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6 재보선 참패 후 열린우리당의 구원투수로 투입된 정세균 당의장이 두 달여 동안 당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하지만 여당은 홀가분한 입장이다. 지난 16대 국회 때부터 ‘묵혀두었던’ 법안을 시원하게 통과시키자 흩어졌던 개혁 세력이 재결집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당원들로부터 “오랜만에 여당이 일 좀 한다”는 칭찬도 쏟아진다고 한다.
개혁진영에서는 ‘할 일 제대로 하는’ 여당을 만든 1등 공신으로 정세균 당 의장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지난 10·26 재보궐 선거 참패 뒤 문희상 의장 체제가 물러나면서 긴급 ‘구원투수’로 등판한 뒤 두 달여 동안 당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의 기강을 바로 잡고, 당·청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여당이 오랫동안 ‘꼼지락거리던’ 사학법 개정안을 전격 통과시켜 ‘단칼’이 있다는 인상까지 심어주었다.
<일요신문>은 한나라당과의 ‘힘겨루기’를 진두지휘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정세균 의장을 국회 당의장실에서 만나 연말 정국 구상을 들어보았다.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强)형 인간이라니까.”
이재경 열린우리당 의장 특보는 공격적인 어투로 기자에게 한마디 툭 뱉었다. 이 특보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그는 당 대표와 비상집행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며 역대 가장 막강한 여당 수장으로도 일컬어진다)은 정치권에서 대표적인 외유내강형으로 통한다.
먼저 겉으로 드러난 ‘부드러움’(柔)은 정치부 기자들이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을 올해까지 5번이나 수상한 경력에서 묻어 나온다. 그는 평소 온화한 미소와 합리적인 언행으로 기자들 사이에선 가장 ‘믿을 만한’ 취재원에 속한다.
하지만 그를 웃음만 실실 흘리는 ‘마음 좋은’ 정치인으로만 단정해서는 큰 오산이다. 온화한 미소 속에 숨어 있는 ‘강’(强)을 그의 이력 속에서 찾기는 어렵지 않다.
먼저 그는 고려대 총학생회장(71학번)을 역임하며 유신반대 투쟁의 선봉에 섰던 ‘투사’였다. 하지만 강경 일변도의 ‘꽉 막힌’ 싸움꾼은 아니었다. 그와 대학 동기인 ‘시테크 강사’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부총장은 “정 의장은 총학생회장 때부터 소신이 있었고 친구 간에 의리가 있어 인기가 좋았다. 당시 고대는 학생 데모의 진원지였다. 그러나 총학생회장이었던 그는 선동적이거나 과격한 투쟁보다는 합리적이고 차분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라고 기억하고 있다.
정 의장도 총학생회장 시절을 떠올리며 “원래 고시공부 해서 변호사가 되려고 했었는데 유신헌법으로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학생운동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도 운 좋게 당선되어 학생회장 했는데 나한테는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기억한다. 이재경 특보는 “총학생회장에 출마할 만큼 강단 있는 그의 숨은 ‘강인함’이 이번 사학법 개정안 통과의 ‘저력’이자 밑바탕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한마디 거든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쌍용종합상사에 입사, 18년 동안 실물경제를 몸에 익혔다. 이 중 절반 가까이를 미국 뉴욕, LA 등지에서 보내 해외 감각도 겸비하게 된다. 그러다 지난 1996년 김대중 전 대통령 진영에 직접 찾아가 정치권에 입문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극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학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에 대한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오간다. 개혁 세력 결집을 위한 포석이라든지,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조찬 뒤 ‘윗분’의 뜻을 받들어 ‘강공’으로 돌아섰다는 등등의 해석이 나왔다.
그런데 그 배경을 정 의장 개인의 성향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는 평소 부드러운 성품으로 대야 협상에서도 무리를 하지 않는 스타일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는 경제인 출신답게 “수확이 없는 노동은 헛된 일”임을 강조한다. ‘성과가 있는 개혁’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를 자강(自强)우리당으로 불러 달라. 정당이라면 외연을 자꾸 넓혀나가야 하는데 우리 스스로가 단단하고 강하고 견고하지 않으면 세력을 넓히는 것도, 다른 정당과 제휴를 하는 것도 잘 안 된다. 비록 지금까지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다. 우리 스스로 당심을 추스르고 결속하고 또 국민의 지지도 받는다면 대야 협상력도 생기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자강’ 열린우리당이 먼저다.”
이런 노력들과 동시에 그는 경제인 출신답게 ‘실적’을 내는 데도 최선을 다했다. 이번 사학법 개정안 통과도 야당의 반발이 거세더라도 할 일을 하자는 평소의 소신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통과된 사학법 개정안 처리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를 했다는데.
▲사실 지난해 12월에 원래 처리할 예정이었지만 국회의장이 2월을 넘기고 4월, 6월, 9월 정기국회로 계속 미뤄져왔다. 하지만 최근 국회의장 주선으로 특위를 만들어 거의 합의가 됐었다. 한나라당은 자립형 사립고 설립을 받아주면 개방형 이사제를 수용하겠다고까지 했다. 지금 한나라당을 이해하지 못하겠는 게 자립형만 받아주면 사학법은 합의하겠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 장외투쟁을 하니 납득이 안 간다. 갑작스럽고 생뚱맞다.
─야당의 강경투쟁 속내는 무엇이라고 보나.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지만… 야당이 지지도가 40%를 넘어서니까 오만해진 것 같다. 그렇지 않고는 이해가 안된다. 사학법 개정이 한나라당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직접 이해관계가 걸린 것도 아닌데 왜 저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결국 오만한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자기 마음대로 안되면 전부 선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 아닌가.
▲ 지난 9일 국회에서 사학법 개정안 표결처리를 놓고 여야 의원들이 격렬히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정 의장은 사학법 처리에 대해 잘한 일이라는 판단이다. | ||
▲우리가 오만한 것을 바로 잡을 힘이 없고, 야당이 오만한 것은 어쩔 수 없고… 여당이 국정을 챙겨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예산안이 통과되어야 할 시점 아닌가. 헌법상 12월2일이 법정시한이다. 국회가 예산을 확정해줘야 광역시 기초자치단체가 예산 편성을 할 것 아닌가. 국회가 해마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고 있다. 이건 정말 부끄럽고 잘못된 관행이다. 빨리 뜯어고쳐야 한다.
─지금 (한나라당과) 물밑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대화가 전혀 안된다. 완전히 막혔다.
─대화를 제의한 적은 있나.
▲지도부는 아니고 아래에서 터치를 해보는 것 같은데 이빨도 안 먹히는 것 같다.
─사학법 개정안이 통과된 뒤 사학재단 등의 반발이 거세지는 등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데.
▲이 문제는 지난 16대 국회 때부터 내려온 ‘유산’이다. 나와 국회의장이 여러 번 처리를 공언했던 것이기 때문에 정치권의 신뢰문제다. 또 하나는 이 문제가 계속 다른 갈등을 유발하는 골칫거리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여야관계뿐만 아니라 정국 전체의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이번에 정리하는 것은 잘했다고 본다.
그런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세균 의장이 12월6일 청와대 조찬을 끝내고 사흘 뒤인 12월9일 사학법 개정안이 전격 통과되자 당·청간 사전 조율이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제기된 적이 있다. 정 의장은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사학법 개정을 지지하지만 대통령의 우선순위(priority)는 아니었다고 본다. 그것보다 예산안이나 이라크 파병동의안 등에 관심이 더 많다. 사학법도 공약사항이긴 하지만 다른 것에 비해 크게 우선사항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 의장은 “청와대 조찬 때 국회 입법 전체의 진행사항을 보고하면서 사학법 개정안 문제도 얘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사학법 개정안 파문 외 그밖의 현안에 대해 질문을 이어갔다.
─최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논란은 어떻게 보나.
▲글쎄, 일단은 국제 기준에 맞는 윤리의식에 맞추어서 (연구를) 해나가되 지금까지 쌓아온 업적과 축적된 연구성과는 계속 더 발전되고 잘 보호되어야 한다.
─만약 거짓으로 판명난다면(이 인터뷰는 지난 12월15일 미즈메디 노성일 이사장이 황 박사의 줄기세포는 없다고 주장했던 바로 전날 이루어졌다).
▲지금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검증도 한다고 하니까. 어쨌든 대단한 성과를 이룬 것만은 사실이라고 본다. 그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황 박사 팀이 그 분야의 많은 연구 성과와 업적을 쌓은 것 같다. 그것은 국가적 자산으로 소중하게 잘 발전시켜야 한다(정 의장은 이때까지만 해도 황 박사의 줄기세포 진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노 이사장의 주장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아직 사실관계가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은 만큼, 지금 이에 대해 얘기하면 성급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진상이 확실하게 규명된 뒤에 당의 공식 입장을 밝히겠다’고 여전히 조심스런 입장을 보였다).
─민주당에 지난 대선 빚 44억원을 변제해주겠다고 얘기했는데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나.
▲그 문제는 이미 정리된 것 같다. 아마 44억원은 과장된 것 같고 (민주당이) 대부분 삭감 받고 정리를 한 것 같다. 지난 대선 때 우리가 직접 사용했던 돈에 대해서는 책임져 주는 게 내 생각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 우리 수입은 당원 당비와 국고보조금밖에 없는데 국고보조금은 쓰면 불법이고 당비는 들어오자마자 시·도당에 바로 가버리고 중앙당에서는 쓸 수 없다. 지금은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리마인드해주네.
(한편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정 의장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펄쩍 뛰었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아직 아무 것도 정리된 게 없다. 정 의장이 해결해준다고 한 뒤 아직까지 1원 한 장 구경 못하고 있다. 가타부타 한마디 대답도 없다. 처리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아마 예전에 쓰고 남은 잔금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처리가 되고도 남는다”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과의 정기적인 조찬 모임은 계획이 없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실제로 내가 대선 때 정책실장도 하고 그래서 노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대충 다 안다. 특별한 현안이 불거지지 않는 한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고 또 볼일 있으면 전화 드려도 되니까 별 문제는 아니다.
─정동영 김근태 장관과 정치 입문 동기인데 두 사람은 대권주자인데 반해 정 의장은 좀 처진다는 느낌이다. 대권주자 반열에 오르고 싶진 않나.
▲항상 주어진 최선을 다하고 그래서 성과가 있으면 또 다른 일이 주어지고 그런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노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은 소멸된 것인가.
▲대통령이 한 일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저희가 논평 안하는 게 좋다. 평 당원이긴 하지만 여권 최고 지도자이기 때문에.
─대연정을 개인적으로 평가한다면.
▲허허허.
─국가보안법 문제는.
처리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것 때문에 다른 것이 다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갈 수는 없다. 우선순위가 있긴 하지만 예산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처리할 수밖에 없다.
─내년 경제부총리 입각설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어떻게 하실지 봐서….
지금 여당은 사학법 개정안 ‘통과 후유증’을 치르고 있다. 사학재단들은 ‘신입생 거부’의 초강수를 두며 여권을 압박하고 있다. 국민 여론도 여야 모두에 날카로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던 정세균 의장. 그 잔잔한 미소 뒤에 숨겨진 ‘비수’가 연말 사학법 개정안 파문과 예산안 처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과연 어떤 힘으로 작용할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