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이 차장의 통일부장관 내정은 하나의 예정된 수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내정자만큼 참여정부의 평화통일정책을 잘 이해하고 제대로 수행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입안한 장본인이란 점에서 그는 분명 남북관계에 관한 한 참여정부의 ‘적통’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장관 기용을 바라보는 여론과 정치권의 시각은 싸늘하다. 우선 참여정부의 또 다른 이름이 된 ‘코드인사’의 절정이라는 비판이 여당에서부터 터져 나오고 있다. 게다가 자주파 혹은 숭미파라는 그에 대한 극과 극의 평가는 참여정부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야당에서는 그를 유시민 의원보다 위험한 인물로 보고 있기도 하다.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 같은 사람은 “국민이 켜놓은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리는 구급차의 무면허 운전사”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참여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3년 만에 전면에 나선 ‘핵심실세’인 이 내정자, 그를 집중 탐구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좌파들은 그를 ‘보수’ 혹은 ‘숭미주의자’라고 비판하고 극우세력들은 그를 ‘좌파’ 혹은 ‘친북파’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위치는 마치 노 대통령이 처한 현실과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한나라당 등 보수 세력들로부터 ‘친북·반미주의자’의 낙인이 찍힌 데는 참여정부 초기 초래된 미국과의 갈등이 큰 몫을 했다. 당시 그는 주한미군 문제와 관련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을 중심으로 한 ‘한미 동맹파’와 갈등을 빚었었다. ‘미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는 그의 생각은 오랫동안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에 두고 외교정책을 수립해 온 정통 관료그룹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옷을 벗은 것은 ‘자주파’인 이 내정자가 아닌 ‘실용파’ 윤 전 장관이었다. 이후 그는 참여정부 외교안보 라인의 핵심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그에 대한 비판도 거세졌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시각도 만만치가 않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연구대상이다.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개혁세력은 그를 ‘숭미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겨울을 뜨겁게 달군 이라크 파병문제는 그에게 ‘숭미주의자’라는 낙인을 찍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의 요청으로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등 대미 관계에서 자주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왔던 것이다. 비록 그가 ‘파병은 하면서도 규모와 성격을 대폭 축소, 한·미동맹을 유지하고 노 대통령의 지지층이 갖고 있는 파병 반대 여론도 수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민주노동당 등 파병자체를 반대했던 진보세력에게는 굴욕적인 협상결과일 뿐이었다. 특히 당시 이 결정에 이 내정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이 언론을 통해 확인되면서 그는 다시 한번 여론과 정치권의 표적이 됐었다.
사실 그는 미국에 대해서나 북한에 대해 모두 비판적인 주장을 해 온 ‘별종’ 연구가였다. 오랜 시간동안 ‘학자 이종석’이 분석 평가했던 북한은 분명 ‘독재적’이고 ‘봉건적’인 국가였고 남북관계는 ‘적대적인 형제’일 뿐이었다. 비록 그가 햇볕정책부터 대북 포용정책까지 이어지는 남북간 평화체제 구축의 전령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한을 좋게만 보지는 않았다. 미국에 대해서도 그는 비슷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DJ정부 당시 미국이 절대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던 ‘대북 전력지원’을 추진한 장본인도 사실은 이 내정자였다. 지난 여름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이 북한에 제안한 중대제안의 핵심내용인 대북 전력 직접지원 아이디어는 그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대북정책의 하나였다.
이 내정자는 평소 자신에 대해 “대북 포용정책의 동업자이며 참여정부의 포용정책은 평화번영정책”이라고 말해왔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는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라는 두 축을 조화롭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내정자는 전 정권의 ‘햇볕정책’과 이를 이은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을 학문적으로 집대성한 최고의 브레인으로 참여정부내 입지가 국민의 정부 시절 임동원씨가 했던 역할을 능가할 정도라는 평을 받고 있다. 국민의 정부에서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임 전 장관과 함께 ‘햇볕정책의 전도사’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그는 2000년 6·15선언을 이끌어낸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에 동행 인사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 여름이었다. 대권도전을 준비하던 노 대통령에게 외교·안보 정책 관련 ‘개인수업’을 하면서부터다. 2002년 1월부터는 당시 윤영관 서울대 교수, 서주석 국방연구원 연구위원, 서동만 상지대 교수와 아예 팀을 꾸려 노 대통령의 자문에 응했다. 이 팀은 이후 대통령직 인수위 통일·외교·안보분과로 그대로 옮겨왔고 새 정부 출범 후엔 위원들에게 외교통상부장관, NSC 사무차장과 전략기획실장, 국정원 기조실장 등의 중책이 맡겨졌다. ‘평화번영정책’의 골격을 만들었고 인수위원 시절 노 대통령 당선자의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참여정부 들어 지금까지 NSC 사무차장으로 통일부, 외교부, 국방부, 국정원 등 안보 관련 4개 부처들 간의 의견 조율을 통한 전술적 합의와 전략을 끌어내는 역할을 해왔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그는 많은 일을 했다. 2002년 국방백서에 북한을 ‘주적’으로 표현하는 조항을 유지할지 논란이 일었을 때도 이 내정자는 “오늘날 특정 국가를 주적으로 규정하는 국방백서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며 삭제를 주장했다.
지난해 6자회담에서도 그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북한 핵 폐기시 대북 전력 공급’이라는 ‘중대 제안(안중근 계획)’을 매개로 했던 그의 계획은 북한을 회담장에 이끌어 냈다. 당시 NSC 고위관계자는 “중단상태에 빠진 경수로 문제 해결과 북핵문제를 연결시켜 보자는 발상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라고 이 제안의 취지를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노선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받는 학자다.
그를 잘 아는 한 대학 교수는 그를 “자기주장이 분명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학계에는 그와 관련된 일화들도 많아 관심을 모은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1949년부터 80년대말까지의 <로동신문>을 일일이 복사해 3회 이상 통독한 것은 북한학계에선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또 학위논문이 발표됐을 당시 많은 언론이 그의 논문을 기사화하고자 했으나 단순한 소개 기사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었다는 후문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한 대학교수는 “이 내정자는 당시 신문사들이 원고지 4~5매 분량의 소개글을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내가 듣기로는 ‘한 면 이상의 지면을 준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더라. 자기 논문과 주장에 대한 자존심이 아주 센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꼼꼼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은 장관 내정 이후 통일부에 대한 첫 업무지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그는 지난 2일 장관으로 내정된 직후 통일부의 비공식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두 가지 지시와 한 가지 문의를 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통일부 간부에게 “앞으로 한 사람이 작성한 보고서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는 것. 여러 명의 ‘브레인스토밍’을 거친 깊이 있는 보고서를 요구한 것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 내정자는 분명 노무현 정권의 또 다른 ‘복심’임에 틀림없다. 과연 이 통일부장관의 체제 아래서 남북관계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일부의 진단대로 새로운 남북관계를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일부에서 우려하듯 거침없는 친북노선을 걸을 것인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즐기는 낚시 외에는 공부가 유일한 취미라고 밝히는 이 내정자. 최근까지도 일요일이면 세종연구소에 나와 책을 읽곤 했다는 학자이자 관료, 때로는 정치인인 그가 선보일 새로운 남북관계에 관심이 모아진다.
한상진 기자 sjin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