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3일 천정배 법무장관이 검찰에 대한 수사 지휘권을 발동한 후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의사당으로 들어서고 있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이에 대해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약 열흘 동안 차기 법무 수장의 하마평만 무성하자 당시 검찰 관계자들은 보는 기자들마다 붙잡고 “차기 장관으로 누가 올 것 같으냐”며 “혹시 천정배 의원이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 섞인 질문을 퍼부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만약 천 의원이 법무장관이 되면 강금실 장관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큰 파란이 대검에 몰아칠 것”이라고 우려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이 관계자의 예언은 불과 4개월 만에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렇다면 당시 검찰 내에서는 천 장관의 임명을 왜 그렇게 우려 섞인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천 장관이 평소 검찰에 대해 탐탁찮은 시선을 갖고 있다는 인식이 우선이었다. 이는 천 장관의 독특한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어린 시절부터 목포가 낳은 천재로 불리던 천 장관은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기까지 목포중·고 시절 한 번도 수석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1972년 대학입시에서 전국 차석을 차지했고 그해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했음은 물론이다.
주변의 기대대로 그는 전형적인 모범생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76년 사시 18회에 무난히 합격했다. 그는 사법연수원에서도 3등을 했다. 한마디로 판사든 검사든 그가 선택만 하면 그만인 상황이었다.
YH 사건, 10·26 사건, 12·12 군사 쿠데타, 5·18 광주항쟁 등의 격랑기 속에서도 그는 오히려 예비 판사를 꿈꾸는 느긋한 심정으로 공군 법무관으로서 한가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인생 경로를 바꾼 계기는 군장교 시절 읽은 황석영의 실화 소설 <어둠의 자식들>이었다고 그는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 <꽁지머리 묶은 인권변호사>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
‘<어둠의 자식들>로 인해 은연중에 배어 있던 나의 엘리트 의식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 소설 가운데에서도 특히 내 시선을 오래 붙잡아 놓은 대목은 주인공과 그의 친구 태봉이가 검사에게 (모진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는 동안 일어난 일을 묘사한 대목이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거친 말투로 “제미랄, 공부 못 배워 검사 안 되길 다행이지”하고 쏘아붙이는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이 대사 한 마디는 내 마음에 지금까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검찰이 천 장관을 부담스러워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었다. ‘천·신·정 트리오’ 가운데 한 명인 천 장관은 참여정부 개혁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정치인이었다. 특히 천 장관은 지난 2003년 국정감사 때 강금실 장관을 향해 “검찰 개혁이 미미하다”고 강하게 질타하며 소위 ‘검찰개혁 10대 과제’를 내놓기도 했다. 이 내용은 검찰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어서 당시 검찰의 내부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정치인 장관’ 천정배의 다분히 정치적인 행보는 마침내 임명 두 달 만인 8월에 터졌다. 천 장관은 “적정하고 단호한 검찰권 행사를 위한 지휘 감독 차원에서 필요하다면 구체적인 사건에도 지휘권을 행사해 나가겠다”고 밝힌 것. 이에 대해 김 총장이 다음날 “설사 지휘가 내려오더라도 비합리적인 수사 지휘까지 승복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사실 당시 천 장관의 발언에 대해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는 것 같다”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 쪽은 오히려 일선 검사들이었다. ‘구체적인 사건’이라는 용어를 직접 쓰면서까지 지휘권 행사를 언급한 것에 대해 “안기부 ‘X파일 사건’, 대상그룹 비자금 사건 봐주기 논란 등 민감한 현안이 불거진 시기에서 자칫 장관이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모습으로 비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그것이다.
천 장관의 정치성이 더욱 부각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새 법무장관으로 임명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 때문이었다. 천 장관은 8월23일 국회에서 “X파일 사건에 대해 검찰은 사회의 강자 앞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강력한 검찰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의 97년 대선 비자금 의혹 수사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노 대통령이 “97년 대선후보 조사는 지금 시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을 피력하면서 상황이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자칫 대통령과 법무장관의 의견 충돌로 비화될 뻔한 것이다. 그러나 천 장관이 발 빠르게 “반드시 수사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는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진화됐다. 당시 천 장관의 입장 변화는 몇몇 언론들에 의해 “변호사와 의원 시절에 보여줬던 그 강직한 원칙론은 다 어디로 갔느냐”며 조롱당하기도 했다.
이번 수사지휘권 발동 파문에 대해 일선 검사들이 “장관의 정치적 의도에서 나온 지휘권을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반발한 것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애당초 천 장관이 법무장관직 수행을 통해서 현재의 이해찬 총리, 정동영 통일장관, 김근태 보건복지장관 등에 이어 여당의 새로운 대선주자로 부각될 것이란 추측이 강하게 나돌았던 것. “전임 강금실 장관이 검찰의 인사에 칼을 대서 각광을 받았다면, 천 장관은 수사권에 칼을 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서울 지역의 한 소장파 검사는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강정구 교수의 불구속 수사가 옳다는 장관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는 찬성할 수 없다”면서 “법에 나와 있는 장관의 수사지휘권은 검찰이 지나치게 권력을 남용할 때 그것을 통제하는 장치인데, 이번 경우는 그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는 “어쨌든 장관으로서는 이번 파문을 통해 ‘실세 장관’이라는 대국민 이미지를 한껏 부각시킨 셈”이라고 덧붙였다.
검찰 일각에서는 “강 교수 사안이 이렇게 검찰 조직 자체를 크게 뒤흔들 만큼 대단한 사안인지 정말 모를 일”이라며 천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어디선가 ‘현 정부가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분위기 조성을 하고 있다더라’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냥 웃어넘긴 적이 있는데, 장관이 막상 실제 강경 조치를 취하는 것을 보면 단순히 웃어넘길 사안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 장관의 지나친 자기 소신 관철 고집이 예상 외의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지적도 있다. 수사지휘권 발동을 하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천 장관의 남다른 외고집과 개인 소신에 대한 강박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은 자신의 자전적 에세이에서도 등장한다.
‘나는 모범생이었지만 알고 보면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려는 기세도 대단히 컸다. 무엇보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것이 싫었다. 한번은 공업 시간에 “공공시설에 화장실 비율은 남자와 여자가 4대 1, 소변기와 대변기는 4대 3으로 배치한다”는 대목을 외워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 관심 밖의 지식이었고, 따라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부였다.
나는 그날로 공업책을 덮어버렸다. 그래서 내 고등학교 성적표 공업란에는 난데없이 ‘양’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 덮어버린 공업책은 대학예비고사 하루 전에 다시 펼쳤고, 그날 밤을 꼬박 새워 공부를 했다. 그리고 만점을 받았다. 이는 이미 공업책을 덮을 때 작정한 바였다.’
지금껏 알려진 천 장관의 고향은 목포지만 실제는 목포에서도 떨어진 외딴 섬(암태도)이다. 촌뜨기 섬 소년 천정배는 그러나 제법 넓은 땅을 소유한 조부와 공무원이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또래에 비해서는 단연 두드러진 아이로 자라났다. 그 스스로 고백했듯이 학창시절부터 엘리트 코스만 밟아왔던 천 장관의 자신감과 자기 소신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게 판검사 임명장을 받지는 않겠다”며 판사 임용 제의를 과감히 뿌리쳤던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천 장관은 자신의 법무장관 취임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만큼 검찰 개혁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은 셈이다. 그의 야심이 단순히 검찰 개혁에 그치는 것인지, 아니면 또다른 더 큰 야망이 도사리고 있는지 향후 천 장관의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