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런데 예상 밖의 답이 날아왔다. “처음 듣는 영화 제목인데, 우리영화예요, 외국영화예요”라고. ‘며칠 전 대통령도 관람한 영화’라고 하자 “나도 영화 보는 걸 꽤나 좋아하는데 영화 제목조차 모른다니 당황스럽네”라며 웃는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비밀로 해 줄 수 없어요”라고.
지난해 말로 1년6개월 동안 맡았던 보건복지부 장관을 그만두고 당으로 복귀한 김근태 의원. 오는 2·18 전당대회에서 새로 선출되는 당 의장 후보로 출마한 그가 요즘 선풍적 화제를 몰고온 영화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는 게 다소 의외였다. 뒤집어 보자면 그가 뭔가 한 가지에 몰입해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과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요즘은 온통 정치 경제 그리고 당원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재야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그리고 행정가에서 또다시 정치인으로 돌아온 그를 지난 1월25일 저녁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났다.
앞으로 2월 열린우리당 전대에서 선출되는 당 의장은 5월 지방선거를 책임져야 하는데 현재의 지지도 때문인지 정가에선 ‘여당 필패론’이 나돌고 있다. 결국 당 의장이 선거 결과를 책임져야 할 것이고, 이는 차기 대권 주자로서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김 의원이 당 의장 후보로 나선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먼저 ‘김심’을 두드려봤다
“(당의장이) 되어도 불리하다는 점 때문에 전당대회 불출마를 권유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럴듯한 계산을 앞세워 갈 길을 선택한 적이 없다. 그랬더라면 불법정치자금 고백도 없었을 것이고, (노무현 대통령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불가 방침에 반발하면서) 분양원가를 공개하기로 했던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호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려움이 뻔히 보이는 길을 자청한 것은 당을 구하기 위해서다. 당을 바꿔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과 당원들은 열린우리당이 이대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변화해야 당이 살고, 당이 살아야 김근태든 누구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의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우리당에는 세 가지 과제가 있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첫 번째고,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정권재창출에 성공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당을 튼튼하게 바로 세우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국민의 마음은 점점 당으로부터 멀어졌다. 대표선수를 바꿔야 한다. 관중이 이미 선수의 실력을 확인했는데 ‘조금만 더’ ‘한 번만 더’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더 이상 경기를 볼 맛이 나지 않는다. 더구나 당장 눈앞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진용을 갖춰야 한다. 당의 간판을 확실히 바꿔서 ‘아, 열린우리당이 변했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그래야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김 의원이 당 의장으로 선출되면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인가.
▲내가 당의장이 되는 것은 대이변이다. 당에 새로운 활력과 역동성이 생길 것이고, 국민은 이를 주목할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중산층과 서민의 당을 만들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하고 출범한 당이다. 이런 약속을 가장 잘 지킬 사람이 누군지 적임자를 찾아야 한다. 내가 당의 간판이 되면 국민은 우리당의 변화를 실감할 것이다. 또 한 가지가 있다. 지방선거에서 나와 박근혜 대표가 맞붙으면 ‘21세기판 오케이목장의 결투’가 될 것이다. 평생을 색깔론과 싸워온 나와 21세기에도 색깔론을 주장하고 있는 박근혜 대표가 맞붙어야만 진검승부를 할 수 있다.
―여당의 지지도가 낮은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첫째는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현실을 핑계대고 표가 되는 일만 하려고 했다. 좀 불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한다. 둘째는 ‘자만했다’는 점이다. 국민은 잘하라고 밀어줬는데, 우리가 잘나서 된 것처럼 행동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고 다시 뛰어야 하는데 변명이 많았다.
▲ 지난 1월15일 김근태 의원이 당의장 출마선언을 했다. | ||
▲전당대회는 당 내부에서 당의 정책과 노선을 가지고 당원들의 심판을 받는 자리다. 반성과 평가, 비전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여 심판받고, 그 과정에서 후보와 당원들이 비전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불편해하는 분들이 있고, 그러다보니 아직까지 제대로 쟁점이 형성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유감이다.
―이번 전대 출마 후보들 가운데 연합전선을 구축할 후보는 누구인가.
▲어떻게 당을 살리고, 당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후보들이) 명백히 제시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후보자들끼리 연대를 하면 패거리 정치다. 패거리 정치는 희망이 없다. 우선은 우리당이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누구 책임인지, 그리고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경쟁한 다음 당원들이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짝짓기를 하면 당원들을 조롱하는 것이다. 후보자 간 연대는 당원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후보자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들어 ‘GT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런 얘기를 종종 듣는다. 이제야 GT 같다, 막힌 게 뚫린 것 같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내가 변했다고 하는 것은) 절박함의 표현이다. 어떻게 해야 당이 변하고 살 것인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내 나름의 문제의식과 해결방안이 있었다. 당으로 복귀하자마자 전국을 순회하며 당원들을 직접 만나보니 내 마음과 당원들의 마음이 같았다. 그래서 더욱 힘을 내고 있다.
―민주당과의 통합 내지 연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이 시점에서 민주당만의 통합은 반대한다. 내가 민주당만의 통합을 반대한다고 했더니 ‘만’자만 빼버리고 민주당과의 통합을 반대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뉴라이트니 뭐니 해서 수구적인 보수대연합을 넓게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도 이에 대항해서 범양심적인 세력의 대연합을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고건 전 총리와 강금실 전 장관도 참여해야 한다. 민주당도 하나의 세력으로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조금 전 고건 전 총리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 전 총리는 참여정부의 초대총리를 지낸 분이다. 나는 고건 총리도 참여정부의 성공을 위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이 보기에도 고 전 총리가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고 전 총리는 합리적인 분이다. 이런 요구와 상황을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40%를 넘고, 여권의 지지율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이 상황을 타개해나갈 책임과 역할이 있는 분이다. 개인적인 능력도 높이 평가한다. 고 전 총리가 함께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면 나도 고 전 총리와 함께 당당히 경쟁하겠다. 그런 경쟁을 거쳐 당원과 국민의 심판을 받는 것이 합리적이다.
―5월 지방선거의 서울시장 후보로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부상하고 있다. 당내에서도 출마 의사를 밝힌 후보들이 있는데 서울시장 후보를 (당내 경선이 아닌) 전략 공천 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너무 빠른 얘기다. 지금은 전당대회를 하는 중이다. 우리당 공직후보 선출은 기본적으로 당내경선을 하는 것이 대원칙이다. 전당대회를 거쳐 새로운 당 지도부가 구성되면 전략적 필요성을 검토하게 되겠지만 지금 그런 논의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대선 후보로서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복안은.
▲복안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다. 나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번 전당대회부터 그렇게 해보이겠다.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거나 의도적인 연출을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국민은 가슴으로 소통할 때 지지를 보낸다. 그런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런 기회가 오면 솔직한 김근태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겠다. 나를 두고 민주화세력의 상징이라는 말씀들을 한다. 훈장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대중성이 낮다는 지적과 충고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 김근태 의원은 요즘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왕의 남자>의 제목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국정과 대권 구상에 몰두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 ||
▲박근혜 대표와 이명박 시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균형을 유지하면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를 올리는 데 쌍끌이 효과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두 분은 개발독재를 상징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있는 제3의 길인 ‘따뜻한 시장경제’를 주장하고 있다. 좋은 맞수가 될 것 같다. 손학규 지사는 아직까지 지지도는 낮지만 실력과 저력을 갖고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에선 사학법 재개정 협상을 요구하며 장외투쟁을 하고 있다. 박근혜 대표의 장외 투쟁 방식을 어떻게 보나.
▲사학법은 한나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참여해서 국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처리됐다. 이것을 문제 삼아 국회를 보이콧하고 거리로 뛰쳐나간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더구나 색깔론까지 끌어들이는 것을 보면서 참담한 기분마저 들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운동을 너무 일찍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국민은 물론이고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루 속히 국회로 돌아오는 것이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이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그리고 (사학법) 재개정은 있을 수 없다. (한나라당이) 체면 때문에 재개정을 받아달라는 것인데 시행도 안해보고 재개정하면 되겠나. 국정 운영은 장난이 아니다. 국민들이 장난치지 말라고 할 것이다.
―한나라당은 브로커 윤상림 사건에 대해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국민이 의혹을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혹이 증폭되지 않도록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입장이다. 윤상림 사건은 지금 검찰 수사가 진행중이다. 국정조사는 검찰수사 결과를 지켜본 후에 논의하는 것이 순서다. 덧붙이자면 한나라당은 국회로 들어와서 그런 주장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검찰과 경찰이 수사권 조정 문제를 매개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 사건을 끌어가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는데 즉각 중단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연설에서 언급했던 양극화 해소 방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해 달라.
▲우선 적극적인 사회정책이 필요하다. 정부에 있으면서 그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고 실질적인 대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희망한국 21’이라고 하는 정책을 개발해서 발표했고 곧 성과를 내기 시작할 거라고 본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수 있다. 양극화는 현상이고 결과이기 때문에 근본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한다. 나는 ‘따뜻한 시장경제’라는 제3의 길을 주장한다. 양극화의 근원을 차단할 새로운 경제성장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따뜻한 시장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 새로운 발전을 이뤄야 한다. 나는 성장을 희생하더라도 분배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70년대식 정부 주도 성장 모델과 IMF 이후 도입된 신자유주의 두 가지 모델밖에 없었다. 두 모델 모두 우리 사회가 지금 직면한 문제를 풀 수 없다. 새로운 모델, 성장과 복지가 상승작용을 하는 경제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관련해 사회적 대타협에 주목하고 있다. 가능성이 있다. 내가 당의장이 되면 열린우리당을 사회적 대타협의 기관차로 만들겠다.
―당·정·청 간 불협화음이 계속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당·정분리는 확실히 실현됐는데 협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제도화되지 않았고 통로도 선택적이다. 그러니까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고, 의견 차이가 있을 때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 해결이 되어 있지 않다. 당·정·청은 각각의 역할이 있다. 각각 자기의 역할을 해가면서 총체적으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국정운영과 미래구상은 정부와 청와대가, 정치와 선거는 당이 중심이 돼야 한다.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인식의 차이, 비중의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서로가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바탕 위에서 제도화가 이뤄져야 한다. 정책 문제에 대해서는 당이 우위를 갖고 주도해야 한다. 당은 국민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당이 조금 더 실력을 키워야 한다.
―보건복지부 후임장관으로 유시민 의원이 내정됐는데 이에 대해 여권 내에서도 반발하는 기류가 여전한 듯하다.
▲인사권은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다. 이미 대통령께 충분한 의견이 전달됐고 대통령께서도 입장을 밝혔다. 여권 내부에서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보건복지부 업무는 갈등하는 이해집단 간의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장관은 미리 그런 것을 예견해야 한다. 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날 그는 인터뷰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가량 늦게 도착했다. 지방에 내려갔다가 ‘허겁지겁’ 올라왔다고 했다. 식사도 겨우 대충 때웠다고 했다. <일요신문>과의 인터뷰가 끝난 시간은 밤 9시 반경. 그런데 이후에도 다른 언론사와의 인터뷰 등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26일) 오전 7시부터 모임이 있다고 했다. 당 의장 경선에 출마한 그의 요즘 생활을 짐작케 하는 물건이 의원사무실 책상 뒤편에 놓여 있었다. 바로 간이침대였다.
김지영 기자 you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