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해체론은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대두됐다. 모두 정경유착 비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1년 8월 전경련의 출범은 5·16 군사쿠데타 세력과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기업인들이 부정축재에 대한 처벌을 기업보국으로 대신하겠다며 설립한 ‘경제재건촉진회’가 모태였다.
정부는 빈약한 국가 재원을 전경련 회원사인 소수의 대기업에게 집중 배분해 재벌기업을 육성했고, 재벌은 수익의 일부를 정치권과 나눴다. 전경련은 재계의 맏형 노릇을 하면서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역할을 했다. 개발연대 기간 동안 이런 구조는 제법 순기능도 있었다.
정경유착의 폐해를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진행됐던 일해재단 비리 사건이었다. 아웅산 사건의 유가족들을 돕는다는 목적으로 시작됐다가 전두환 대통령의 퇴임 보신책으로 변질된 것이 일해재단 비리의 발단이었다.
1988년 11월 5공 청문회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전경련 해체론이 비등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으로 600여억 원의 재단기금 모집에 앞장섰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돈을 낸 이유에 대해 “세상을 편하게 살자는 생각으로 냈다”는 명언을 남겼다. 돈을 안 냈다는 이유로 국제상사가 해체된 것도 그 때였다.
1995년 11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으로 불법정치자금을 제공한 대기업 총수들이 대거 실형을 선고받은 데 이어, 1997년 세풍사건 및 2002년 차떼기 사건 등 수백억 원대의 대선자금 비리사건이 터졌다. 전경련 해체론은 더욱 뜨거워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4년 기업의 정치헌금을 금지하는 이른바 ‘오세훈법’이 제정됐다. 그 후 노골적인 정경유착은 뜸해지는 듯했다. 전경련 위상도 약화돼 재계의 맏형자리도 대한상공회의소에 넘어갔다. 주요 대기업 회장들의 불참으로 회장단 회의는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동행할 기업을 모집하는 것이 그중 영향력 있는 역할이라지만 대통령의 해외순방이 잦다보니 되레 기업들이 부담스러워하는 형편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은 권력에 의존해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전경련의 구태 경영의 연장선에 있다. 이 사건에 쏠린 국민들의 의혹을 감안할 때 전경련은 800억여 원이 어떤 절차로 출연됐는지 두 재단의 설립과정을 소상하게 밝힐 책임이 있다. 하다못해 회장의 입장표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무자인 부회장을 앞세워 ‘자발적 설립’ 공염불만 되뇐다. 전경련 해체론이 과거 어느 때보다 무겁게 들리는 이유다.
임종건 대한언론인회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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