 겪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이미 선발진이 다 채워진 데다 피칭코치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2004년 귀국하면서 구단에 내 모든 걸 다 말하고 나온 터라 난 더더욱 비빌 데가 없었다. 올해만 버티면 마이너로 내려가는 데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탓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이너 생활을 즐기려 했다.
―흔히 마이너리그하면 ‘눈물 젖은 빵’이나 ‘눈물 젖은 햄버거’로 생활의 단면을 표현하는데 해당 사항이 있나.
▲(웃으면서)울면서 빵을 먹진 않았다. 빵 먹다가 목이 막혀 눈물이 난 적은 있지만 하하. 마이너리그 동안 승부에 대한 부담을 떨치고 내 구질을 다듬고 완성시키는 계기로 삼는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3개월간의 ‘하류 인생’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다. 메이저는 실전투구 위주라면 마이너는 연습투구 위주였다. 구질을 만들고 그 구질이 내 볼이 돼 가는 걸 즐기면서 연습 경기를 재미있게 치러냈다.
―일명 ‘커터’라 불리는 컷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로 통하는 스플릿 핑거드볼이 이번에 새로 선보인 구질인데 이런 구질을 자신한테 잘 장착시키는 남다른 노하우가 있다면.
▲스플리터는 작년부터 계속 연습했던 구질이고 커터는 올해 캠프에서 새로 배웠다. 특히 마이너리그에서 새로 만난 댄 왓슨 투수 코치의 가르침이 컸다. 특별한 노하우는 없다. 구질을 개발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데 다른 선수들보다 시간이 적게 걸린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지난해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피터슨 코치가 새로운 구질을 개발해야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게 옳은 판단이 아니었나? 당시엔 피터슨 코치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결과적으론 그 사람 말이 맞는 것처럼 됐다. 그러나 만약 내 구질이 체인지업 외에 슬라이더도 좋았다면 다른 볼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슬라이더가 밋밋해지면서 안타를 두들겨 맞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예 슬라이더를 버리고 다른 구질을 개발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그래서 구질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현재 빅리그에 있지만 메츠의 선발진이 워낙 두터워 하루하루가 ‘생존 게임’을 벌이는 듯한 분위기다. 스트레스가 심하진 않나.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진짜 부담이 없다. 그것은 마이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9월이 되면 40인 로스터가 운영되기 때문에 그때 올라가면 된다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스티븐 트랙슬이 재활 후 빅리거에 합류하자 날 상당히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는데 정작 난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감독이라면 당연히 트랙슬을 써야 한다. 그 친구 몸값도 그렇고 조건도 그렇고 팀에서 밀고 있는 선수를 쓸 수밖에 없다. 솔직히 난 마이너에 떨어지는 걸 걱정하기보다는 팀이 플레이오프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나로 인해(내 실투로 인해) 팀 분위기가 망쳐질까봐 그게 더 걱정스럽다.
―인터뷰 내내 ‘마음을 비웠다’ ‘부담이 없다’는 얘기를 계속 했다. 마치 산에서 도 닦고 내려온 사람처럼 보인다.
▲올시즌이 이전 시즌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라면 위기 상황에서도 쫓기지 않고 침착해졌다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상황만 보였는데 지금은 그 이후의 일까지 예상해서 대처할 수 있다. 만약 2아웃에 주자가 1,3루에 나갔는데 타석에 8번타자가 나왔다면 이전의 서재응은 그 타자를 잡으려고 욕심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굳이 그 타자와 승부를 하지 않아도 9번타자로 상대 투수가 타석에 서기 때문에 그 투수와 승부를 벌이려고 머리를 굴리게 된다. 즉 앞에 있는 타자뿐만 아니라 다음 타자, 그 다음 타자까지 염두에 두고 승부를 즐긴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까 실점도 줄고 타자들을 ‘요리’할 수 있는 자신감도 생기게 됐다.
▲ 서재응 선수 | ||
▲내가 마이너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어느 경기든 7이닝 이상, 투구수도 백개 이상을 넘기는 거였다. 2004년 선발투수가 5이닝을 넘기지 못한다는 비난에 시달린 탓에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의식한 7이닝 이상이 나한테는 숙제였다. 결국 13게임 연속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면서 안정적인 마운드를 운영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메이저리그 복귀가 꿈이 아니었다. 내 목표는 다른 팀에서 날 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투구를 했다. ‘플레이오프를 눈앞에 두고 있는 뉴욕 메츠의 마이너리그에 나 같은 괜찮은 선수도 있으니 제발 좀 날 데려가 다오’ 하는 심정이 훨씬 컸다. 그래서 정말 마운드에 오를 때는 독해졌다. 그들 눈에 띄려면 잘 던지는 것 빼곤 내 소원을 이룰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빅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지금도 트레이드를 원하나.
▲그렇다. 뉴욕 메츠라는 빅 네임을 갖고 있다는 건 선수한테 행운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처럼 그리 썩 잘하지 않는 선수 입장에선 좀 부담스런 빅 네임이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는 실력의 1백%를 발휘하기 어렵다. 난 여전히 트레이드되길 원한다. 지금처럼 오락가락하는 선발이 아닌 붙박이 선발로 자리에 대한 부담 없이 맘껏 공을 던질 수 있는 팀으로 옮겨갔음 좋겠다. 그런 팀에서 더욱 단단해져서 몸값도 올리고 날 쉽게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 팀에서 생활하고 싶다.
―올시즌 이렇게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자리에 대한 부담이 대단한 것 같다.
▲자리에 대한 부담보다도 내년에도 메츠가 5선발 체제로 간다면 난 불펜 투수로 밀려날 수도 있다. 난 다른 투수에 비해 몸값이 싸고 동양인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혹시 시즌 초 마이너리그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한국 복귀를 없던 일로 만들었던 결정에 대해 잠깐이라도 후회해 본 적이 있었나.
▲와이프랑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나눴다. 곧 2세도 태어나고 실질적인 가장을 맡은 나로선 고민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와이프는 ‘있는 대로 살자’면서 국내 복귀를 만류했다. 이미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기 때문에 힘들게 결정한 부분에 대해선 미련을 두지 말자 라고 위로해 줬다. 후회보다도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게 있다. 내가 들은 말 중에서 기아의 한 관계자가 ‘서재응이 이번 기회를 놓치고 내년에 온다고 하면 절반도 못 받을 것’이라고 한 부분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만약 그런 말만 듣지 않았어도 기아행을 강력하게 추진했을 것이다. ‘그래 좋다! 당신들은 날 볼품 없는 선수로 평가절하했지만 내가 어떤 선수인지, 내가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는 절박한 오기가 날 다시 세웠다.
―딸 혜린이(생후 1개월)가 태어나면서 생활에 많은 변화가 생겼을 것 같은데.
▲일단 술을 안 마신다 하하. 그리고 손을 자주 씻는 버릇이 생겼다. 밖에 나와도 습관적으로 손을 씻는다. 그리고 이건 좀 불편한 현상인데 깊이 잠들지 못한다. 새벽에 아기가 깨서 울면 와이프랑 같이 일어나게 된다. 지난 번 워싱턴전을 앞두고 잠들기 전에 혜린이한테 이렇게 부탁했다. “혜린아, 낼 아빠가 던지는 날이니까 새벽에 울면 안돼. 아빠 볼 잘 던지라고 잘 자야 해”라고 말했는데 그날 처음으로 새벽에 깨질 않았다. 결국 8이닝 동안 1실점하며 승리를 챙겼다. 두 시간마다 깨는 아이가 신기한 반응을 한 것이다.
―혜린이 엄마인 이주현씨를 가리켜 ‘약혼자’가 아닌 ‘와이프’라고 말하는 소리가 참 듣기 좋다. 혼인 신고는 했나.
▲아직 못했다. 결혼식 올리고 하려 했는데 혜린이 때문이라도 혼인신고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아내한테도, 아이한테도 많이 미안하다.
―인터뷰 내내 어떤 연륜과 여유가 느껴졌다. 아이도 태어나고 야구도 잘 돼서 그런지 참 편안해 보인다.
▲마음을 비우니까 여유가 생기더라. 힘들 땐 아이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스린다. 나이도 먹고 미국 야구에 대해 적응도 되고 경험도 쌓이면서 지금처럼 안정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 같다. 예전엔 내 마음에 ‘송곳’이 많았다. 지금은 그 ‘송곳’들이 두루뭉실해진 것 같다. 남들 탓하기보단 내 살기에도 너무 바쁘니까. 내 딸,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살지 그런 거 생각하기에도 벅차다보니 마음에 ‘송곳’을 담아둘 공간이 없다.
너무나 멋진 말들과 솔직함으로 오랜 인터뷰를 재미있게 풀어낸 서재응이 올시즌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많은 ‘선물’들을 안고 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인천공항에 그를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2003년처럼 엄청나게 몰려들기를 바란다. 물론 서재응은 신경쓰지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