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중순 국내 8개 신용카드사 부서장들로 구성된 ‘대표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비자(VISA)카드 본사를 찾았다. 이들이 세계 최대 신용카드 네크워크 회사인 비자카드를 찾은 이유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시행이 예고됐던 결제 수수료 인상에 항의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였다. 금융권에 따르면 이날 비자카드에서는 임원급 경영진이 대표단을 맞았고, 국내 신용카드 시장 상황과 카드사들의 반대 의견을 청취하는 등 나름 형식을 갖추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인 지난 1일, 비자카드는 예고했던 대로 해외결제 수수료율을 기존 1.0%에서 1.1%로 전격 인상했다. 인상된 수수료는 서비스 비용인 해외분담금과 데이터프로세싱수수료, 해외매입수수료 등 5개 항목으로 모두 카드사가 부담하는 것들이다. 특히 수수료 인상이 유독 한국에서만 시행됐다는 점에서 국내 카드사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민간 카드사 출신 김덕수 여신협회장이 비자카드 수수료 인상 문제 등에 적극적 액션을 보이지 않아 카드사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비자카드는 지난 5월 국내 8개 카드사에 10월부터 결제 수수료율을 인상한다는 통보성 공문을 보내 ‘갑질’ 논란을 촉발시켰다. 가맹점 수수료 인하 등으로 상반기 순익이 10% 이상 줄어든 카드사들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일인 데다 비자카드가 영업 중인 세계 200여 국가 중 유독 한국만 인상 대상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카드업계에서는 “한국 카드사들을 ‘호갱(호구 고객)’으로 본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와 함께 공동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문제는 글로벌 신용카드 시장의 구조상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난해 국내 소비자의 해외카드이용금액 비중은 비자카드가 55.5%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마스터카드(33.4%), 아멕스(AMEX, 5%) 등을 이용한 경우도 있지만 비자카드의 위상이 워낙 절대적이어서 카드사들은 자연스럽게 ‘을’이 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또 네트워크사와 카드사의 수수료는 두 회사가 1 대 1 협상을 통해 결정하기 때문에 다른 회사의 계약 내용을 알기도 쉽지 않다. 경쟁사에 알려주는 것을 꺼릴 뿐 아니라 계약서에 비밀유지 조항이 있을 경우 계약 위반이 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카드사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업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여신금융협회로 쏠렸다. 개별 회원사들이 혼자 대응하기 까다로운 문제이니만큼 단체인 여신협회의 역할에 기대를 건 것.
실제로 여신협회를 이끄는 김덕수 회장은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김덕수 회장은 대표단이 비자카드를 방문한 뒤 기자간담회를 열어 강경발언을 쏟아냈다.
김 회장은 “불합리한 측면을 비자카드에 어필하고 있다”면서 “법률적 검토를 진행 중이며 비자 본사가 요구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 국내 카드사들의 비자카드 의존도가 줄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0.1%포인트 인상을 통해 얻는 것보다 오히려 고객을 잃는 점이 있기 때문에 신중한 판단을 할 것”이라며 비자카드를 압박했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김 회장과 여신협회가 취할 수 있는 구체적 액션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회사 대 회사 간 협상에 제3자인 여신협회가 개입할 경우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데다 자칫 한국과 미국 간 통상마찰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내 카드사 한 관계자는 “물밑 협상이나 보이지 않는 조정자 역할이면 몰라도 여신협회가 앞에 나서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며 “미국 쪽 신용카드 관련 단체가 비자카드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설 경우 싸움이 커질 위험이 있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결국 김 회장의 강경발언은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 대내외적인 립서비스 수준에 그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실제로 여신협회는 김 회장의 발언과 달리 이번 싸움에서 중립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여신협회는 공식적인 대응이나 해결방안을 내놓지 않을 계획이며 국내 카드사들을 대변하는 역할도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협회 관계자는 “회사 간 수수료 계약 문제에서 협회는 제3자며 관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면서 “특정 회사와 비자카드 양측이 만남을 원한다면 이를 연결해주는 역할 정도만 하게 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국내에서도 난제에 봉착해 있다. 이미 피해가 가시화되고 있는 가맹점 수수료 인하가 추가로 단행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지만 김 회장은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카드사들은 지난해 말 정부가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율을 재산정함에 따라 올해 초부터 인하된 수수료율을 적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올 한 해 동안에만 4000억 원이 넘는 수익이 감소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와 있는 상태다.
문제는 내년 대통령 선거 등을 앞두고 정치권이 가맹점 수수료 추가 인하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지난 7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영세상점과 택시 종사자는 1만 원 이하 소액결제 수수료를 면제해주는 내용의 여신전문금융업법(여전법) 개정안을 발의해둔 상태다. 영세가맹점과 중소가맹점 우대수수료율을 인하하고 적용 가맹점 범위를 확대하는 법안도 나와 있다.
카드업계는 특히 소액결제 부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수익은커녕 역마진이 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고객 편의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제공하는 서비스인데 아예 수수료를 없애는 것은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는 것이 카드사들의 항변이다. 대형 카드사 다른 관계자는 “전체 카드결제액 중 1만 원 미만 소액결제 비중이 40%에 이른다”며 “소액이라서 면제해줘도 된다는 정치권의 논리는 한마디로 궤변”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정치권의 수수료 인하 조짐에 대해 여신협회가 움직여주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업계 전체의 이익이 걸린 문제인 데다 정무적인 조치가 필요한 사안인만큼 협회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문제에 관해 김 회장이나 협회의 입장 표명 등 눈에 띄는 행보는 포착되지 않아 업계의 불만이 쌓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민간 카드사(KB국민카드) 사장 출신인 김 회장의 정치권 인맥이 약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정무위원회나 기획재정위원회 등 관련 의원들을 상대로 설득에 나서는 등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금융권 협회 고위 관계자는 “어떤 협회건 협회장의 필수덕목 가운데 하나는 정치력”이라면서 “낙하산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관료나 정치인 출신 협회장이 많은 이유도 이런 상황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