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이을용 선수가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해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했다. 터키 리그에서 쌓은 값진 경험을 독일에 가서 모두 발휘하길 기대해 본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이을용이 유럽에서 생활하며 변한 것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면 ‘입담’이다. 표정 변화 없이 주저리 주저리 자신의 생각을 읊어 대는 모습에선 절친한 후배 김남일과 아주 흡사하다. 전화 인터뷰에선 입담의 수준이 업그레이드된다. 평소 얼굴 마주하는 인터뷰보다 얼굴을 보지 않고 하는 인터뷰가 더 편하다는 그였다.
23명의 월드컵 전사들 중 가장 늦게 대표팀에 합류한 이을용의 월드컵 ‘희망가’를 들어본다.
―기자들이 최근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에요. 4년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점을 꼽아달라고 하는 내용이죠. 그런데 또 물어보게 되네요.
▲아니 뭐 미안하기까지. 괜찮습니다. 경험이란 실력 못지않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 점에서 2002년 이후 많은 선수들이 해외에서 실전 경험을 지속적으로 쌓았던 부분이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다른 선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전 이상하게 월드컵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편해져요. 4년 전과 가장 큰 차이예요. 그땐 정말 똥 오줌 못 가렸거든요. 그런데요, 이건 정말 궁금해서 하는 얘긴데 기자분들 질문이 왜 그렇게 비슷하대요?
―먼저 선수를 치시니까 질문하기가 뭐하네. 또 비슷한 질문을 해야 하거든요. 자리 경쟁 말예요. 솔직히 신경 쓰이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게요. 젊은 선수들의 실력이 상당히 좋아졌어요. 가끔 놀랄 정도로요. 그러나 젊든 나이 먹었든 이 세계 자체가 경쟁 아닌가요? 그런 게 없다면 발전이 없는 거잖아요. 23명 안에 들면 또 다시 베스트 11에 들기 위해 경쟁을 벌여야 하는 거구. 지금 피로가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지만 몸 관리만 잘 한다면 후배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터키도 유럽인데 영국, 독일은 가고 왜 터키에는 못 오시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터키 생활이 3년 정도 되거든요.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죠. 한국에선 베스트 멤버로만 뛰다가 벤치 신세를 져보기도 했고 1분 남겨 놓고 ‘게임장’에 들어간 적도 있었어요. 한국이었다면 벤치 신세로 전락한 내 자신에 대해 한탄과 회의도 많이 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뭘 해도 고생스런 곳이 외국 생활이라 마냥 회의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더라구요. 내 축구 인생이 베스트 멤버로만 채워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벤치에 있을 때는 정말 인생 공부 많이 했어요. 게임 못 뛰는 선수들 심정도 이해가 됐고.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도 있었을 텐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눌러 앉았던 이유가 있다면 뭐죠.
▲(송)종국이나 (이)천수가 버티다가 결국 국내 복귀를 선택한 케이스잖아요. 그 애들 심정이 십분 이해가 돼요.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막말로 오기를 부리지 않았다면 그냥 돌아갔을 거예요. 그런데 버티니까 기회가 오더라구요. 자신감 잃지 않고 기다리면 기회는 오기 마련이란 걸 알게 됐어요.
―터키에서 어떤 ‘벽’ 같은 걸 느낀 적이 있나요.
▲유럽에선 성적 못 내면 첫 번째 책임은 용병한테 있어요. 자국 선수들은 쉽게 이해해 주는 부분도 용병한테는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게 현실이잖아요. 터키 애들보다 더 열심히 운동해야 하는 게 나한테 주어진 숙제였죠. 무조건 더 뛰었어요. 그들이 한 바퀴 돌면 난 두 바퀴 돌고….
―엔트리 발표 전까지만 해도 안정환 위기설, 차두리 빨간불 등 이런저런 얘기가 돌았어요. 그런 기사 읽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개인적으로 정환이와 두리는 당연히 월드컵에 합류할 거라고 믿었어요. 특히 정환이의 탈락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죠. 정환이랑은 친구 사이거든요. 정환이가 프랑스에 있을 때는 가끔씩 통화도 했는데 독일로 옮긴 이후엔 몇 차례 시도하다가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정환이가 너무 힘든 상황이라 전화하기가 망설여지더라구요. 정환이나 두리는 너무나 좋은 선수들이라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기 몫을 다 할 친구들이에요. 두 사람 다 같이 월드컵에 나가길 바랐어요.
―아드보카트 감독의 색깔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아드보카트 감독님과는 많은 시간을 같이 해보지 못했어요. 감독님의 색깔을 알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죠.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젊은 선수들에게 유독 신경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아마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시려는 배려겠죠. 선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굉장히 크신 분인 것 같아요.
―최종 선발 전까지 대표팀 코칭스태프의 어느 누구도 직접 터키로 날아가 이을용 선수의 플레이를 보지 않았어요. 좀 섭섭하진 않았나요.
▲전혀요. 오히려 오셨다면 더 부담스러웠을 걸요? 감독님이 터키 리그를 인정해 주신 걸로 믿었어요. 듣자 하니 지인들을 통해 내 상태를 점검하셨다는 얘기도 있더라구요.
▲ 이번 월드컵엔 ‘을용권법’이 나오지 않을까. 파주 트레이닝센터에서 연습 중인 이을용의 자세가 범상치 않다.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홍 코치님과 둘이 있을 때는 ‘명보 형’이라고 불러요. 사람들 많을 때는 정중하게 부르고요. 그런데 명보 형 정말 대단해요. 사소한 것까지 아주 세심하게 챙기시더라구요. 나이 어린 선수들이 수비나 미드필더를 보다가 명보 형에게 계속 뭔가를 물어봐요. 싫은 내색 없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시는 거 보면서 깜짝 놀랐어요. 어린 선수들이랑 별의별 얘기를 다 나누면서 팀을 이끄시는 거예요. 선수들과의 관계가 아주 자연스러워요. 마치 친형처럼 살갑게 대하시는 부분에선 나도 많이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요, 기자들이 한국팀의 예상 성적을 물어볼 때마다 솔직한 대답을 하는 건가요?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방송용 멘트’를 하는 건가요.
▲반반이에요. 제가 한 말을 책임져야 하니까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때도 있고 가끔은 메시지 전달 차원에서 부풀려 대답할 때도 있구요. 지금은 솔직히 말씀 드릴게요. 사실 2002년 때처럼 좋은 성적을 내기란 어려움이 많아요. 그래도 목표는 일단 16강 진출이잖아요. 축구를 모르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얘기가 토고와 스위스전이 관건이라는 부분이에요. 제가 토고와 스위스 경기는 몇 게임 봤거든요. 그런데 지금 말하기가 그런 게 월드컵을 앞두고는 모든 팀들의 전력이 상승되기 때문에 이전에 봤던 경기로 그 팀의 전력을 평가할 수가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한 가지 자신이 있다면 체력적인 부분에서 보완이 된다면 두 팀 다 쉽게 이길 수도 있어요. 조직력과 체력 싸움인 것 같아요. 이번 월드컵은요.
―오는 7월로 트라브존 스포르와의 계약이 만료되잖아요. 에이전트가 프리미어리그 팀과 접촉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어요. 월드컵 끝나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가요.
▲무슨 일은요. 여전히 공 차고 있겠죠 하하. 이적이나 재계약 문제는 지금 말할 단계가 아니에요. 사실 저도 잘 몰라요. 프리미어리그를 가고 싶긴 한데 그게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현재 터키에서 인정을 받고 있고 터키의 다른 팀에서도 오퍼가 왔다고 들었어요. 월드컵에서 좋은 결과만 있다면 이적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건 좀 웃자고 하는 질문인데요, 2002년 월드컵 때 같이 뛰었던 황선홍, 유상철, 김태영 등이 각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는데 누가 가장 해설을 잘 할 것 같아요.
▲(이 질문에 이을용이 엄청난 웃음 소리를 냈다) 뭐 답은 나와 있는 거 아닌가요? (황)선홍이 형이죠. 그 다음은 (유)상철이 형. 전 태영이 형이 가장 걱정돼요. 아마 해설하다가 흥분하면 욕부터 나올 것 같아서 하하.
(이 얘기를 나중에 김태영 코치에게 전했다. 김 코치, 예상한 대로 흥분하면서 “을용이 두고 보자고 전해주세요. 월드컵 때 제대로 못 뛰면 엄청 씹을 거라고, 긴장하라구요.” 웃으면서도 씩씩 거리는 목소리를 거두지 않았다. 실제로 김 코치와 이을용은 굉장히 친한 선후배 관계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