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부동산 정책 관련 글이 논란이 되고 있다. 김병준 실장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지방분권에 대한 평소의 소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부동산 전문가’도 아닌 김 실장이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처럼 강도 높은 글을 올린 까닭은 무엇일까. 주변에선 ‘정책실장 김병준’에 앞서 ‘학자 김병준’을 알지 못하면 그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일까.
김병준 정책실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지방자치 전문가다.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를 지내던 지난 95년 경실련 지방자치위원장을 맡는 등 현 정부 출범 전까지 대학과 시민단체를 오가면서 지방자치 관련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왔다. 이 과정에서 350여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지방자치헌장 제정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국민대 교수 시절 그가 학생들과 나눴던 대화는 ‘지방자치’에 대한 그의 신념이 어느 정도인지 미뤄 짐작하게 해준다.
“소장수나 쌀장수가 지방 의원을 하면서 행정을 배우는 데 몇 년이 걸릴 것 같아요? 5년? 10년?” 한 학생이 대답했다. “10년쯤이요.”
“그러면 유명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가 민초의 마음을 읽고 헌신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릴 것 같아? 5년? 10년?” 학생들 눈이 휘둥그레졌고 한 학생이 대답했다. “평생 안 됩니다.”
“다시 물어봅시다. 우리 정치와 행정에 문제가 있는 게 법과 행정을 아는 똑똑한 사람이 적어서입니까? 아니면 민초의 마음이 정치와 행정에 제대로 반영이 되지 않아서입니까?” “….”
그때나 지금이나 “민초를 위한 권력을 만들고 싶으면 그들을 대변하는 사람들을 권력의 축 가까이 가도록 해야 한다. 쌀장수와 소장수가 의정활동을 통해 이 나라의 행정과 법을 배워 주인이 될 때 민주와 위민이 함께하는 세상이 열린다”는 게 그의 변함없는 소신이다.
그와 노무현 대통령의 인연도 지방자치란 화두를 매개로 맺어졌다. 김 실장은 “대학 교수로 생활하면서도 마음 한쪽은 늘 시민운동, 특히 분권운동에 가 있었는데 참여정부와의 인연도 사실은 이 때문에 이어졌다”고 말했다. 93년 국민대 교수로 있을 때 노무현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이 운영하는 ‘지방자치 실무연구소’의 강연 요청에 응함으로써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뤄졌던 것. 이후 그는 지방자치연구소의 소장과 이사장을 지냈는데 이 연구소는 염동연 의원 등 현 정부의 실세들이 거쳐 간 곳이자 노 대통령의 젊은 참모들을 길러낸 산실이 되기도 했다.
그는 현 정부 들어서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과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잇따라 맡으면서 ‘지방자치’·‘지방분권’ 전도사로 나서고 있다. 특히 2004년부터는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정부 정책을 총괄적으로 기획ㆍ지원ㆍ평가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그의 소신이 정책 곳곳에 스며들고 있는 셈이다.
“참여 정부의 분권화 노력은 과거 정권의 지방분권 노력과는 다르다. 대통령과 주변의 국정운영자들이 모두 진짜 ‘분권론자’로 분권이 되지 않고는 국가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물줄기를 만들겠다. 국민들이 분권을 괜찮게 여기는 분위기만 만들어지면 다음 정권도 이를 그르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공식적인 혹은 비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했던 발언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같은 측면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방안들은 궁극적으로 지방자치 혹은 지방분권화 문제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부동산 정책과 관련된 최근의 청와대 홈페이지 기고문만 해도 그렇다. 부동산 투기를 차단하기 위한 현 정부의 정책은 정권이 바뀌더라도 바뀌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분권화 의지가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즉 “강남에 집중돼 있는 수요를 분산시켜 다른 지역도 제대로 된 도시, 반듯한 도시로 만들어 가자”, “종합부동산세를 통한 세수입을 재정난에 처해 있는 지자체에 배분해야 한다”는 등 그는 지방분권화 혹은 균형발전론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시민단체들의 역할을 부각시켰는데 이것도 그의 활동 경력을 떠올리면 자연스러운 논리 전개로 받아들여진다.
▲ 지난 2004년 6월 14일 당시 청와대에서 수석·보좌관회의에 앞서 김병준 정책실장이 신임 인사말을 하자 노무현 대통령과 다른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경제 챙기기는 대통령의 제1 책무이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정례 회의와 이슈별 회의)가 많은데 대부분이 경제문제, 민생경제를 다루는 것이다. 청와대 정책실장도 정책 사안을 대통령에게 문건으로 보고하는데 지난해 1월부터 8월까지 보고된 800여 건 중 76%가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어떻게 경제를 챙기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싶다.”
그의 ‘지역구도 타파론’도 지방분권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지역구도가 계속되는 한 정치권은 이에 편승, 표를 얻는 데만 몰두하게 돼 균형발전이나 양극화 문제 등 사회적인 주요 이슈와 관련된 정책 대안들을 제시하는 데는 소홀하게 됨으로써 결국 국가 발전이나 지방분권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그는 “대통령의 힘은 갈수록 약화되고 국회와 정당의 권한이 강해지는 게 세계적인 추세인데 지역주의의 포로가 된 현재의 정치구조를 개혁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21세기는 없다”고 단언했다. 결국 개혁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도 분권화가 필수적이라는 논리다.
“대통령부터 면 서기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모든 공직자를 하나로 묶는 획일적인 중앙집권체제 아래서는 어떤 정부도 개혁 의지를 키울 수 없다. 그러나 지방자치가 실시되면 상황은 크게 바뀐다. 지자체가 제대로 운영되면 중앙정부 역시 바뀌게 된다.”
그가 이처럼 지방분권에 대한 소신을 갖게 되기에는 농촌 출신인 데다 지방대를 나왔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54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사와 대구상고를 거쳐 76년 영남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인생의 첫 전환점은 대학 졸업 후 은사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와 외국어대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이었다.
“지방대 출신으로 내가 선례가 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각오로 생활했다.” 결국 대학원 시절 그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나온 학생들을 모두 제치고 외국어대의 자매 대학인 미국 델라웨어대학에 유학 가는 1기 장학생으로 선발됐고 이곳에서 84년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다른 학생들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그럴 수 있다며 그냥 넘어갔으나 내가 잘못하면 지방대 출신이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해 이 같은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생활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이 같은 회고담을 모교인 영남대에서 후배들을 상대로 특강할 때면 어김없이 강조한다.
결혼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이화여대 학생들과 서클 활동을 함께하면서 이 대학 사회학과에 다니던 부인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게 됐는데 장모가 한사코 반대,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다가 지방대를 나온 사위를 둘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모가 두 사람 몰래 김 실장의 사주를 갖고 역술가를 찾아가 귀인이 될 것이란 얘기를 듣게 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고 한다.
그는 델라웨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난 뒤 귀국,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강원대에서 행정학 조교수 직을 맡아 2년 정도 강의했다. 당시 제자들은 “강의에 매우 정열적이었고 사례 중심으로 토론을 유도했으며 특히 지방분권 문제에 관심이 매우 많았다”고 떠올렸다.
86년에는 국민대로 옮겨 2004년까지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4년 청와대 정책실장에 임명되면서 학교를 떠났다. 20년간의 교수생활 중에는 경실련 지방자치위원장,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자문교수, 지방자치연구소 소장 및 그 후신인 자치경영연구원 이사장, 서울시 시민평가단장 등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유학이 그의 인생의 첫 전환점이라면 지난 2002년 대선은 두 번째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이 선거전에 뛰어들면서 여의도에 있던 자치경영연구원이 후보 캠프가 됐고 그는 노 후보의 정책자문단장을 맡게 됐던 것이다. 선거기간 중 그는 지방 관련 주요 공약의 상당수를 입안했으나 선거가 끝나자 “정치는 맞지 않다”며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여권으로부터 주요 직책을 제안 받았으나 모두 고사했으며 한동안 외부와의 연락조차 끊었다. 대통령직인수위의 정무분과위 간사 직도 자신이 잠적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언론에 발표되는 바람에 떠밀려 맡게 됐다고 한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정부에 참여하게 됐지만 그는 대선 때 공약을 중심으로 정부가 향후 추진해야 할 주요 정책들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어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을 거쳐 현재는 청와대 정책실장과 동북아 평화를 위한 바른 역사정립기획단 단장을 겸직하고 있다.
정치학회 부회장을 맡는 등 학계에서도 그는 마당발로 꼽혀왔는데 특히 출신 지역인 대구·경북을 비롯한 영남권과 강원권에 인맥이 많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내 상당수 인사들과도 사적인 교분을 유지하고 있으나 정작 올해 초 유력한 총리후보 물망에 올랐을 때는 한나라당 측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노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고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언제든 총리 카드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현 정부의 분권화 정책이 당초 목표했던 것만큼 순탄하게 마무리될지는 임기를 채 2년도 안 남겨둔 현재까지도 속단키는 어렵다. 또한 학자 출신인 그의 ‘정책 실험’이 성공작으로 평가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다만 현 정부의 임기가 끝나도 ‘민초’가 주인이 되는 시대를 향한 그의 열정만은 좀처럼 식지 않을 것 같다.
이대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