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나오는 김희완씨.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전 서울시 부시장 김희완씨가 검찰 수사망을 피해 사라지기 전 주변사람들에게 했다는 얘기다. 내가 입을 열면 권력 중심부가 흔들린다는 협박인 셈. 그러나 그는 잠적 39일만인 5월19일 붙잡혀 지금 심문을 받고 있다.
그의 호언대로 그는 최규선 게이트의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비밀을 어디까지 털어놓을 것인가. 세상은 김희완의 입을 주목하고 있다. 대체 그는 어떤 인물인가.
김희완, 국회의원 선거에선 세 차례 낙선, 의회진출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냈고 정당을 전전하면서도 언제나 햇볕아래 머물며 정치엘리트를 자처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가면이 벗겨지면서 거짓으로 가득 찬 기회주의 출세주의자들, 그들의 온상인 한국 정치문화의 단면을 드러냈다. 이제 그가 달린 출세가도를 추적해 보자.
중동고, 연세대 정외과 출신, <중앙일보> 출판국 여성지 기자로 일하다 85년 신민당 총재 이민우 의원 비서관으로 정치의 거리에 첫발을 디뎠다.
그 무렵 그는 정치 입문을 안달해, 신문사 한 선배에게 정치인과 연결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는 실력자의 비서나 정당의 당직을 원했다. “당에 가면 월급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도 편법으로 살아가는 원외 당원의 길을 본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를 그 선배는 묻고 다짐받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민우 총재 비서로 가게 됐다고 그가 말했다. 이 총재의 조카이면서 비서였던 이준영이 함께 일하자며 자신을 이 총재에게 추천했다는 것. 그런데 그 선배가 며칠 뒤 이 총재를 만나 김희완 얘기를 했더니 금시초문이라는 것. 결국 김희완에 대해 말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추천인이 되었다. ‘믿을 만하냐’ ‘영어를 잘 하느냐’ 두 가지가 이 총재의 관심. 둘 다 보증한다는 다짐을 받곤 비서로 데려갔다.
같은 시기 이 총재는 홍사덕 의원을 대변인으로 받아들였다. 처음 홍 의원을 대변인으로 추천받았을 때 이 총재는 주저했다. 기성정치인을 정치정화법에 묶어놓고 정치편성을 하던 때 정계에 입문한 81년산(産) 정치신인들은 대부분 전두환 군부의 추천케이스들. 홍 의원도 그런 부류일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총재는 홍 의원을 추천한 사람에게 YS가 받아들일까 걱정했다. 그리고 YS 의중을 타진한 뒤 대변인으로 기용했다.
홍 대변인, 김희완 비서, 이 두 사람은 이민우 총재의 브레인 역을 했다. 그리고 끝내 문제를 일으켰다. 문제란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으로 실질적으로 신민당을 이끌고 있던 YS DJ에게 이 총재가 맞선 사태.
문제의 발단은 개헌. 전두환 정권의 내각제와 야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운동이 맞부딪치고 있던 때 이 총재는 두 김씨와 사전의논도 없이 내각제로 타협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띄워 올렸다. 두 김씨는 당론과 다르다는 이유로 즉각 철회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 총재는 듣는 것도 거부도 아닌 철회와 되살리기 사이를 오가며 수렴청정하던 두 김씨에게 도전한 것.
대립은 결국 파국으로 결말났다. 두 김씨가 이민우 총재만을 남기고 소속 의원들을 이끌고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떠남으로서 신민당과 이 총재는 침몰한 것이다.
이민우 침몰에 두 사람을 연관시키는 것은 내각제도 수용할 수 있다는‘이민우 구상’에 두 사람이 깊이 관련되었다는 것 때문이다. 당시 두 공보 브레인은 이민우 구상을 예고했고 적극 홍보했다. 일부에선 이민우 총재보다 홍·김 두 사람이 권력 중심부와 연결돼 이 총재를 오도하고 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 지난 99년 송파 재선거에 나서면서 당시 자민련 박태준 총재를 통해 포스코 쪽 인맥을 쌓게 된다. | ||
“영화결산이 끝났으면 제작비를 댄 김운환씨한테 원금은 돌려주어야지 그럴 생각도 안한다. 이렇게 셈이 흐린 사람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게 그의 말이었다.
90년 YS의 통일민주당이 3당 합당을 결행하던 때 그는 따라가지 않았다. 그리곤 87년 선거 후 YS 진영과는 적대관계가 된 DJ당으로 재빨리 옮아갔다. 그는 합당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야당으로 남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론 야당에 남은 것이 아니고 국회의원 공천이 내다보이지 않는 여당 이동을 포기한 것.
합당엔 따라가지 않았지만 YS캠프와 유대를 단절한 것은 아니었다. YS비서실의 홍인길이 그의 채널이었다.
김영삼 정권 하에서 홍인길 비서가 청와대 총무수석이 되자 그는 홍인길 채널을 가장 효과 있게 활용했다. 여·야당 실세들 사이를 막후에서 오가며 많은 일들을 해결했는데, 그의 역할은 DJ캠프에서 그의 위치를 끌어올리고 견고히 하는 데 큰 보탬이 되고 있는 듯했다. 홍 수석의 신임도 단단했다. 홍 수석은 김희완씨의 청탁까지도 성의를 갖고 들어주고 돕는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 무렵 어떤 사람이 홍 수석에게 김희완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 수석의 반응은 ‘노’. “그는 믿을 만한 친구다. 그가 주는 정보도 정확하고 쓸모 있고…”라고 홍 수석은 말했다는 것.
그는 14, 15대 국회의원 선거 때 DJ의 공천을 받아 서울 송파에 출마했으나 선거 운은 그에게 따라주지 않았다.
96년 지방선거 때 그는 국민회의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본부 기획본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선거에 승리하자 그해 연말 조순 시장이 지명하는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되었다. 기자, 의원비서관 경력의 그에게 서울부시장은 파격적인 대우고 신분상승이었다.
그러나 1년 반 지난 98년 6월, 정무부시장에서 중도하차했고 조순 시장과 멀어졌다. 어떤 문제가 있었던 듯한데 사임하는 것으로 문제를 덮었으리라는 게 주변의 추측이었다.
99년 서울 송파갑구 국회의원 재선거에 그는 도전했다. 상대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거기다 DJP연합은 송파 갑 여당 공천을 자민련 몫으로 했다. 그에겐 모두 맞지 않는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겨 출마했고 결과는 애초부터 예상했던 대로 낙선.
선거에선 졌지만 그가 얻은 소득은 박태준 당시 자민련총재 겸 포스코(구 포항제철) 명예회장과 연결된 것. 어쩌면 돈 그리고 인맥 늘리기를 겨냥한 재선거 출마였을까. 이 인연이 2001년 7월말 포스코의 유상부 회장과 김희완, 최규선 간의 말 많은 ‘성북동 영빈관 회동’을 주선하는 끈으로 활용된다.
▲ 선거에서 그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와 맞섰지만 나중엔 고개를 숙인다. | ||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정치가 정돈된 그해 6월 그는 다시 한번 변신의 수완을 발휘했다. 동교동계 대부 권노갑 민주당 고문의 핵심참모로 자리잡은 것. 그는 여기서 문제의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대표와 만난다.
최규선 역시 잠깐의 방황 후 권노갑 캠프에 들어와 있었다. 김대중 당선자의 신임을 얻어 정권인수팀에서 일하고도 청와대 입성에 실패해 실의에 빠져있던 그는 99년 일본에 건너가 있던 권 고문을 찾아가 고개를 숙이고 권 고문의 비서로 들어와 있었다.
최규선은 김희완에게 날개가 되었다. 그는 2001년 포스코 유상부 회장과 김홍걸 최규선의 ‘성북동 영빈관회담’을 주선한 후 포스코 고문으로 영입되었다. 김희완 고문. 어마어마한 사무실, 거기다 승용차는 체어맨 리무진, 그는 최상류로 행세할 터전을 마련했다. 그가 얼마나 눈부신 활약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알려진 그의 혐의는 2001년 2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때 타이거풀스 컨소시엄이 선정되도록 홍걸씨와 함께 힘을 써주고 그 대가로 10억원을 받아 김홍걸 등과 나눠가진 데다가 별도로 타이거풀스 주식 2만3천주도 받았다는 것. 대학도 갖고 있는 차병원의 로비도 맡아 차병원으로부터 돈과 주식을 받고 차병원에 대한 수사를 중단케 했다는 혐의도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그는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자 수차례 대책회의를 갖고 최성규 전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의 해외도피 등을 공동모의했으며, 최규선이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에게 20만달러를 전달했다는 설을 설훈 의원측에게 흘린 당사자라는 의혹도 사고 있다. 그의 혐의는 빙산의 일각, 얼마만큼 드러나고 그가 어떤 진술을 하고 누굴 물고 들어갈지는 알 수 없다.
김희완의 정당생활, 정치 행태는 언제나 권력의 중심부에 다가가고 맴도는 것. 그리고 야당을 해도 집권권력에 채널을 유지해온 처신이다. 그는 중심부와 연결을 유지하는 데 지략을 총동원했다. 돈·정보·아이디어가 권력에 다가가는 그의 자산이었다.
적당히 부패할 줄 알고, 부패의 공범도 될 수 있고, 충성스럽고, 융통성을 보이고, 기회를 포착하는 데 재빨라야 출세할 수 있는 한국의 정치문화를 가장 빨리 간파하고 그 길을 걸었다.
그는 서울시 부시장 자리에서 물러난 99년 2월 한 권의 에세이집을 펴냈다. <전직 대통령이 죽는 날 우리도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이 책은 전직 대통령이 비리 의혹으로 명예와 권위를 잃고 마는 세태를 안타까워 해 쓴 글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아들과 함께 이권사냥에 나선 스스로를 그는 뭐라고 쓸까.
세상은 그의 입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기대할 것이 있을까. 그가 정치의 거리에서 마음을 열고 진정을 말해본 일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니 덜미 잡힌 죄에서 탈출하기 위해 어떤 길을 선택할 지는 헤아릴 수 있지 않을까. 그가 걸어온 길이 그 회답을 제공하고 있으니까.
홍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