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랜드 전경. 기사와 관계 없음.
복도는 어두웠다. 전등 자체가 꼽혀 있지 않았다. 반쯤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을 따라 걸어야 했다. 발은 두꺼운 철문 앞에서 멈췄다.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인기척이 들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대신 “회원이냐”고 묻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앞서 통화를 했다”고 대답하자, 그제야 문이 열렸다.
어두운 조명이 실내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가득했고, 바닥에 놓인 맥주와 양주병에서 알코올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홀에는 천으로 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일곱 개의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가려 놓은 공간도 있었는데, 앞서 문을 열어준 종업원은 ‘VIP룸’이라고 했다. 이날 ‘룸’은 비어있었으며, 홀에 놓인 테이블에서 20여 명의 남성이 각자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지난 10월 11일 오후 10시 40분께, 기자가 찾은 곳은 서울 압구정동에서 운영 중인 한 ‘홀덤바’다. 포커게임의 일종인 ‘텍사스 홀덤(Texas Hold’em)’을 줄여 부른 홀덤에 ‘바(Bar)’를 합쳐 만든 단어다. ‘홀덤방’ 또는 ‘보드방’으로 불리기도 한다.
홀덤바에서는 앞서의 텍사스 홀덤이라는 게임이 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 게임은 5장의 카드를 이용해 가장 높은 배열의 카드를 완성하는 참가자가 이기는 방식이다. 게임이 진행되면서 예상치 못한 역전 승부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 사행성이 높다. 이 때문에 카지노에서도 많이 운영되는 게임이다. 텍사스 홀덤 외에 카드에 쓰인 숫자의 합을 계산하는 ‘블랙잭’과 고스톱 등도 이뤄지고 있었다.
# 현금 없는 ‘도박판’
겉으로는 단지 ‘재미로’ 카드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이날 만난 중년 남성 A 씨도 “술 한잔하면서 지인들과 간단하게 게임도 하려고 종종 찾는다”고 대답했다. 더구나 업장 곳곳에 ‘현금 거래 금지, 적발 시 퇴실조치’라는 안내 문구가 붙어있어, 업장 자체적으로 도박성 카드 게임을 금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테이블 위에 칩은 쌓여 있었지만 현금은 한 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들이 보였다. 테이블마다 다양한 ‘판돈’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1000원부터 시작해 1만 원, 2만 원에 달하는 테이블도 있었다. 칩 역시 색깔별로 금액이 구분돼 있었다. 흰색 칩은 1000원, 초록색은 5000원, 빨간색은 1만 원, 검은색은 10만 원이었다.
눈에 띄는 모습은 또 있었다. 게임이 끝난 뒤 칩을 모두 잃은 일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업장에 마련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이들은 능숙하게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해 인터넷 뱅킹 프로그램을 열었다. 또 다른 일부는 스마트폰을 통해 모바일 뱅킹 앱을 실행했다.
잠시 후, 이들은 종업원으로부터 칩이 담긴 상자를 넘겨받았다. 칩을 모두 잃거나 첫 게임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칩을 받았는데, 적게는 5만 원에서 많게는 100만 원 이상의 현금을 업장에 계좌이체를 한 뒤였다.
이는 단순히 현금 대용으로 칩을 활용한 게 아니라 업장으로부터 칩을 ‘구입’했다는 얘기다. 현행법상 강원랜드를 제외하고 이런 방식으로 환전을 한 뒤 돈을 걸고 게임을 하는 업장은 모두 ‘전문 도박장’으로 간주된다. 실제로 테이블 곳곳에서는 수시로 현금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따거나 잃은 금액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단위가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이었다.
자정을 넘기면서 손님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동시에 업장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종업원은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매칭’을 시작한다”며 “원하는 손님들은 미리 알려달라”고 말했다. 매칭이란 업장에서 각 테이블에 있는 손님들을 서로 연결해 또 다른 게임판을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 ‘도박판’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매칭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지인들끼리 즐기는 카드게임에서 ‘돈을 따는 것’으로 변했다. 판돈도 최소 10만 원부터 시작돼, 게임이 진행되면서 상당한 금액이 오가기 시작했다. 이날 매칭 게임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 “돈 버는 건 업장뿐”
홀덤바를 찾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일확천금’을 노리고 발길을 끊지 못한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나 홀덤바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들은 “사실상 돈을 버는 것은 업장뿐”이라고 귀띔한다. 단순히 게임에서 업장 측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 더해 또 다른 주요 수익원이 있다는 얘기였다.
이 수익원의 정체는 수수료다. 강남지역 대부분의 홀덤바 업장에서는 각종 명목으로 ‘살인적인’ 수수료를 붙이고 있다. 대표적인 수수료는 ‘레이크(rake)’다. 이 방식은 프리플랍, 플랍, 턴, 리버 등 각각의 단계가 끝날 때마다 모인 돈의 일부에서 정해진 비율로 칩을 가져간다. 즉, 게임 중간 중간마다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이 진행되고 판돈이 커질수록 업장이 챙겨가는 수수료는 그만큼 늘어난다. 여기에 시간당 수수료를 내야 하는 ‘타임비’도 있다. 한 시간 단위로 업장에서 정한 시간당 타임비를 테이블에 올리고, 종업원이 이를 회수한다.
칩을 현금이 아닌 ‘포인트’로 바꿔주면서도 수수료를 뗀다. 몇몇 업장이나 온라인 홀덤 게임 업체가 결탁해 ‘사이버 머니’로 전환하는 방식인데, 이후 다시 이 업장을 찾았을 때 다시 칩으로 교환하거나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10%의 수수료가 붙는다.
이외에도 처음 업장 방문 시 지불해야 하는 테이블 이용료, 게임 종료 후 승자가 내는 수수료도 있다. 이에 대해 이날 업장에서 만난 B 씨(38)는 “업장마다 다르지만 강남에서 운영되는 홀덤바는 보통 이 정도 수수료는 다 가져간다”고 말했다. “수수료를 모두 합치면 금액이 꽤 커지는데, 부담스럽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사실 도박하는 사람들한테 큰 금액도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 검찰, 대규모 기획수사 중
서울 강남 일대에서 앞서와 같은 홀덤바들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기자가 방문한 홀덤바처럼 특정 건물에 간판 없이 위치한 곳도 있지만, 일부는 보드게임 카페로 위장해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낮에는 보드카페로 운영하다 영업을 종료하면 그 이후부터 홀덤바가 되는 것이다. 각종 포털 사이트를 통해 특정 검색어를 입력하면 이러한 형태의 업장을 금방 찾을 수 있다.
경찰은 이러한 사정을 파악하고 주기적으로 단속을 벌이고 있다. 서울의 한 경찰 관계자는 “그동안 운영이 어려워진 보드카페와 도박 장소가 필요한 홀덤바 업장 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다”며 “짧게는 4~5일부터 길게는 보름 정도 운영을 하다 카페를 옮기거나, 빈 사무실이나 폐업한 업체에 단기임대로 들어가 영업을 하는 등 수법이 점점 치밀해지고 있다. 신고나 관련 첩보를 통해 꾸준히 단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직접 대규모 기획수사까지 나서고 있다. 서울 중앙지검 형사 3부는 지난 3월부터 앞서의 형태로 불법 도박장이 운영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 중이다. 수사 선상에 오른 강남지역 보드카페만 20곳 이상이며, 누적 판돈 규모는 수백억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검찰은 지난 10월 6일 보드카페로 위장해 불법 도박장을 운영한 30여 명을 도박장소개설 혐의 등으로 입건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최소 2개 이상의 폭력조직이 연결된 정황도 포착됐는데, 도박장 관리 등을 맡으면서 수수료를 챙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직접 도박장을 운영한 사례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위장 보드카페가 폭력조직의 신종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도박장을 중심으로 관련자 자금 흐름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우후죽순 생기는 신종 도박으로까지 폭력조직이 자금원의 영역을 넓히고 있다”며 “단순 도박장 개설 행위만 처벌해서는 ‘불법 보드방’ 근절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그 배후에 있는 비호 폭력조직 등으로 수사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
‘홀덤바 역사’ 심심풀이 놀이가 죽기살기 도박으로… 수사당국과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홀덤바는 지난 2005년 초, 강남에서 영업하던 한 카지노 바에서 시작됐다. 이 카지노 바에서는 손님들이 술과 안주를 주문하면 그 금액에 맞는 칩을 주고 매장 안에 마련된 카지노 게임들을 즐길 수 있게 했다. 이후 외국에서 카지노 또는 카드 게임을 접해본 교포나 유학생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실제 돈을 걸고 게임을 하기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퍼지고 ‘포커스타즈’나 ‘풀틸포커’ 같은 세계적인 온라인 포커사이트를 통해 접해본 사람들도 늘면서 텍사스 홀덤 전용 클럽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홀덤바’라는 명칭이 붙었다. 초기 홀덤바는 보드카페 간판을 달고 손님들이 현금을 내면 5%의 수수료를 떼고 칩으로 바꿔주면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했다. 특히 주목 받았던 방식은 게임마다 ‘한 방에 올인’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지난 2007년 중반부터는 서울 신사‧압구정‧잠원동, 강북의 창동과 신촌 등에 업소들이 퍼졌고, 수도권 신도시와 대구‧부산까지 세력이 퍼졌다. 당시에는 ‘트럼프방’ ‘트럼프 카페’라는 체인점 형태로 운영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홀덤바와 같은 오프라인 도박장은 줄어드는 추세다. 단속이 강화되고 각종 온라인 도박 사이트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오프라인 업장이 설 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수사당국의 단속 대상도 온라인에 집중되고 있다. 다만 한 경찰 관계자는 “온라인 도박장이 성행한다고 해서 ‘손맛’ 때문에 찾는 오프라인 도박장이 뿌리째 뽑혀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며 “온라인과는 별개로 오프라인 역시 강력히 단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