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4년 5월 한보철강 인수 선언 모습(뒤에 정보근씨). 그의 입찰참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
하지만 그는 세 차례의 옥살이 끝에 사실상 경제활동이 불가능한 금치산자가 됐고 급기야는 지난 2월3일 다시 서울중앙지법 형사 합의21부로부터 72억원 횡령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그가 인수해 재단이사장으로 있던 강릉 영동대의 교비 72억원을 이런저런 구실로 빼내 쓰다가 법망에 걸린 것. 다만 재판부는 그가 고령의 환자라는 점과 피해금액 일부는 갚았다는 점을 감안해 법정 구속을 하지는 않았다.
한때 재벌그룹 총수로 세상을 호령하던 정씨의 인생이 급전직하한 것은 지난 91년부터다. 그해 2월 수서 택지분양 특혜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처음 구속됐다. 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된 지 5개월 만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하지만 석방 석달 뒤인 95년 11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 수사과정에서 수서사건과 관련해 그가 1백억원을 노 전 대통령에게 제공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재구속됐다.
이후 김영삼 정부 말기인 97년 1월 한보특혜대출 사건과 관련해 업무상횡령 혐의로 세 번째 구속됐다. 그때부터 2002년까지 수감생활을 하던 정씨는 2002년 6월 대장암 판정을 이유로 형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풀려났다. 하지만 1년여 만인 2003년 9월 그가 갖고 있던 서울 대치동 은마상가 일부를 강릉 영동대 학생 숙소로 임대한다는 허위 계약을 맺고 영동대로부터 임대보증금 명목으로 72억원을 받아 횡령한 혐의가 검찰에 적발돼 그동안 재판을 받아왔다. 결국 이 건으로 네 번째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말단 세무공무원에서 건설 재벌로, 정치권의 후원자로, ‘머슴(종업원)’의 주인으로, 아산만에 제철소를 짓고 러시아 유전 개발을 추진했던 야심가로 화려한 변신을 거듭하던 그가 한보 부도와 세 번의 구속 끝에 학생들 등록금을 허위로 빼내 쓴 잡범으로 전락했다.
어느 것이 정태수씨의 진짜 모습일까.
정씨는 빈농의 아들이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나온 게 정규 교육을 받은 전부다. 그가 잔뼈를 키운 곳은 일선 세무서였다. 그는 51년부터 74년까지 세무공무원(주사보)으로 일했다. 그가 공무원 생리에 능통한 것도, 접대에 능했던 것도, 한보에 유독 고위급 지방 공무원 출신 영입이 많았던 것도, 땅 정보에 유난히 강했던 것도 모두 그의 이 공무원 이력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시각이 많다.
첫째 부인과 사별한 뒤 60년대 초 서울로 전근한 그는 둘째 부인 이수정씨와 지난 66년 재혼했다. 정씨와 15세 차이가 나는 이수정씨는 정씨가 인생뿐 아니라 사업 동반자로 여길 만큼 각별한 존재였다.
공무원 생활에 싫증을 느낀 정씨는 유명 관상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71년 공무원 생활을 접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70년대 초 2만원에 사놓은 강원도 한 폐광에서 몰리브덴 광맥을 찾아내는 행운이 따르자 74년 한보상사를 설립한 것. 당시 그의 밑천은 이수정씨가 모아놓은 곗돈 1백만원과 집담보로 얻은 2백만원 등 모두 3백만원이었다.
그는 광업과 더불어 주택사업에도 손을 댔다. 구로동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땅을 마련해 1백72가구의 아파트를 지어 분양한 것을 시작으로 76년 삼아건설이라는 회사를 사들여 한보주택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아파트 사업에 뛰어들었다. 78년 그는 성보그룹 윤장섭 회장으로부터 대치동에 있는 나대지를 당시로는 거금인 20억여원을 주고 사들여 은마아파트를 지어 대성공을 거둔다.
대치동 땅은 강남 개발 1세대인 장한평 농지개량조합 5인방 중의 하나인 윤 회장이 지난 60년대 초 헐값에 사들였던 땅(<일요신문> 586호 강남 부동산 붐 1세대 참조).
정태수씨가 그 땅에 은마아파트를 짓자 강남 땅값과 아파트값은 2차 폭발을 일으켰다. 이미 오를 대로 올랐다고 여겼던 강남 땅값이 은마아파트를 짓자 한 단계 더 뛰어오르면서 강남 아파트 불패 신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
은마아파트로 성공한 그는 훗날 또한번의 투기바람을 불러일으킨 수서아파트 때문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아파트로 흥하고 아파트로 망한 셈이다.
은마아파트의 성공으로 정씨는 수십억원대를 주무르는 ‘집장사’에서 수천억원대를 주무르는 ‘준 재벌’로 도약했다. 그는 이 돈을 바탕으로 84년 금호철강을 인수해 한보철강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이 과정에서 부인 이수정씨가 은마아파트 공사장 인부들에게 밥을 나르고 운영자금을 구해오는 등 열과 성을 다해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씨는 한보가 본격적으로 흥하던 83년 3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정씨는 첫째 부인이 낳은 큰아들 대신 둘째 부인이 낳은 셋째 아들 보근에게 한보그룹의 대권을 물려주려고 했었다.
▲ 99년 2월 국회 IMF 환란조사특위에 출석한 정태수씨. 청문회에서 ‘모른다’ ‘기억에 없다’란 말만 되풀이한 그의 입은 ‘자물쇠’로 통했다. | ||
정씨는 역술가들의 조언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보의 운명을 가른 한보철강 아산공장 기공식 날짜나 ‘태준’이라는 이름을 ‘태수’로 바꾼 것, 아들의 한자 이름 획수를 바꿔 개명한 것 등이 모두 역술가의 조언을 참조한 결과라는 얘기다.
빈농의 아들에다 학벌 배경도 없는 정씨의 사업 인생에 도움이 된 가장 큰 인맥은 공무원 인맥이다. 그는 유달리 공무원들과 정치인들을 챙겼다. 그리고 입도 무거웠다.
한보비리나 수서비리 수사과정에서 그의 입은 ‘자물쇠’로 통했다. 때문인지 당시 ‘정태수 돈은 먹어도 뒤탈이 없다’는 우스개도 나돌았다. 한보 비리 관련 청문회에 등장한 정씨는 마스크로 입을 막고 눈은 내려 감은 채 간간이 ‘모른다’와 ‘기억에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정도였다.
88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종목인 하키협회장을 지내면서 올림픽에 올인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친해지는 길을 찾아냈고, 광산업자 출신인 만큼 광업공사 사장을 지낸 김복동씨와 안면을 텄고, 5공 때는 대한노인회 중앙회관을 지어 기증하면서 당시 대한노인회장이던 이규동씨(전두환 전 대통령 장인)와 인연을 맺었다.
3공시절 세무공무원을 지내면서 맺었던 폭넓은 공무원 인맥과 5~6공 정부 실력자들과의 ‘돈독한’ 사이는 정씨 특유의 뒤탈 없는 로비력으로 버무려지면서 한보그룹을 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전성기로 이끌었다.
83년 효성그룹의 한인골프장(현 태광CC) 인수, 84년 금호철강 인수, 86년 종로1가 신신백화점과 화신백화점, 강릉 간호전문대(현 영동대학) 인수 등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하지만 90년대 초부터 그에게 빨간 불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91년 수서 택지분양 특혜 의혹 사건이 불거진 것. 은마아파트에서 대박 단맛을 본 정씨는 대치동 인근의 자연 녹지인 수서에 눈길을 돌렸다. 88년 무렵 임원 명의로 사놨던 자연녹지 3만5천여 평을 26개 직장주택조합에 팔았다. 하지만 건설부는 이 수서-대치 지구의 자연녹지 40만 평을 공영개발 택지지구로 지정해 놨기에 조합아파트 건설은 불가능했다.
이 대목에서 정씨는 요술을 부렸다. 3천여 명에 달하는 직장조합원들의 ‘민원’을 무기로 ‘관계요로’에 로비를 벌여 91년 1월 서울시의 특별공급 결정을 끌어냈다. 하지만 그 다음달인 2월 이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이른바 ‘수서 비리’가 터지고 정씨는 물론 국회의원 9명이 구속됐다. 그때부터 행운의 여신은 정씨를 비켜가기만 했다.
지난 96년 당시 한보그룹 총회장이던 정씨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가스전의 개발권을 보유한 러시아 회사의 지분 27.5%를 사들였다. 그러다 한보사태가 터지자 이 가스전 지분을 3백억원 정도에 영국 석유회사에 팔았다. 하지만 이 가스전의 매장량이 10억톤이 넘는 것으로 확인된 뒤 한보가 팔아치운 지분의 가치는 2조원이 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씨는 정부가 애초의 대출 약속만 지켰더라면 한보가 부도가 안났고, 러시아 가스전의 대박으로 오히려 제2의 중흥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97년 1월23일 한보철강이 자금난으로 부도난 뒤 그는 1월31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돼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2002년 6월 대장암을 이유로 형 집행정지를 받아 풀려났다.
한보 부도를 계기로 시작된 중견그룹 부도 사태는 결국 그해 여름 기아차 부도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는 IMF 관리체제로 들어갔다. 또 당시 현직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와 안기부 차장이었던 김기섭씨가 이 사건에 연루돼구속되는 등 여권 핵심에도 치명타를 안겼다. 물론 한보그룹도 공중분해됐고 정씨와 그의 아들 두 명은 총 2천4백억원이 넘는 세금을 내지 않은 상습고액체납자 명단의 맨 첫 번째 자리로 올라갔다.
출옥 뒤 정씨는 재기를 모색했다. 지난 2004년 5월 정씨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한보철강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의 입찰참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씨의 20년 꿈이던 한보철강 아산공장은 현대차그룹이 인수해갔다. 인천과 용인, 안산에 아파트를 짓고, 영월 폐광지역에 골프장을 세우고, 카자흐스탄 유전개발 사업에 뛰어들어 재기하겠다던 그의 꿈은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대신 교비 횡령이라는 불명예가 하나 더 추가됐을 뿐이다.
김진령 기자 kj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