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일 삼성 라이온즈가 두산 베어스를 물리치고 2005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선동열 삼성 감독은 감독 부임 첫 해임에도 정규시즌에 한국시리즈까지 제패해 ‘국보’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19일,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 4차전이 열린 잠실야구장 3루 더그아웃에는 경기 전 많은 기자들이 선동열 감독을 에워쌌다. 선 감독은 기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앞둔 ‘장수’보다는 사랑방 좌담회를 갖는 듯 시종 여유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리드하며 다양한 스토리를 쏟아냈다. 화제는 당연히 4차전 승리로 모아졌다. 선 감독으로선 하루 빨리 승부를 마무리 짓기를 소원하지만 팬들 입장을 외면할 수 없는 그였다.
그러나 결국 한국시리즈는 4차전으로 끝났다. 승부가 너무 일찌감치 정해지는 바람에 우승 세리머니가 다소 싱겁긴 했지만 선동열 감독은 초보 감독 최초로 정규 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달성한 신기록을 세웠다.
경기 시작 전 기자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털고 일어난 틈을 이용해 선동열 감독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다소 대답하기 애매할 수도 있지만 선 감독은 막힘이 없다. 어떤 질문을 해도 ‘노 코멘트’라고 말하는 걸 듣지 못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김경문 감독이라면 어떤 심정일 것 같나.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니겠나. 오늘 못 이기면 내일이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거 다 해보려 들 것이다. 대구에서 2연패 당한 후 잠실 홈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상당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3차전에서 그 기회를 잡지 못하더라. 4차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내 입장보단 훨씬 어려운 상태에서 게임을 치를 것이다.
―정규리그 1위로 일찌감치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2·3·4위팀이던 두산, 한화, SK 중 어느 팀이 올라오길 바랐는지 솔직히 말해 달라.
▲두산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전문가들이 우리 팀보다 두산의 우세를 예상할 만큼 전력이 좋았다. 역시 내 예감대로 두산이 올라왔는데 이렇게 빨리 결정 날지는 몰랐다. 전문가들이 좀 곤란했을 것 같다.
▲ 한국시리즈 우승 후 우수감독상을 수상한 선동열 감독에게 배영수가 샴페인을 쏟아붓고 있다. | ||
―기자들 사이에서 선동열 야구를 ‘독한 야구’로 평한다. 정말 그런가.
▲(허허 웃으며) 난 별로 독하지 않은데…. 단기전에서 페넌트레이스와 똑같은 플레이를 할 수는 없다. 한국시리즈를 해보니까 시리즈 1게임과 정규리그 1게임과는 비교가 안 되더라. 오죽했으면 경기 끝나고 늦은 저녁을 먹으면 침대에 눕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졌겠나. 그만큼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독하다기보단 짧은 기간에 승부를 내야 하다보니 집중력 있는 야구를 펼치려 했다.
선 감독은 수석코치 신분으로 한국시리즈를 치렀던 지난해와 사령탑에 올라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모든 책임을 감독이 져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말 한 마디, 순간의 판단력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부분들이 참으로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국시리즈 동안엔 단 한 번도 선수단 미팅을 하지 않았단다. 선수들한테 경기 중 사인 외에는 한 마디도 지적을 하지 않으며 선수들이 알아서 게임을 풀어나가길 바랐다고 한다. 초보 감독으로선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야구인들은 선 감독을 가리켜 남 부러울 게 없는 감독이라고 말한다. 선수 생활 때부터 감독인 지금까지 모든 걸 다 이루고 있는 게 아닌가.
▲선수 생활은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중간 중간 고비는 있었지만 할 거 하고 누릴 거 누려가며 살았다. 지도자는 좀 다를 것 같다. 겨우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인데 앞으로 남은 많은 시간들을 어떻게 엮어갈지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감독은 성적으로 말한다. 성적이 안 좋으면 제 아무리 선동열이라도 별 수 있겠나. 그냥 잘리는 거다.
―정규리그를 치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나.
▲지난 6월이 제일 괴로웠다. 시즌 시작하고 4~5월까진 성적이 아주 좋았다. 5할 승부를 이룰 정도였으니까 투타가 균형적으로 안정감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6월25일 SK한테 패한 뒤 무려 6연패로 곤두박질쳤다. 감독만이 절감하는 연패의 쓰라림, 그때 새삼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선수를 보는 남다른 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오승환, 김재걸 등을 기용하며 한국시리즈의 ‘깜짝 스타’로 탄생시켰다. 비결이 뭔가.
▲김재걸은 장점이 많은 선수다. 어떤 포지션이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박진만보다 더 잘하는 부분도 있다. 지금까지 운이 없었던 것이다. 작년에 우리 사장(김응용 사장)이 감독이었을 때 재걸이가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다. 류중일 코치가 재걸이를 내보내면 우스갯소리로 “너(류 코치) 재걸이랑 친척이라도 되냐?”고 면박을 줄 만큼 재걸이를 제쳐놓았다. 그러다 올시즌 기회를 잡은 것이다. 오승환도 신인이지만 재질이 많은 선수다. 내가 야구할 때는 선발도 하다 마무리도 하고 중간도 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경계를 그어놓지 않나. 마무리로선 최고의 투수라고 칭찬해 주고 싶다.
▲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뒤 삼성 선수들이 선동열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김재걸(아래왼쪽), 오승환(아래 오른쪽). | ||
▲그분은 항상 선수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어 했다. 후원회로부터 3억엔 정도를 지원받는데 대부분을 선수들 용돈으로 썼다. 게임에서 이긴 날은 잘 뛴 선수 몇 명을 방으로 불러 3천만원, 5천만원, 혹은 1억원대의 선물을 안겨주곤 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자신이 타던 벤츠600을 1년 만에 다른 선수에게 넘겨 줬다. 나도 호시노 감독처럼 그렇게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못한다(웃음).
―한국시리즈를 치르면서 일본에서 경험한 부분들이 큰 도움이 된 편인가.
▲페넌트레이스 때는 많이 참조했다. 그러나 단기전에선 그런 경험을 살리기보단 선수들의 몸 상태를 보면서 전체 경기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선 감독은 일본 생활을 회상하며 능숙하게 구사하는 일본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니치에 입단한 지 3년째 됐을 때 짧은 일본어 정도는 통역 없이 말할 수 있었다. 특히 경기장에서 수많은 팬들에게 일본어로 말하면 그 환호성이 대단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일부러 통역을 데리고 다녔다. 일본어를 할 줄 알았지만 공식 석상에선 가급적 말하길 자제했다. 왜냐하면 그래도 내가 한국의 국보 투수란 타이틀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 감독의 해태 시절 담당 기자로 활동했던 인터넷 신문 의 홍윤표 대표기자는 선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대해 “김응용 사장에 비해 보다 세밀하고 짜임새가 타이트한 편”이라고 정리하면서 “김 감독 밑에서 오래 선수 생활을 하며 이기는 야구를 학습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홍 기자는 또한 “주니치에서 우승도 해봤고 선수로서 최고 경지에 올라봐서 안목이 다르다. 아무래도 우승을 많이 해본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야구 잘하고 카리스마 있고 대인관계 폭넓으며 언론과의 관계 또한 평탄하기만 한 선동열 감독. 아무리 이리저리 쑤시고 뜯어봐도 좀처럼 빈틈이 없어 보이는 그다. 주위에선 한결같이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칭찬을 쏟아내지만 너무 완벽해 보여 오히려 덜 인간적으로 보인다고 말하면 기자가 너무 우기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