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훈 한나라당 전 의원이 지난 9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2년 전 총선 불출마 선언 때(왼쪽사진)와 무엇이 달라졌기에 말을 바꾼 것일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9일 오세훈 전 의원이 “국민들과 당원들의 성원을 안고 서울시장 후보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2004년 1월초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지 꼭 2년 3개월만의 정계 복귀 선언인 셈이다.
‘오풍(吳風)’의 위력은 곧바로 발휘됐다. 단독 질주를 거듭하던 강 전 장관의 지지도를 단숨에 따라잡았고, 박계동 박진 의원 등의 사퇴 선언이 줄을 이었다. 핸섬하면서도 매너 좋은 ‘스타 변호사’ 오세훈은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더하면서 출발부터 무서운 질주를 가하고 있다. 오히려 오 후보 측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실제 그의 질주에 강력한 브레이크를 거는 파열음도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총선 불출마 선언에서 서울시장 후보 출마 선언 과정이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 전략이라는 비난도 뒤따른다. 정계 복귀 과정의 말 바꾸기와 정치 입문 과정의 저울질하기 행동이 ‘기성 정치인’과 다를 것이 없다는 혹평도 나오고 있다.
지난 2000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서울 강남을 지구당에서 오 후보의 선거 운동을 도왔던 서울 시의원 출신의 한 인사는 “오 후보의 정치적 야망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30대 후반의 정치 신인으로 국회의원 당선도 확신할 수 없었던 그 시기에 이미 서울시장과 대통령이라는 더 큰 꿈을 얘기하더라”는 것.
그래서일까. 그가 재선이 유력하게 점쳐지던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를 하면서 한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말을 남기고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자 많은 국민들은 아쉬움 속에서도 그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혼란스런 마음으로 이런 모습을 지켜본 이들도 많았다.
정치판의 생리상 그의 불출마 선언은 많은 의혹을 양산시켰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차기 서울시장 출마설이었다. 이는 여러 경로를 통해 설득력 있는 가설로 제시됐다. 서울시장 출마를 위해서라면 어차피 국회의원직을 버려야 하니 그 전에 미리 모양새 있는 불출마 선언으로 이미지를 올리겠다는 전략이 아니냐는 시각이었다.
일각에는 이명박 시장의 대권 캠프에 그가 뛰어들 것이란 얘기도 항상 따라다녔다. 그를 ‘명박계’로 분류한 까닭이다. 실제 오 후보가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원했으나 이 시장 측에서 부담스러워 거절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에 대해 오 후보 역시 “사실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그런 소문이 나게 된 근거는 있다”고 인정했다. 그는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내가 이명박 캠프의 대변인으로 참가했는데, 한때 이 시장의 지지율이 주춤하면서 위기를 겪었을 때 당내에서 ‘이명박-오세훈을 시장-부시장 러닝메이트 후보로 내세우자’는 주장이 있었다. 이를 당시 이회창 총재가 반대했다. 그래서 항간에는 내가 부시장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차기 서울시장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오해가 많았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총선 불출마 선언 당시 그는 완전한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오 후보가 당시 보인 입장에서도 모호한 태도가 드러난다. 그는 불출마 선언 직후 가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계 은퇴로 봐도 된다. 40대의 초선 의원이 은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맞지 않은 듯해서 ‘불출마’라는 말을 썼을 뿐 은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것이 정계 복귀의 여지를 남겨두는 말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 지난 2003년 연말 정치인 중 베스트 드레서로 뽑힌 오 전 의원. | ||
그런데 당시 인터뷰에서 눈여겨볼만한 대목이 발견된다. 서울시장 출마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다. 2년 전 이 인터뷰에서 그는 “서울시장직을 한번 해볼 만한 자리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하려면 정치를 잘 해야 한다. 당내 정치 말이다. 그런데 도저히 당내 정치를 잘 할 자신이 없어 못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준비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며, 준비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다른 자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려고 불출마 선언을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준비되지 않고 비전 없는 사람이 중책을 맡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야당 의원 4년 한 것은 서울시장감으로 충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출마 선언을 서울시장 출마에 갖다 붙이는 것이야말로 기성 정치권적 시각”이라고 반박했다.
오 후보는 정확히 2년 만에 결국 서울시장 후보 출마를 선언하면서 “서울시의 문제점들에 대해 많은 고민과 구상을 했다”고 밝혀 2년 전 자신의 발언을 스스로 궁색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동안 사실상 서울시장 후보를 준비한 것 아닌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지자 “딱히 정계복귀를 의도한 건 아니다. 지난해 말부터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이후 시정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고 해명했다.
오 후보가 정치권에 정식 입문한 것은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이었다. 그는 원희룡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입당했다. ‘스타 변호사’ 2명을 한꺼번에 영입한 한나라당은 환호작약했고, 대신 민주당은 “우리 당에 오기로 해놓고 배신을 했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당시 민주당 인사들은 오 후보에 대해 “깨끗한 이미지와는 다르게 여야를 기웃거리며 유리한 지역구를 찾아다녔다”고 비난했다.
오 후보가 선거판에서 처음 이름이 거론된 것은 96년 15대 총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YS와 DJ로 대표되는 두 거물 정치인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치러졌던 총선에서 각 당은 참신한 새 인물을 경쟁적으로 영입했고 특히 방송인과 변호사는 영입 1순위였다. 그런 면에서 당시 방송을 통해 ‘스타 변호사’로 명성을 높이기 시작하던 오 후보는 여야 모두에게 러브콜을 받기에 충분했다.
당시 오 후보는 YS가 이끄는 민자당 후보로 서울 광진을에서 출마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출마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평소 존경하는 선배 변호사였던 홍성우 후보의 서울 강남갑 선거 유세를 돕기 위해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자원봉사로 나섰다. 당시 홍 후보는 DJ가 이끄는 민주당 선대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이후부터 그의 이름은 민주당 주변에서 자주 거론됐다.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새 정권의 ‘섀도우 캐비닛’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민주당의 중진인 정균환 전 의원이 그의 영입을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것은 정설이다. 99년 송파갑 보궐선거에 국민회의(민주당 전신) 후보로 나설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역시 당시에도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그는 2000년 총선에서 민주당의 ‘젊은 피’로 영입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오 후보 부친의 고향이 호남이었다는 점도 고려됐음 직하다.
그런 상황에서 2000년 1월 오 후보가 전격적으로 한나라당 행을 선택했던 탓에 그의 진로가 여야 간의 감정 격돌로 비화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총선 불출마 선언 이후 한 인터뷰에서 “민주당에서 먼저 나를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나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라며 거절의 입장을 밝혔다. 좋은 지역구를 얻기 위해 여와 야를 기웃거렸다는 민주당 측의 비난은 사실이 아니며 따라서 당시 내가 민주당의 김민석 대변인에게 이를 강력히 항의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그는 당시 어떻게 한나라당 행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었다. 그는 “이 총재는 정치인 보다는 법조인으로 무척 존경하는 분이었고 내 인생의 모델 케이스였다. 그런 이 총재의 권유를 거절하기 힘들었다”고 밝혔다. 실제 이 총재의 극진한 배려로 그는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 가능성이 높은 강남을 지역구로 배정받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