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학규 경기도 지사는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을 땀으로 적시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대권 출사표를 던진 셈이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3김이 빠져나간 작금의 정치판은 ‘절대 지존’이 없는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다. 고만고만한 주자들은 끊임없는 합종연횡을 통해 3김이 빠져나간 권력의 공간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06년은 말 그대로 ‘정치의 해’로 기록될 것이다. 특히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여야의 대권 후보 윤곽이 거의 드러날 것으로 예상돼 그들의 대권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일요신문>은 신년 특별기획으로 현재 거명되고 있는 유력한 대권 주자들과의 연속 인터뷰를 마련했다. 소개하는 순서는 특별한 의미가 없고 그들의 인터뷰 일정에 맞추었음을 밝힌다. 첫 번째 소개할 대권주자는 한나라당 ‘빅3’ 중 한 명인 손학규 경기도 지사다. 그는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을 땀으로 적시고 싶다”며 대권에 대한 강한 도전 의사를 보였다. 지난 1월19일 경기도청에서 손 지사를 만나보았다.
취재차량이 수원 톨게이트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전광판 위에는 ‘일자리·나눔·평화’라는 문구가 지루한 운전자들의 시선을 잠시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 세 가지 모토는 손 지사가 올해 신년사를 통해 밝힌 도정의 목표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 당수가 지난 1996년, 18년 만에 보수당에 이기고 집권할 때 외친 것은 “Education, Education, Education(교육)”이었다. 반면 손 지사는 올해 들어 어딜 가서든지 “일자리, 일자리, 일자리”라고 외치고 다닌다고 한다.
그와의 인터뷰는 경기도정 구상으로부터 ‘가볍게’ 풀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손 지사는 도정 질문에 대해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장시간 답변을 이어나가 인터뷰는 처음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일자리’에 대한 그의 철학은 분명했다.
“지난해 경기도 파주에 LG필립스LCD 공장을 어렵게 유치했다. 이 투자 유치로 공장 직원만 2만5천 명을 고용하고 부품 협력 단지에만 1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 파생고용 효과를 모두 합치면 10만 명에 해당한다. 이것은 평균 가족 3명 기준으로 30만 명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첨단산업 분야에서 1천만달러(약 1백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면 고작 30~50명 정도의 고용 효과가 생긴다. 공장 하나를 유치하는 게 얼마나 경제적 효과가 있는지 알 것이다. 지난해 경기도에서 새로 만든 일자리는 한국 전체 일자리의 57%를 차지했다.”
─이명박 서울시장 하면 떠오르는 게 청계천이다. 손학규 하면 뭐가 떠오른다고 볼 수 있나.
▲나는 ‘베이스(토대)를 만든 지사’로 평가받고 싶다. IT, 교육, 문화 등의 전 분야에 장기적 관점을 가지고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려고 했다. 수원 판교 등지에 첨단 산업 공단을 유치했다. 교육 사업에 6천억 원을 지원했는데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경기도 일산에 30만 평 규모의 ‘한류우드’를 조성하며 문화 인프라도 구축했다. 이 모든 것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몇 십년 후에는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고 나는 무대를 만들고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 시장이 화려하게 드러내는 춤꾼이라면 나는 묵묵히 일 잘하는 일꾼이다.
말머리를 돌려 손 지사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을 이어나갔다.
─흔히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를 맞는다고 한다. 정치인으로서 그런 기회가 있었나.
▲첫 번째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학위를 딸 생각은 없었지만 하다보니 공부 욕심이 생겨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까지 땄다.
이 대목에서 손 지사는 영국 유학의 경험을 통해 386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밝혔다.
“영국 생활을 통해 세계 속의 하나에 불과한 대한민국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운동권 출신들은 고문 받고 핍박받는 것만 생각한 나머지 일반인들에 대해서는 반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분노는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는 큰 에너지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증오와 폐쇄성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386 출신들이 이 정권을 세우는데 일조를 했다. 하지만 이 정권에 운동권 출신들의 그런 전통이 남아 있어서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싸우는 것이다.”
손 지사의 386 출신 정치인 비판은 자연스레 그의 정치적 비전으로 이어졌다. 그는 “영국 유학 전까지 내게는 오직 노동운동밖에 없었다. 경제성장은 없었다. 하지만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한 면만 봐서는 안되겠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게 바로 내가 주장하는 통합의 리더십에 대한 기초가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 대권 라이벌인 이명박 시장의 ‘역작’ 청계천 개통식에 참석해 이 시장과 인사하는 손 지사. 아래는 젊은 시절 손 지사와 부인 이윤영씨.(청와대사진기자단) | ||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 기회는 대권인가.
▲한나라당은 과거 두 번 다 이겼다가 마지막 1~2%를 확실하게 가져오지 못했다. 사람들은 한나라당이 30만, 50만 표만 더 얻었으면 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하지만 이것은 박빙의 표차가 문제가 아니다. 시대정신의 문제다. 한나라당은 기존 보수층으로부터 48%까지 표를 끌어 모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2%는 가져오기 힘들다. 결국 우리 당으로 올 수 없는 그런 사람들마저 끌어들이는 전략과,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가능하다. 그런 것이 바로 시대정신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시대정신인가.
▲우리는 산업화 시대의 자산과 민주화 시대의 열정도 모두 안고 가야 한다. 노무현 정권과 386이 세계적 역사적 마인드가 없어서 우리나라가 벽에 부딪쳤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거꾸로 돌아가서 과거 냉전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런데 요즘 한나라당에는 그런 경향이 상당히 큰 것 같다. 그렇게 해서는 결코 48% 외의 마지막 2%를 만들 수 없다.
─손 지사가 그 2%를 채워줄 수 있나.
▲그렇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통합의 리더십이다. 또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실사구시의 리더십이다. 세 번째가 글로벌 리더십이다. 세계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 3개의 리더십을 마지막 세 번째 기회에서 쓸 것인가.
▲내가 경기도지사 될 때 선거 구호가 ‘경기도를 땀으로 적신다’였다. 이제는 ‘대한민국을 땀으로 적시겠다’.
손 지사는 이날, 대권 출마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견지해오던 종전 입장과는 달리 “대한민국을 땀으로 적시겠다”는 구체적 표현으로 대권 출마를 사실상 공식화했다. 하지만 손 지사는 여전히 대중적 지지도가 낮은 것에 대해 “시간이 가고 본격적인 검증의 시기가 오면 대통령을 뽑는 기준이 달라질 것으로 본다. 올 6월 도지사 임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면 그때는 다른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나를 설득할 수 있는 훈련도 많이 해나가면서 보완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도지사 손학규’가 아니라 ‘정객 손학규’는 과연 현재의 정치판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정치 현안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 방향을 틀었다.
─‘친 이명박’ 계열인 이재오 의원의 원내대표 당선에 대해 어떻게 보나.
▲최근 민주동지회에 참석했다가 옆자리에 앉은 김무성 의원에게 ‘왜 졌느냐’고 물었더니 ‘이 의원의 병행투쟁론에 초선들이 거의 다 넘어간 것 같다’고 말하더라. 의원들의 마인드가 이제는 과거 투쟁방식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재오 대표는 전국적인 정권 규탄 대회를 열겠다고 했다.
▲야당으로서 필요에 따라 그래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만약 냉전시대 발상으로 채워져 있다면 당장은 군중을 짧게 동원할 수 있지만 길게는 민심을 얻지 못한다.
─최근 박 대표의 사학법 투쟁은 어떻게 보나.
▲여야 간 대결 구도가 첨예할 때일수록 지도자는 한 발 물러서서 크게 보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흘러가는가 그 위치를 파악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이회창 전 총재의 정계복귀에 대해서는.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고, 가능성도 별로 없는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과 열린우리당의 분열 등으로 인한 정계개편은 어떻게 예상하나.
▲정계개편과 관련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지방선거 뒤 각 정파가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한나라당이 포위되는 구도다. 과거 김대중 평민당 후보가 집권을 하지 못한 것은 ‘김대중 대 반김대중’ 구도였기 때문이다. 김대중 후보가 집권한 것도 ‘한나라당 대 반한나라당’ 구도 때문이었다. 노무현 정권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은 반드시 당을 혁신시켜야 한다.
─유시민 입각 파동에 대한 입장은.
▲유 의원 개인을 논하기보다 이번 개각을 통해서 노 대통령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어떻게 판을 좀 깨볼까, 이걸 통해서 정치적으로 내 역할을 좀 키워볼까’ 이런 생각으로 내각을 짜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개헌론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개인적으로 내각제나 정부통령제는 반대한다. 정부통령제로 동서화합을 실현한다고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다. DJP연합 때를 보라. JP가 들어가자마자 몽니 부리면서 깨지지 않았나. 대통령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 부통령이 자기 지분을 가지고 정권에 들어간다고 하면 대통령 취임하는 그날부터 다음 대통령을 위해 온갖 자기의 정치적인 행위를 다 할 것이다. 내각제도 마찬가지다. 과반수를 형성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연정 얘기 나오고 그러면 일을 못한다. 대통령 4년 중임제가 가장 적합하다고 본다.
─고건 전 총리가 여전히 대권주자 선호도 1위를 달리고 있는데 그의 지지율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나.
▲나는 뭐, 고 전 총리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수원을 빠져나오는데 ‘일자리·나눔·평화’의 전광판이 어두워진 주위를 더욱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손 지사가 과연 여기에 ‘땀’이란 글자를 어떻게 새겨넣을지 새삼 궁금해졌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