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형 200m에서 금메달을 따고 기뻐하는 박태환. 최고의 실력에 외모까지 겸비해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
벌써 1주일째다. 다섯 살짜리 아들과 수영장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인 것이. 엄마는 속상한 마음에 “너 수영 안하면 또 병원 가야 해. 의사 선생님 말씀 못 들었어!”하며 아들을 윽박지른다.
유독 감기에 자주 걸렸던 아이는 소아과에 갈 때마다 감기약에 기관지약 하나를 더 받아 와야 했다. 천식이었다. “천식에 수영이 좋다”는 의사의 권유에 어머니는 그 길로 아이를 수영장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아이는 물이 무섭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우격다짐으로 눈물까지 쏙 빼놓은 끝에 겨우 물 속에 집어 넣었다.
그런데 웬걸. 물에서 노는 법을 알게 된 아이는 2년 뒤 전국어린이수영대회에서 배영 부문 1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였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천식 약을 지어주지 않았다. 부모는 어느날 “우리 아들, 수영 선수로 한번 잘 키워 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물이 무섭다며 울던 다섯 살 꼬마가 12년 뒤 아시아 수영 최강자로 우뚝 섰다. ‘한국 수영의 간판’ 박태환(17·경기고). 2006 도하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200m와 400m, 1500m에서 모두 금메달을 따냈다. 200m(1분47초12)와 1500m(14분55초03)에서는 아시아 최고 기록도 2개나 갈아 치웠다. 지난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때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이후 24년 만에 탄생한 한국 수영 3관왕.
은메달도 하나(100m 자유형), 동메달도 세 개(800m계영, 400m 계영, 400m 혼계영)나 땄다.
박태환은 그러나 크게 기뻐하지도 않는다. “3관왕도 하고 기록도 좋아 만족합니다.” 너무나 담담한 대답에 흥분한 기자들이 오히려 머쓱해졌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묵직한 자신감과 지치지 않는 노력, 그리고 맑은 순수함으로 똘똘 뭉친 이 ‘수영 천재’가 마냥 자랑스럽기만 한 것을.
아테네의 악몽
박태환은 7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노민상 현 수영 대표팀 감독이 이끄는 수영 클럽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선수의 길에 들어선 건 이 때부터다.
학창시절 유도를 했던 아버지 박인호 씨(55)에게서 근력과 파워를, 한국 고전무용을 전공했던 어머니 유성미 씨(48)로부턴 유연함을 물려받았다. 여기에다 물에 잘 뜨는 부력까지 타고났다. 그의 기량은 한여름 나무 자라듯 쑥쑥 성장했다.
도성초등학교 시절 전국 어느 대회를 나가도 또래 가운데 적수가 없었다. 대청중 2학년 때인 2003년엔 대한수영연맹의 꿈나무 발굴 정책에 따라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고, 이듬해 2004년 아테네올림픽 대표팀에 깜짝 선발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만 14세의 한국 선수단 최연소 선수. 그러나 아테네올림픽은 그에게 기억하기 싫은 악몽을 안겨줬다.
수영 첫날 자유형 400m 예선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출발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물에 뛰어들었다. 부정 출발로 실격. 팔 한번 저어보지 못하고 짐을 싸야 했다. 2시간 동안 화장실에 숨어 대성통곡했다.
노민상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전 그때 서울에 있었는데 아테네 현장에 있던 한 수영인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태환이가 물 속에 그냥 떨어져서 실격했다고. 참 어처구니가 없었죠. 그런데 문제는 태환이 아버지가 이 사실을 모르고 태환이 성적을 자꾸 물어오시는 거예요. 일단 포장마차에 가서 둘이 마주 앉았죠. 소주 너댓 병을 아무 말 않고 계속 마셨어요. 그리고 엄청 취한 상태에서 태환이 아버지에게 사실을 고백했죠. 맨정신에는 정말 말 못하겠더라구요.”
당시 이 사건은 한 유럽 외신에 ‘해프닝 뉴스’로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박태환은 당시를 떠올리며 “정말 창피했죠. 두 달 동안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어요. 수영하는 친구들은 더더욱 안 만났죠. 하지만 그 실수를 빨리 잊어버리려면 좋은 성적을 내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동계훈련에 정말 모든 걸 걸었죠”하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치욕스런 ‘악몽’은 몸에 좋은 ‘보약’이 됐다. 새벽 4시부터 시작된 2004년 겨울 훈련은 하루 1만m를 역영하고 웨이트 훈련과 러닝을 병행한 뒤 밤 8시나 되어야 끝이 났다.
동계 훈련의 결과물은 거짓 없이 나타났다. 2005년 동아시아대회와 월드컵 쇼트코스(25m) 등 국제대회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4개씩 수확했다. 그해 3월 동아대회 2관왕에 전국체전 4관왕. 한국 신기록 행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박태환의 해’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물 안’에 있었다. 1년 뒤. 박태환은 더 큰 물을 향해 ‘풀쩍’하고 우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 연합뉴스 | ||
25m 풀에서 하는 월드컵 쇼트코스 대회에선 금메달을 땄으니 이제 한 단계 도약할 때가 왔다. 바로 정규코스(50m) 정상이다. 이를 위해 다시 노민상 감독과 동계 훈련에 들어갔다. 2005년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3개월간이었다.
하지만 국내 수영의 간판 스타라고 해도 마음 놓고 훈련할 장소가 없었다. 태릉선수촌은 연간 훈련 일수가 초과했다며 수영 대표팀을 내몰았다. 잠실실내수영장도 마침 한창 공사 중.
노 감독은 아쉬운 대로 찜질방을 찾았다. 방이동 올림픽공원 근처에 있는 한 찜질방에 25m 수영장이 딸려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박태환과 도하아시안게임 여자 접영 200m 은메달 최혜라, 권유리 등 국가대표 제자들을 이끌고 찜질방 수영장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 처음엔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에 신기하다며 호기심을 보였던 동네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나중엔 “걸리적거리니 제발 딴 데 가서 하라”며 눈총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달디 단 열매가 맺혔다. 지난 8월 캐나다에서 열린 범태평양수영대회. “정규코스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이를 악문 박태환은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 200m 은메달 등 한국 수영 사상 첫 세계 대회 메달 획득의 쾌거를 올리며 일약 월드스타로 부상했다.
갑자기 나타난 동양인 선수가 마치 두 발에 엔진 모터를 단 듯 쭉쭉 앞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수영 강국인 미국과 호주의 코치들도 입을 쩍 벌렸다. 미국의 최고 명문 수영 클럽인 ‘노바 아쿠아틱스’는 노 감독에게 “박태환을 데리고 우리 클럽에 와 달라. 함께 훈련하자”며 손짓을 하기도 했다.
이언 소프 넘는다
박태환의 장점은 한마디로 “물을 잘 탄다”는 것이다. 물과 싸우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물 흐르는 대로, 물에 몸을 맡겨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능력이 탁월하다. 팔을 젓고 발차기를 하면서 호흡을 하는 연결 동작이 그래서 더욱 매끄럽다.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자만하지 않고 부단히 노력하고 갈고 닦는 태도가 그를 더욱 발전시킨다.
물론 고쳐야할 점도 있다. 입수 동작과 턴 이후 킥 동작 등은 자세를 더 가다듬어야 하고 초반 레이스 스피드도 끌어올려야 한다. 400m와 1500m 중장거리 페이스 조절법도 더욱 노련하게 익혀야 한다. 아시안게임 내내 엄청난 통증으로 그를 괴롭혔던 발바닥의 사마귀들도 조만간 수술을 통해 말끔히 제거할 예정이다. 수술 후 내년 3월 멜버른 세계선수권과 8월 프레올림픽에 다시 도전한다.
박태환의 꿈은 올림픽 금메달이다. 그냥 ‘메달’도 아닌 ‘금메달’이다. 공연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이번 아시안게임 때도 3관왕을 예고했고, 그대로 실현했다. 다음 올림픽은 2년 뒤 2008 베이징올림픽이다.
그의 우상은 얼마 전 전격 은퇴를 선언한 호주 수영의 간판 스타 이언 소프. 소프는 박태환의 주종목인 자유형 400m 세계기록(3분40초08) 보유자다. 소프만큼 박태환도 잘할 수 있을까.
“2년 전 아테네올림픽에서 소프를 보고 너무 좋아 가슴이 막 떨렸거든요. 그런데 이젠 만나도 설레지 않을 것 같아요. 저도 조금만 더 있으면 소프만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신의 미니홈피 제목을 ‘태환전설’로 새겨놓고 한국 수영의 ‘전설’을 꿈꾸는 박태환. 그가 가르는 금빛 물살은 이미 한국 수영의 새 역사를 힘차게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프로필
생년월일=1989년 9월27일
체격=181㎝, 72㎏
출신교=서울 도성초-대청중-경기고 2년
국가대표=2004년 7월∼현재
주요 수상 경력=2005 마카오동아시아대회 자유형 400m 금, 1500m 은, 2005 몬트리올세계수영선수권 200m 20위, 남아공 월드컵 쇼트코스 1500m금, 호주 월드컵 쇼트코스 400m·1500m 금, 2006 범태평양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 1500m 금, 200m 은, 2006 도하아시안게임 자유형 200m, 400m, 1500m 금메달
보유 기록=자유형 200m 아시아기록(1분47초12) 400m 아시아기록(3분45초72) 1500m 아시아 기록(14분55초03)
가족관계=박인호(55) 유성미 씨(48)의 1남1녀 중 막내
조범자 스포츠월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