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룡 한나라당 의원 | ||
김덕룡 의원은 서울 서초구청장 공천과정에서 자신의 부인이 시의원 부인으로부터 4억 4000만 원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모두 인정한 뒤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주장처럼 그가 이번 사건과 무관한지는 검찰 수사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40여 년 동안 부지런히 갈던 ‘밭’을 떠나려는 결심은 확실한 것 같다는 전언이다. ‘3김 시대’를 관통하며 한국 정치를 풍미했던 DR. 그 쓸쓸한 퇴장의 뒤안길을 거슬러 가본다.
김덕룡 의원은 어떤 점에서 보면 ‘회색빛’ 정치인이다. DR만큼 사람들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정치인도 드물기 때문이다. DR을 뭔가 어두운 ‘검은색’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를 “음흉하고 속을 잘 알 수 없는 정치인”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를 투명한 ‘흰색’의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은 “순수하고 솔직 담백한 정치인”으로 평가한다. 양측의 인물 평가를 들어보면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주장들이다. DR을 ‘회색빛’ 정치인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가 ‘검은색’과 ‘흰색’이 고루 섞인 ‘이중적인’ 정치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 ‘회색’은 부정적인 의미다. 왜 그를 ‘회색빛’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는 ‘영남 본색’의 한나라당에서 유일한 호남(전북 익산) 출신 중진이었다. 하지만 그는 ‘영남이냐, 호남이냐’는 한나라당 특유의 ‘흑백논리’에 눌려 언제나 호남 출신의 설움을 되씹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불운한 정치인이었다. 영남 일색의 한나라당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자신을 ‘회색’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70년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 뒤 18년 동안 철저하게 YS의 그림자로 활동했다. 그는 YS의 공보비서를 지내면서 무거운 입과 뛰어난 지략으로 ‘3선급 원외’라는 최고의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호남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다른 보좌진보다 훨씬 늦게 국회에 입성했다(1988년 13대 서울 서초을 당선). 그에게 찾아온 첫 번째 태생적 한계의 쓰라림이었다.
그럼에도 1990년 3당 통합 후 정무장관과 집권 민자당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YS의 측근 실세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를 잘 아는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YS의 오른팔이었던 김동영 전 의원(작고)이 DR을 무척 아꼈다. 김 전 의원은 자신이 한창 실세로 활동할 때 ‘다음은 덕룡이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로 DR을 아꼈다. DR은 ‘민주계 대망론’의 한 복판에 있었다. 하지만 ‘후견인’ 김 전 의원이 사망하자 그에게 시련이 몰아치기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잘나가던’ DR은 영남권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김현철 씨의 ‘국정 개입’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내다가 결국 권력의 뒤편으로 나앉고 말았다. 그 뒤 그는 지금까지도 ‘비주류’로 살아왔다.
물론 그에게 몇 차례 재기의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지난 1997년 대선 때는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 대통령 예비후보 9룡 중 한 명으로 경선에 나섰으나 이회창 이인제 이한동 후보에게 밀렸고 이후 세 차례나 당권에 도전했으나 모두 참패했다. 그 뒤 17대 국회 들어 첫 원내대표를 맡아 비로소 ‘작은 꿈’ 하나를 이뤘지만 보안법 파동 끝에 10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의 쓴잔을 맛보아야 했다. 이때도 영남권 보수성향 중진들의 끊임없는 흔들기에 DR이 희생된 것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왜 영남 의원들은 DR을 그토록 못마땅하게 생각했을까. 여기에는 영남권 보수성향 의원들의 ‘본능적 거부감’이 숨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DR을 ‘검은색’ 눈으로 본다. 그들은 공공연히 “(호남 출신) DR은 무조건 안돼”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같은 중진으로서 DR의 독주를 제어하겠다는 ‘정치 공학적’ 논리 외에 그가 ‘그냥’ 호남 출신이기 때문에 싫다는 ‘혐오증’이 작용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 지난 13일 한나라당 긴급 의원총회에서 김덕룡 의원(오른쪽)이 신상 발언을 한 후 이재오 원내대표, 박근혜 대표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 ||
DR은 40여 년 동안 영남세력들에 둘러싸여 억울한 점도 많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생존전략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을 지켜줄 방어기제로 넓은 인맥과 자기 사람 챙기기에 온갖 열정을 쏟았다. DR을 투명한 ‘흰색’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의 인맥 만들기와 측근 챙기기 등을 특장점으로 꼽는다.
그는 현역 의원 중 매우 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정치인 중 하나로 꼽힌다. 실제로 한 언론의 조사결과 가장 네트워크가 강한 정치인 수위에 DR이 올랐다. 그의 한 측근은 “지난 2004년 3월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이재정 전 열린우리당 의원이 구속됐을 때 가장 먼저 차입금을 넣어준 사람은 열린우리당 사람이 아니라 바로 DR이었다. 최근까지도 그는 하루에 저녁을 세 번 먹을 때도 있었을 만큼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그의 ‘탁월한’ 술 실력도 한몫했다. 환갑을 넘긴 DR이지만 여전히 양주 스트레이트에 폭탄주를 즐긴다.
DR은 사람 챙기기에 관한 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2004년 6월 박근혜 대표 체제 출범 뒤 사무처 당직자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그때 살아 남은 100여 명의 당직자 중 70%가량은 ‘DR 사람’이라는 해석이 당내 정설이다.
지난해 치러진 10·26 국회의원 재선거는 DR의 ‘자기 사람에 대한 집착’을 새삼 느끼게 해줬다. DR은 당시 경기 광주에서 출마하려는 정진섭 경기도지사 특보를 위해 공천 및 선거 과정에서 자기 일처럼 열심히 뛰었다. 같은 지역구에 40년 지기인 홍사덕 전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DR은 홍 전 의원의 도움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뒤 자신의 ‘집사’ 역할을 해왔던 정 후보를 공천하고 직접 선대본부장까지 맡아 결국 그를 당선시켰다. 당시 DR은 7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도전을 심각하게 고려 중이었기 때문에 ‘자기 사람’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가 이번에 공천 비리 파문에 연루된 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과도한 제 사람 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전문가는 이에 대해 “오는 7월 한나라당 대표 경선이 치러진다. DR이 대표가 된다면 킹메이커를 노려볼 수 있다. 또한 한나라당에서 보기 드문 호남 출신 중진이므로 내각제나 정·부통령제 개헌이 이뤄지면 여야 정계개편의 중요한 축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DR이 그런 계산을 왜 못했겠나. 그의 ‘야심’이 너무 지나쳐 무리한 공천을 했고 측근들도 정치자금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DR은 매사에 치밀했고 자기관리도 매우 철저한 편이었다. 그를 잘 아는 한 의원은 “DR은 민추협 시절에 항상 동전을 주머니 가득 가지고 다녔다. 도청을 피하기 위해 늘상 공중전화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 밑에서 정무장관을 할 때는 ‘빨간색 펜의 사나이’였다. 실무진들의 보고서는 그의 꼼꼼한 ‘게이트 키핑’에 걸려 새빨갛게 변하곤 했다. 얼렁뚱땅 일 하는 법이 없었다. 요즘도 그는 매일 새벽에 목욕탕에서 반신욕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 지난 90년 민자당 통합을 준비하던 시절의 김덕룡 의원(왼쪽). 아래 사진은 지난 95년 민자당 사무총장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는 모습. | ||
DR은 “정치생활로부터 가정만큼은 보호해야 한다는 게 나와 집사람의 확고한 생각이다”라는 말을 늘 하고 다녔다. 그런데 이번 공천 파문은 그의 부인이 ‘헌금’을 받았던 게 말썽이 되고 있다. 일부에서 DR이 부인의 공천 헌금 수수 사실을 정말 몰랐다고 말하는 부분을 일견 수긍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돈에 관한 한 교도소 담장 위에 서 있는 정치인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가 왜 공천 비리에 ‘엮이게’ 된 것일까. DR을 잘 아는 정치인들은 그의 치밀한 성격을 생각해 볼 때 이번 사건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혀를 찼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돈에 관한 한 DR은 지독할 정도로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독재정권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 밑에서 18년 동안 비서로 일했는데 돈 문제를 소홀히 했겠는가. 그는 지금도 절대 수표를 쓰지 않는다고 들었다. 요즘도 보좌진들에게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을 때 대가성이 있는지 꼼꼼히 따져 보라’고 항상 주의를 주곤 했다”고 밝히면서 “그런 DR이 가장 비리 소지도 많고 조심하는 공천 문제에 연루되었다는 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당내에선 사실 이번 공천 비리 혐의도 부인이 직접 연루된 것이고 DR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내자의 문제도 모두 내 책임’이라는 말을 남긴 채 그는 두문불출하고 있다. 공천 비리 문제가 터졌을 때 그는 측근들을 모아놓고 “정계은퇴를 하겠다”고 했지만 주변에서 극구 말렸다고 한다. DR과 친분이 깊은 한 의원은 “임시국회 회기가 끝난 후 의원직 사퇴를 검토하는 것으로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흐름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의총 발언 뒤 눈물을 흘린 최구식 의원은 “DR이 현역 의원 중 가장 큰 자취를 남긴 정치인이었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로 의원직을 마감하는가 싶어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나왔다”고 밝히면서 “17대 원 구성 직후 여당의 ‘오만’이 대단했다. 한나라당을 협상 파트너로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때 DR은 야당의 협상단을 이끌면서 여당과의 전투에서 선전해 지금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초석을 만들었다고 본다. 그의 정치력을 높이 사야 한다”고 말한다. 최 의원의 시각대로라면 한나라당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뛰어난 전략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도 볼 수 있다.
정치판에서 ‘회색빛’은 모호하고 기회주의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DR의 ‘회색빛 정치’는 한나라당 내에서 ‘비 영남 배제’라는 흑백논리에 맞설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회색빛으로 비칠 만큼 DR의 야심이 깊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40여 년간 그려진 DR의 자화상에서 현재 대다수 국민들이 떠올리는 것은 공천 비리로 일그러진 모습뿐이다. 파문의 한가운데 선 ‘공인 김덕룡’이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짐이기도 하다.
이 같은 현실이 못내 안타까웠기 때문일까.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DR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비록 공천 비리로 정치판을 떠나게 됐지만 영남 순혈주의가 판치는 한나라당에서 그가 보여준 ‘혼혈’의 열정만은 제대로 평가해줘야 할 것 같다. 지금은 그저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