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분당 차병원 홈페이지
혈액 유출 사건이 일어난 곳은 국내대형병원 중 하나인 분당차병원이다. 지난 9월 병원 진단검사의학과에서 근무하는 임상병리사를 포함한 직원 세 명이 “2년 동안 환자 4000여 명 분량의 혈액이 외부로 유출됐다”고 병원 내부에 고발했다. 3년 전부터 하루에 많게는 100개의 샘플을 찾으라고 지시했고, 검체 샘플에는 환자나이, 이름, 등록번호, 검사명, 검체결과까지 상세히 붙여 연구용으로 판매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실습 학생들이나 직원들에게까지 검체 샘플을 찾는 것을 지시했다고 알려졌다. 이후 있었던 복지부 조사 결과 지난 2014년 9월부터 월 200여 개의 혈액 샘플이 사라졌는데 이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이들이 유출을 주도했다고 지목한 사람은 이들의 팀장이었다. 이들의 팀장이 3년여 전부터 환자들의 건강상태 측정 등을 위해 실시하는 검사에서 나온 검체 샘플을 외부에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현행법상 혈액, 소변 등 병원에서 검사를 끝낸 검체는 다른 용도로 쓰지 못하고 의료용 폐기물로 버려야 한다. 의료용 폐기물의 경우 유해성이 높고, 2차 감염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단검사의학과의 팀장이 이를 2년 동안 의료기 및 진단용 시약 등을 만드는 업체에 빼돌린 정황이 확인됐다. 이들은 대가를 받지는 않았다고 부인하고 있다.
분당차병원은 지난 지난달 초에야 진단검사의학과 직원의 내부 고발로 이 같은 사실을 파악해 자체 감사를 거쳐 문제가 된 팀장 등 직원 3명을 파면했다. 병원 관계자는 “검체 폐기는 진단검사의학과 팀장이 최종 책임자라서 빼돌린 사실을 전혀 알지 못 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폐기물 관리 시스템을 개선할 계획”이라며 “직원들을 업무상 배임과 의료 폐기물 관리법 위반 등으로 분당경찰서에 고발 조치했다”고 말했다. 복지부 역시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환자 혈액 검체 유출과정에서 환자 개인 정보 유출 여부와 금품 전달 여부에 대해 수사를 의뢰했다.
혈액을 환자의 개인정보라고 보기보다 폐기물로 보는 인식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지역보건소는 지난 9월 반출된 혈액 검체의 종류와 환자정보가 게재돼 있는지의 여부 등을 조사했다. 그러나 병원 측이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을 전면 부인하고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자 의료법은 위반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보건소는 폐기물 관련법 위반만 보고해 복지부에서는 얼마 전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보건소 관계자는 “의료법 위반 사실이 확인되면 관련법에 따라 처리할 뿐이지 별도의 보고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개인정보가 담긴 혈액의 무단 도용을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익명처리가 됐거나 폐기가 된 혈액이 당장 환자에게 해가 될 가능성은 낮지만 환자 정보보호 규정과 생명윤리법을 어긴 것이다”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불안한 것은 환자들이다. 혈액에는 사람 고유의 유전자 정보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2년 동안 유출된 혈액은 2000여 명의 환자분인 데다가 이미 이 혈액이 시약 개발에 전부 쓰인 것으로 알려진 상황이다. 또 제보자들에 따르면 에이즈나 인플루엔자 검사가 나온 환자들의 검체 샘플도 포함됐다. 이 샘플은 염증 수치가 높거나 세균에 감염된 환자의 혈액이라는 것이다.
병원 관계자는 “아직 염증에 감염된 혈액이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한 상태다. 혈액을 시약 개발에 활용한 업체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질병을 검사하거나 소형병원 등에서 간편하게 질병을 진단하기 위한 테스트 제품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품들은 혈액 한 방울로 혈당, 콜레스테롤 등의 대사성질환을 신속하게 검사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제품을 개발할 때 혈액이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업체는 연 매출 수백억 원을 기록하며 빠르게 성장했는데 그동안 사용됐던 혈액 일부가 차병원에서 빼돌린 혈액으로 알려져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보통 시약개발 회사에서는 환자의 동의를 구하고 의료기관으로부터 혈액을 제공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약업계 종사자 이야기를 들어 보면, 비용 절감이 가장 컸을 것으로 보인다. 시약업계에 따르면 혈액 샘플을 구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든다. 혈액 샘플을 제공하는 병원에 연구비를 지급해야 하고 윤리위원회 허가와 환자들 동의가 있어야 제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들 중에서도 불임 치료를 받는 여성들은 본인의 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에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 차병원은 여성병원으로 유명한 만큼 불임 치료를 위한 여성들이 많이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여성들은 자신의 정보가 유출됐을까봐 걱정을 하고 있지만 유출 여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병원에 다녔던 여성 이 아무개 씨는 “이 병원은 규모가 크고 불임치료로 유명해 다른 지역에서 찾는 경우도 많다”며 “환자의 단순한 신상정보가 아니라 유전자와 혈액이 동의 없이 쓰였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말했다. 또 다른 환자 역시 “이 사실을 알기 전에도 이 병원에서 피검사를 할 때 유독 피를 많이 뽑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혹시 내 피를 외부에 유출하려는 목적으로 많이 뽑았던 것은 아닌가 의심이 된다. 앞으로 다른 병원에서도 피검사를 할 때 꺼려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병원뿐만 아니라 다른 대형병원에서도 불법 혈액 샘플 유통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보건당국은 병원의 내부 조치가 끝난 뒤에야 검체 유출 정황을 알게 됐고 병원은 지난 2년 동안 유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