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걸씨가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으며 지난 16일 검찰에 출두하고 있다. 부모와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힘없이 내뱉었던 그는 지난 몇해 지근거리에 있었던 최규선씨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이종현 기자 | ||
그런 홍걸씨가 지난 2000년 이후 각종 이권 개입을 통해 최소한 30억원 이상의 검은 돈을 챙겼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주변에서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언제부터 그런 ‘배포’가 생겼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얘기다.
한 동교동계 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홍걸씨는 동교동에 살 때 다른 사람들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나이도 어렸지만 성격 자체가 굉장히 폐쇄적이었다. 일부 비서들 하고만 이야기를 하곤 했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는 대통령에게 말도 하지않고 서울에 왔다가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 오라고 해도 그냥 출국했던 경우도 있었다.”
홍걸씨의 성격과 생활상은 김 대통령의 집권 초기인 98년부터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당초의 성격이 변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인관계를 꺼리던 당초의 성격은 유지됐지만, 그 전에 보이지 않았던 뜻밖의 대담성과 사치를 즐기는 ‘또 다른 얼굴’이 드러나게 된다. 권력을 탐하는 인사들이 홍걸씨의 주변에 꼬여들면서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면 타락하기 더 쉽다는 속설이 맞아 떨어지는 케이스다. 실제로 여권 핵심인사들은 이제 홍걸씨가 돈을 받은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홍걸씨가 적극적으로 이권에 개입한 게 아니라 최규선씨에 의해 ‘얼굴마담’으로 이용당한 게 사건의 진상이라고 주장한다.
홍걸씨는 평범치 못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한 부친을 둔 탓에 온갖 곡절을 다 겪었다. 그 특이한 성장과정에서 한 내성적인 젊은이가 국민의 지탄을 받는 ‘황태자’로 전락하게 되는 곡절을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그는 김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에게 늦둥이 막내 아들이다. 1963년 11월12일생인 홍걸씨가 태어날 때 김 대통령은 38세, 이 여사는 41세였다. 홍일, 홍업씨는 김 대통령의 전처 소생 아들들인데 비해 홍걸씨는 이 여사의 피붙이다. 김 대통령 부부는 독재정권 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 와중에서도 홍걸씨만큼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DJ는 80년 신군부 치하의 감옥 속에서 쓴 <김대중 옥중서신-민족의 한을 안고>(1984년 8월 발간)에서 홍걸씨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곳곳에서 표현했다. “어린 시절과 사춘기의 너에게 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할 때 언제나 너에게 본의 아니게 못할 일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절절하게 적기도 했다.
그만큼 홍걸의 어린시절은 파란만장하다. 초등학생 시절에 ‘DJ납치 사건’을 겪었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납치돼 바다에서 수장될 뻔하는 끔찍한 현실을 경험한 것이다. 이어 중학생과 고등학생 때인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에 걸쳐서는 아버지의 ‘투옥’ ‘가택연금’ ‘내란음모 사건으로 인한 사형선고’ 등으로 고통을 받는다. 게다가 이복형인 홍일, 홍업씨와는 나이가 십수세 차이가 난다. 형들의 대화 상대가 될 수도 없었다. 당연히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고집스럽고 소심한 성격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경험들이다.
▲ 최규선 씨 | ||
김 대통령이 ‘옥중서신’에서 묘사한 홍걸씨의 성격은 ‘김홍걸 게이트’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랑하는 홍걸아, 항시 아버지가 말하지만 너는 어렸을 때부터 남이 갖지 못한 장점이 있다. 첫째는 거짓말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둘째는 남의 흉을 보거나 고자질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 셋째는 한가지에 열중하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끈기를 가지고 몇 년이고 이에 매달리는 데는 놀랄 수밖에 없다… 물론 너에게도 단점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웃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점이다.”
내면 세계의 벽을 깊이 쌓으면서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청소년 홍걸이’의 모습이 읽혀진다. 따라서 홍걸씨가 친구가 많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게 일부 청와대 인사들의 한탄이다. 최규선씨의 터무니없는 ‘물량 공세’에 대해 주변과 상의라도 했다면 초기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청년기도 ‘방황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82년도에 입학했지만, 11년만인 93년에 졸업을 한다. 홍걸씨는 82년 12월에 고대를 휴학하고 신군부 치하의 국내를 떠나 망명길에 오르는 DJ와 이 여사를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간다. 거기서 6년을 보내지만 변변한 학위를 따거나 직장을 다니지도 못했다. 에모리대 출신인 이홍구 전 주미대사의 소개로 에모리대학에 다녔을 뿐이다. 홍걸씨는 올해까지 미국에서 한 번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다만 청년이 된 홍걸씨는 ‘정치’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게 화근이었는지도 모른다. 부모의 예감인가? 김 대통령 부부, 특히 이희호 여사는 홍걸씨가 정치에 눈길을 돌리는 것을 극구 말렸다고 한다. 에모리대학 시절 홍걸씨는 한국의 시사잡지 등에서 정치기사를 탐독하다가 이 여사에게 “쓸데 없는 책을 본다”고 꾸중을 듣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학구열이 높지 않았다는 게 홍걸씨를 아는 사람들의 평가다.
홍걸씨는 88년에 귀국한 이후에도 별다른 행적이 없다. 93년 부인 임미경씨(36)와 다시 도미할 때까지 고대를 졸업한 게 유일한 이력서다. 홍걸씨는 큰 아들 종화(8)와 작은 아들 종섭(6)도 미국에서 낳았다. 93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94년 LA 남가주대(USC) 국제정치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지만 이 역시 졸업은 2000년에 한다.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는 데 꼬박 만 6년이 걸린 셈이다. 어린 시절 명민했던 홍걸씨가 남들은 2년이면 따는 석사학위를 3배가 걸려서 취득한 것은 그만큼 정신적 방황이 심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주변에 친구나 지인도 ‘한 줌’이었다. 여권내에서도 고대 선배인 설훈 의원, 동년배인 장성민 전 의원(전 청와대 상황실장)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걸씨가 십수 년을 생활했던 미국에도 지인은 많지 않다고 한다. 홍걸씨 부부와 현재까지 가깝게 지내는 LA인사는 98년 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을 지냈고 현재는 LA지역 평통협의회 부회장인 김병창씨라고 한다.
김씨는 이 여사의 먼 친척뻘이라고 한다. 김 대통령 취임 후 이 여사의 ‘특별한 부탁’을 받은 김씨가 홍걸씨의 미국생활을 돌봐준 것으로 여겨진다. 김씨는 ‘최규선 게이트’가 터진 다음에는 홍걸씨의 두 아들을 학교에서 집으로 데려다 줬다는 후문이다. 이밖에 USC 재학시절 만난 윤석중 전 청와대 해외언론담당 비서관, 제임스 방 변호사 등이 꼽힌다. 윤씨는 이신범 전 의원과의 소송에서 홍걸씨의 소송 대리인 역할을 했고 방 변호사는 변호인 겸 대외창구 역을 맡았다.
93년부터 시작된 두 번째 미국생활도 초기에는 검소했다고 한다. 94년 LA 남가주대(USC) 국제정치학과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글렌데일의 월세아파트에 살았고 승용차도 소형 ‘왜건’이었다. 1년 여 뒤인 95년 5월쯤 토랜스에 단독주택을 매입하게 된다. 한나라당 이신범 의원은 이 집을 호화주택이라고 폭로했지만 사실은 평범한 집이다. 집 값은 34만 5천달러였는데 25만 8천달러는 은행융자였다. 방 3개로 홍걸씨 부부와 두 아들이 살기에 적당한 수준이다. 80년대 초 김 대통령의 미국망명시절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통해 교분이 있었던 최병구씨가 보증을 섰다고 한다.
15대 대선이 실시된 97년에 홍걸씨는 현실정치에 잠깐 발을 들여놓았다. 몇몇 인사의 손에 이끌려 인권문제연구소 회의에 참석했고, 서울행도 부쩍 늘었다. 일부 인사들은 당시 홍걸씨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걸씨의 미국내 후원자로 알려진 조풍언씨와의 관계도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시기라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홍걸씨는 97년 일시 귀국해 그 해 대선에서 나름대로 ‘여론 분석팀’을 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팀에는 장성민 전 의원, J 교수, 변호사 제임스 방씨 등이 참여했고, 여의도의 한 호텔에서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2000년 4·13총선 공천과정에서는 홍걸씨가 당시 탈락위기에 처한 모 인사의 부탁을 받고 모친인 이 여사를 통해 공천을 성사시켜줬다는 얘기도 돌았었다.
▲ 한 행사에 나란히 참석한 홍일 홍업 홍걸 삼형제. | ||
홍걸씨가 2001년 3월13일부터 6월26일까지 3개월 반 동안의 23만3천9백86달러(한화 3억4백18만원)를 사용했던 LA 한인은행의 금융자료가 이신범 전 의원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한달 평균 6만달러 이상의 돈을 썼던 셈이다. 이 해에 홍걸씨는 일제 고급 승용차인 렉서스 신형을 구입해서 몰고 다니기 시작한다. 한나라당측 주장에 따르면 이 차의 가격은 8천여만원(6만5천달러)에 달한다. 홍걸씨는 이 차 말고도 3대의 승용차를 굴렸다는 게 이신범 전의원의 주장이다.
홍걸씨는 최씨가 쉴새없이 제공하는 ‘현찰’을 별 생각없이 받아서 써버렸던 것 같다. 최씨가 검찰 출두에 앞서 녹음 테이프를 통해 폭로한 ‘3억원’에 대해서도 홍걸씨는 청와대 관계자에게 처음에는 “기억에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받은 것 같다”고 밝혔다. 그 3억원은 최씨가 2001년 3월에 줬던 것으로 드러났다. 홍걸씨가 당초 거짓말을 했다기보다 개념없이 돈을 흥청망청 썼기 때문에 기억이 안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2000년 총선을 전후로 해서는 미국을 방문한 여권 중진 인사의 공천 청탁설, 입각 인사청탁설 등이 홍걸씨 주변을 돌아다녔다. 홍걸씨는 그 때부터 거의 매달 국내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도 항상 ‘특1등 좌석’ 을 예약해서 탔다는 것이다. 특1등석은 대기업 총수들이나 타는 자리다. 모든 비행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홍걸씨는 특1등석이 있는 비행기가 뜨는 날을 잡아 서울에 들어왔다고 한다.
큰형인 김홍일 의원과의 사이도 급속도로 나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 의원은 2000년 초반에 홍걸씨가 최규선씨와 어울려 벤처투자회사를 설립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심하게 홍걸씨를 꾸짖었다고 한다. 김 의원의 한 측근은 “김 의원이 홍걸씨를 수차례 야단쳤다”고 전했다.
그러나 홍걸씨가 지난 2년 동안 최씨와 어울려 다니면서 정부 고위인사나 여권 실세를 상대로 직접 로비를 시도한 흔적은 없다. 정부 고위직을 지낸 민주당의 한 인사는 “홍걸이가 국내에 들어오면 종종 마주쳤다. 그러나 홍걸이가 한 번도 청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잘지내냐’고 물어보면 ‘예’라고 대답하고 가버렸다. 민원이라도 했어야지 뭔가 잘못되는지 알지 감도 못잡았다”고 토로했다.
홍걸씨가 최씨 소개로 기업인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기업체 사장들이 홍걸씨를 만나서 뭔가를 설명하면 홍걸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단 홍걸씨를 만나고 나온 기업인들은 거의 최씨에게서 모종의 거래를 제의받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따라서 최씨가 홍걸씨를 ‘얼굴마담’으로 세워놓고 이권 거래를 한 것이 ‘홍걸 게이트’의 진실에 가깝다는 게 청와대측 해명이다.
물론 김 대통령은 홍걸씨 문제에 대해 적지않게 보고를 받았다. 때로는 홍걸씨를 불러서 추궁하고 질책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홍걸씨는 자주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강하게 부인하거나 “왜 나를 믿지 않느냐”며 뛰쳐나가서 미국으로 가버리는 식으로 반항했다는 얘기다. 2000년 7월에 김은성 당시 국정원 2차장이 김 대통령에게 홍걸씨 문제를 보고한 뒤에 홍걸씨는 최규선씨와 함께 김 차장을 불러내 ‘협박’에 가까운 항의를 했다는 풍설도 있다. 최씨를 한때 보좌관으로 뒀던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도 최씨와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홍걸씨도 함께 불러 “이제 두 사람도 만나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결국 막내 아들의 말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김 대통령이 한번은 권노갑 고문에 대해 좋지 않은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자 김 대통령은 보고를 한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보고가 있다’고 쏘아붙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권 고문의 경우가 그랬다면 아마 홍걸이에 대한 보고가 제대로 먹혔을 리가 없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이희호 여사의 아들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더 각별했다. 98년 초 원로 법조인 J씨가 김 대통령 부부와 식사를 하다가 “집권 기간동안에 세 아들이 청탁을 받지 못하도록 외국에 보내라”고 건의하자 이 여사는 “그런 얘기하려면 청와대에 들어오지 마세요”라고 쏘아 붙였다는 설도 나돌았다.
홍걸씨는 지난 15일 귀국하기 전에 청와대 관계자에게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게 귀국해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미 노벨상을 받은 아버지의 ‘부끄러운 아들’이 돼버렸다.
전인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