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오 최고위원이 “나는 털 때 터는 사람”이라며 당무에 복귀했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표 측과의 앙금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여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사진은 7·11전당대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사실 이 최고위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 전 대표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었다. 박 전 대표나 이 최고위원은 모두 TK 출신에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에서 정치를 시작해 3선의 국회의원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은 있지만 태생부터가 달랐고 살아온 세월이 달랐다. 지금은 정계의 핵이 된 이 최고위원을 해부한다.
이 최고위원은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중앙대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에서 10여 년간 교편을 잡다가 재야운동에 투신했다. 지난 90년에는 장기표 새정치연대 대표와 함께 민중당을 창당하고 사무총장까지 역임했다. 지하에서 조직 활동을 하던 이 최고위원은 민주화 시대가 열리자 YS 시절인 지난 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15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양지’로 나왔다. 전당대회 내내 이 최고위원에게 걸림돌이 된 ‘남민전(남조선 민족해방 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은 유신정권 말기인 지난 79년 이재문, 이문희, 김남주 시인 등 80여 명의 조직원이 검거되면서 터져 나온 사건이다. 당시 공안기관은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돼 유신말기 최대 공안사건으로 기록됐다.
이 최고위원 측은 “이 최고위원이 남민전 사건과 직접 관련된 것이 아니고 사건 관련자인 이재문 씨와 아는 사이라고 해 부풀려진 것이다. 당시 정권이 이 최고위원을 감방에 붙잡아두기 위해 억지로 엮은 사건이었다”고 전했다. 현재 남민전 사건 관련자는 대부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됐다.
청춘을 재야운동에 투신한 이 최고위원은 유신정권 시절 유신반대 운동으로 세 차례나 투옥됐다. 당시 박 전 대표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최고위원은 ‘영애 근혜 양’을 비판해 옥고를 치른 적도 있었다. 그는 “내가 세 번째 감옥에 간 것은 안동댐에 있었던 박근혜 대표 방생기념비가 댐을 건설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추모비보다 더 앞쪽에, 크게 만들어진 것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라며 “당시 막걸리 반공법이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았느냐”며 소개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새마을 봉사단 총재였다. 한마디로 이 최고위원은 박 대표 기념비를 비판하다가 옥고를 치른 것이다. 이런 전력을 가진 사람이 박 전 대표와 가까워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신경전은 2004년 총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전 대표가 탄핵의 역풍 속에서 한나라당을 구했지만 그 해 7월 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 최고위원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표가) 무슨 대단한 업적이 있어 당 대표가 되느냐”며 “독재자의 딸이 당 대표가 되면 한나라당은 망한다. 그가 2007년 대선에 출마하면 100전 200패”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 지난 2월 박근혜 대표와 이재오 원내대표. 당시는 ‘밀월기’였다. | ||
그러다가 다시 두 사람 간의 충돌이 일어난 것은 올 1월 원내대표 경선이었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측근인 김무성 의원을 지원하고 나섰지만 예상을 뒤엎고 이 최고위원이 여유있게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그의 당선으로 여야 대치상황에서 원내대표와 당 대표가 갈등을 빚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를 위해 몸을 던졌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이 최고위원이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사학법 재개정’이었다. 그는 당선 인사에서 “크고 작은 일을 박 대표와 상의하고 강력한 대여투쟁으로 당의 위기를 타개하겠다”며 박 전 대표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또한 “여당이 사학법 재개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2월 임시국회는 없다”며 박 전 대표를 위해 사학법 재개정에 사활을 걸었다. 이 시기가 이 최고위원과 박 전 대표의 밀월이라면 밀월인 시기였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최고위원은 “내가 원내대표 시절 그렇게 잘 모셨는데”라고 섭섭함을 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최고위원의 이런 행보를 두고 서울시장에서 당권으로 목표를 선회한 이 최고위원이 이번 7·11 전당대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박 전 대표에게 ‘알아서 처신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명박 전 시장 측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대체로 인정한다. 이 전 시장 측의 한 인사는 “이 최고위원이 (박 전 대표에게) 순진하게 당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인사에 따르면 전당대회를 앞두고 이 최고위원이 이 전 시장에게 “이번 전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있어 달라. 박 대표는 중립을 지킬 것으로 확신한다”며 전당대회에 개입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예측과 달리 이번 전당대회는 이명박 박근혜 간의 대리전 양상이 됐고 이 최고위원은 여론조사에서 앞섰지만 현장 투표에서 역전패를 당해 ‘대리전의 희생양’이 됐다. 그는 전당대회 직후 당무거부, 칩거를 통해 기세를 잡는 듯했지만 계속해서 독자행보를 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총재를 만나는가 하면 강재섭 대표가 “재보궐 선거의 개별적인 지원유세를 자제해 달라”는 당부를 거부하고 성북을과 부천소사 지역을 돌며 지원유세를 하기도 했다. 또한 최고위원 회의에 참석해 각종 수해대책을 지시하는 등 ‘대표’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해 당내에서조차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 “심정은 이해하지만 도를 넘어선 안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 최고위원에게 ‘대리전의 희생양’에서 ‘경선 불복’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자 이 최고위원은 지난 20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전당대회 후유증도 마음먹기 나름이라 이젠 신경쓰지 않는다”며 “나는 털 때 터는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앙금이 풀린 것은 아니다. 대선정국에서 그도 선택을 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이 최고위원이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박 전 대표를 더 이상 동반자가 아닌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자신이 원내대표를 지낸 지난 6개월을 제외하고는 이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와 항상 대척점에 서 있었다. 이 최고위원은 다시 비주류 수장의 자리로 돌아왔다. 한나라당 대선정국에서 그의 선택은 자명해 보인다. 이 전 서울시장 측은 “이 최고위원이 다시 돌아와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