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9일 정동채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재임 당시 심의를 통과한 ‘바다이야기’와 관련, 기자회견을 열어 머리를 숙여 사과하고 있다. 하지만 간단히 사과문만 읽고 끝낸 이날 회견에 대해 여권 안팎에서도 시선이 곱지 않다. | ||
‘바다이야기’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가운데 성인 오락실 관련 제도가 틀을 갖추던 당시 문화부 장관이었던 정동채 의원이 한나라당의 거센 공격과 열린우리당 내의 따가운 시선을 못 이겨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 의원의 대국민 사과는 “게임정책과 관련해 당시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국민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다. 검찰 수사, 감사원 감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문제들이 곧 명명백백 밝혀질 것이다”며 “비상대책위 상임위원직을 사퇴하겠다”고 말한 것이 전부다. 정 의원은 이 1분짜리도 안 되는 사과문을 읽고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당시 문화부 장관으로서 어떠한 정책 판단을 했고 성인오락실의 인허가와 경품용 상품권 발행 등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억울해서일까.
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는 “정책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성인오락실 인허가와 관련된 제도는 이미 DJ정부에서 마련된 것이다”라며 ”DJ정부가 씨를 뿌린 문제가 정 의원이 문화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바다이야기’로 불거졌으니 본인으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전했다. 즉 정 의원이 뒤처리를 맡았다가 사태가 커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가 당시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사과만 할 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보는 시각이 곱지만은 않다. 정 의원의 문화부 장관 임기 중에 ‘바다이야기’가 심의를 통과했고 경품용 상품권 발행업체 선정 제도가 두 차례 바뀌었다. 그것이 뒤처리에 불과한지 의문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DJ에 의해 정계에 발탁된 후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참여정부에서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 예비 대권주자로까지 불렸던 3선의 정 의원의 역할을 추적한다.
현재 정 의원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고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일요신문>은 정 의원과의 인터뷰를 위해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1일 짤막한 기자회견 이후 공식 비공식 석상에 일체 얼굴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검찰 수사, 감사원 감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문제들이 곧 명명백백 밝혀질 것’이라며 그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니다.
<일요신문>은 지난달 30일 저녁에도 서초동 정 의원의 자택을 찾아갔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정 의원의 부인은 “지금 집에 없다. 지방(지역구인 광주)에 내려갔다”며 “언제 올지는 모른다”라고 답했다. 다시 찾아간 다음 날 오전에는 집안에서 인기척이 들렸지만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은 없었다. 정 의원의 휴대폰과 집 전화도 안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정 의원 측의 한 인사는 “정 의원이 외부행사에 참석 중이다. 우리와도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며 “지방(광주)에 내려갔다”고만 전했다. 정 의원의 광주 지역구 사무실의 한 관계자는 “정 의원이 광주에 내려온 적은 없다. 행사도 잡혀 있지 않다”고 전했다.
현재 정 의원에게 쏠리는 비난과 의혹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성인 오락실의 인·허가에 대한 정책결정 과정이다. 지금처럼 성인오락실이 곳곳에 독버섯처럼 피어날 때까지 감독 관리 책임자로서 무엇을 했는가다.
둘째, 경품용 상품권 발행업체의 선정과정에 대한 의혹이다. 인증제를 통해 22곳의 업체를 1차로 선정했다가 업체의 허위서류 제출이 발견되면서 모든 업체의 인증을 취소하고 인정제를 지정제로 바꾸어 다시 19곳을 선정했다. 그러나 이 19곳 가운데 1차에서 탈락한 7개 업체가 다시 선정돼 의혹을 사고 있다.
셋째, 정 의원의 문화부 장관 재임시 ‘바다이야기’가 영등위 심의를 통과한 점이다.
이러한 의혹들이 명확하게 해명되어야 ‘바다이야기’ 사태가 단순한 정책 실패인지 권력형 비리인지 판가름할 수 있다는 것이 야당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정 의원은 파문이 확산되는데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지난 21일에야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이 회견도 세간의 의혹에 대한 해명보다는 언론보도에 대한 해명에 더 비중을 두었다. 기자회견 후에도 의혹이 가라앉지 않자 정 의원 측은 보도 자료를 배포하며 의혹 확산을 차단하는 데 힘썼다.
정 의원은 보도 자료를 통해 “성인 오락실 인·허가는 98년에 시행됐고 2001년에 재개정됐다. 성인 오락실 인·허가에 대해 정 의원의 장관 재임기간 중 어떤 결정도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정 의원이 재임 중 국회 진상 요구를 거부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도 “정 전 장관은 거부할 권한도 없고 거부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 지난달 23일 이경순 영등위 위원장(오른쪽)이 한나라당 진상조사위원회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바다이야기’의 영등위 심의 통과 역시 “영등위가 독립성이 철저히 보장돼 직무와 관련해 어떠한 외부의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않게 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등위와 심의위원들은 “문화부에서 ‘심의기준을 완화해 달라’는 요구를 해왔고 결국 심의에 반영됐다”고 반박해 문화부와 영등위 간에 한 차례 진실 공방이 있었고 최근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이젠 문화부와 검찰이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문화부가 “성인 오락실에 관한 문제점을 파악해 검찰과 경찰에 단속을 요청했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검찰은 “정 전 장관이 지난해 9월 국감에서 검·경에 대대적인 단속을 요청한 것으로 답변했지만 공문은 1개월이 지난 다음에 접수됐다”며 반박한 것이다.
정 의원에 대한 야당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은 지난달 23일 ‘바다이야기’와 관련, 정 의원을 구속 수사할 것을 검찰에 요구해 파문을 부른 바 있다. 주 의원은 당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문제가 된 상품권 및 게임기 관련 주무장관이었던 정 전 장관은 그 책임을 몽땅 한국게임산업개발원과 영상물등급위원회로만 떠넘기고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정 의원은 광주 태생으로 천주교 재단의 살레시오 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지난 76년 합동통신에 입사, 기자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80년 신군부의 검열과 언론통폐합에 맞서 제작거부 투쟁을 벌이다 강제 해직된 그는 8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에서 교포를 상대로 발간하던 신문의 기자로 활동했다. 그러던 83년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미국 망명길에 올라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세우자 그는 DJ의 공보비서가 되면서 정치와 연을 맺었다. DJ를 이사장으로 한 한국인권문제연구소에는 정 의원뿐 아니라 박지원 전 문화부 장관, 김경재 전 의원 등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87년 미국에서 돌아온 정 의원은 그 해 대선에서 DJ가 패배하자 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발기인으로 참여, 정치부 차장,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92년 대선에서 DJ가 또 다시 패배해 영국 유학길에 오르자 정 의원은 93년 아태평화재단 김대중 이사장의 비서실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정치의 길에 들어섰다. DJ가 정치를 재개해 국민회의를 창당했을 때도 DJ의 비서실장을 맡았고 96년 15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에 공천을 받아 당선, ‘금배지’를 달았다. 2000년에도 민주당 대표 비서실장을 지내 DJ의 비서실장을 가장 많이 한 정치인으로 꼽힌다. 민주당 시절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 차남 홍업 씨, 나종일 주일대사 등과 함께 경희대 인맥의 핵심인사로 불렸다.
2002년 대선 전까지 ‘DJ맨’이었던 정 의원과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한 인연은 없었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후보로 확정된 직후 정 의원을 비서실장으로 발탁했다. 노 대통령이 그의 능력을 진작 눈여겨보아 왔다는 이야기다. 참여정부 출범 후에는 열린우리당 홍보위원장을 지냈고 2004년 7월 참여정부가 언론개혁에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걸던 시점에 문화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열린우리당 내 대권주자 중에는 정동영 전 의장과 가깝다.
2004년 그의 문화부 장관 입각은 노 대통령이 그를 차차기를 염두에 둔 잠룡의 일원으로 키우기 위한 원려도 작용했다는 것이 당시의 평가였다.
장관직을 그만둔 후 조용히 꿈을 키워가던 정 의원에게 이번 바다게이트는 정치 가도에서 출현한 최대의 시련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그가 이 바다게이트를 무사히 헤엄쳐 통과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