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4일 의원총회에 참석한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료를 보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친노파는 줄기차게 GT를 비롯한 지도부(비대위) 해체를 주장하며 GT를 압박하고 있고 일부 측근들조차 “차라리 먼저 의장직을 던져 버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노 대통령과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됐고 대권 라이벌이지만 함께 친노세력의 강한 견제를 받고 있는 정동영(DY) 전 의장도 갑자기 정계개편 방점을 달리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래저래 사면초가 신세다.
GT로서는 자칫하다간 당권은 물론 대권도 물건너 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형국이며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모색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GT가 대승적 차원에서 당 의장직은 물론 ‘대권 불출마’라는 마지막 승부 카드를 띄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만년 2인자 자리를 떨쳐버리고 여권호 선장에 취임한 지 6개월을 맞이하고 있는 GT.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당 분열’이라는 최대 암초에 부딪힌 그가 침몰하는 여권호와 함께 장렬히 전사할지 아니면 특단의 카드로 다시 대권을 목표로 항해를 계속하게 될지 그의 향후 행보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GT는 지난 15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부동산대책특별위원회 당정협의에서 모두 발언을 통해 “당이 부동산 대책을 마련한 것은 현재 (부동산 정책에)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국민의 광범위한 요구를 전달하기 위함“이라며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 한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선진국의 경우 부동산 대책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해 왔다”며 “하지만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처방하는 대증요법에 급급해 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비록 사회의 핫 이슈인 부동산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정책 협의 자리였지만 그의 발언은 독기가 들어 있었다. 최근 청와대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GT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발언이었다. 지금 GT는 어쩌면 정치 인생의 최대 기로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기에 그의 말 한마디마다 결기가 엿보였다.
지난 12월 9일은 GT가 당 의장에 취임한 지 6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5·31 지방선거 참패로 당 의장이었던 DY가 백의종군을 선언하면서 지도부 공백사태를 맞았던 열린우리당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GT가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함으로써 우여곡절 끝에 GT호를 출항시켰다.
‘만년 2인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집권 여당 수장 자리에 오른 GT는 첫 일성으로 “독배라도 마시겠다”는 말로 결의를 다졌다. 지지율 급락과 맞물린 최악의 선거 패배, 불투명한 7월 재보선, 정계개편 소용돌이 등 짊어져야 할 버거운 현안이 산적해 있음에도 GT가 정면돌파 카드를 꺼내든 배경에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대망론이 자리잡고 있었다.
좌초 위기에 직면한 열린우리당호를 외면할 경우 그의 당내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고 무책임하다는 이미지가 대권행보를 가로막는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에 ‘집권당 수장’이란 프리미엄은 2인자 꼬리표를 떨쳐버리는 동시에 대권주자로서 지도력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GT가 장고 끝에 스스로 버거운 짐을 짊어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이러한 대권 복심이 작용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GT의 이러한 복심은 현실 정치에서 뿌리내리지 못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당 의장 취임 이후 첫 실험무대였던 7·26 재보선에서 또다시 ‘완패’라는 쓴 잔을 마셔야 했고 당내 계파 간 갈등이 수면위로 부상하는가 하면 당과 청와대 간의 갈등도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특히 노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 문제는 여권 내에서도 최대 화두로 부상할 정도로 GT가 풀어야할 선결 과제였다. 두 사람은 성격이나 정치스타일, 정치적 이념 등에서 다소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과 GT의 불편한 관계는 지난 2002년 대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여곡절 끝에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노 후보는 GT에게 선대위원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GT는 정치적 소신이나 노선에 다소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노 대통령의 깜짝 언행 등이 구설수에 오르자 GT는 “지도자가 세상에 분노하면 나라가 어지럽다”며 노 대통령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GT의 이러한 반감이 노 대통령을 자극했던 탓일까. 노 대통령은 GT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개각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출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6월 여권 내 유력한 차기주자로 분류됐던 GT와 DY를 대권수업과 공정한 경쟁 차원에서 동시에 입각시키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두 사람 중 누구를 통일부 장관에 기용하느냐 였다. 당시 두 사람은 모두 대북정책을 총괄하면서 차기 지도자로서 입지 구축이 용이한 통일부 장관을 요구했다. 결국 노 대통령은 DY를 통일부 장관에 낙점했고 GT는 분루를 삼키면서 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해야 했다.
입각 과정에서의 불만이었을까. 아니면 이념적 차이에 따른 소신이었을까. GT는 복지부 장관 재임시절 사사건건 노 대통령과 정부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노 대통령을 겨냥해 “계급장 떼고 붙자”고 압박하는가 하면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려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 지난 6월 29일 청와대 만찬을 함께한 노무현 대통령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화해 불가’ 상태까지 왔다. | ||
지난 6월 21일로 예정됐던 노 대통령의 시정연설 계획이 갑자기 취소된 사건은 당·청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정치권 주변에선 연설 취소 배경과 관련해 ‘GT 제동설’ 등 갖가지 억측이 나돌았다. 노 대통령의 깜짝 발언 내지는 충격 카드 제시 등을 우려한 GT와 당 지도부가 청와대 측에 연설내용 자제를 주문했고 당의 무리한 간섭에 화가 난 노 대통령이 연설 취소를 결정했을 것이란 관측에 무게감이 실렸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과 관련해서도 두 사람은 충돌했다. 지난 8월 ‘논문 표절’ 의혹이 불거지면서 야권으로부터 사퇴 압박을 받아온 김병준 당시 교육부총리의 거취와 관련해 GT와 당 지도부는 김 부총리의 자진 사퇴를 권고하는 동시에 법무장관 하마평에 오른 문재인 전 민정수석의 입각 반대를 분명히했다. 청와대는 발끈했지만 노 대통령은 당·청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해 김 부총리의 사표를 수리하고 법무장관에는 문 전 수석 대신 김성호 국가청렴위 사무처장을 기용했다.
두 사람이 인사권 문제로 세웠던 대립각은 노 대통령이 당 지도부의 입장을 받아들여 일시 가라앉는 듯했지만 두 사람의 감정까지 해소되진 않았다. 오히려 치유 불능으로 악화됐을 것이란 시각이 우세했다.
실제로 노 대통령과 GT는 당·청 갈등 봉합 차원에서 8월 6일 마련된 당·청 지도부 간 청와대 오찬회동에서 누적된 앙금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작심한 듯 GT를 겨냥해 “김 의장은 과거 국민의 정부 때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들었다. 장관시절에는 ‘계급장 떼놓고 맞붙자’고 한 적도 있다”며 GT의 과거 발언을 문제삼아 강도높게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GT 역시 “민심이 현 정부에서 완전히 떠났다” “당도 변해야 하지만 대통령도 변해야 한다” 등 격렬한 표현으로 노 대통령과 맞선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극한 대치상황을 연출해 온 두 사람의 감정싸움은 여당발 정계개편이 가시화되면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 관계로 치닫고 있다.
노 대통령은 11월 28일 당적 이탈 가능성과 ‘하야’라는 초강수 카드로 정치권 전체를 흔들어 놓는가 하면 30일에는 다시 ‘당 사수’ 입장을 천명하는 등 오락가락 행보로 야권은 물론 여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기에 편지 정치를 재가동하면서 정계개편 과정에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의 이러한 행보를 GT가 그냥 방치할 리 만무하다. GT는 청와대 만찬 회동을 거절하는가 하면 노 대통령의 ‘신당은 지역당’ 발언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12월 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평화개혁 세력의 재결집을 추구하는 통합신당을 지역당으로 폄하하는 것은 모욕적 언사이자 제2의 대연정 발언”이라며 노 대통령을 강하게 성토했다. 노 대통령과의 결별도 불사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발언으로 풀이된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물과 기름 관계였던 두 사람이 정계개편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만큼 결국 이별이라는 최종 선택을 하게 될 것이란 관측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서 두 사람의 이별을 전제로 한 각종 정계개편 시나리오가 나돌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측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GT가 구상하고 있는 다음 수는 무엇일까.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과거 현직 대통령과 등을 돌리고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과의 결별을 전제로 한 정치행보는 일단 험로가 예상된다.
친노그룹의 저항은 차치하더라도 불안한 당내 입지와 대권주자 지지율이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도 넘어야 할 난제다. 당 진로 문제를 포함한 정계개편 논의가 확전되면서 지도부의 권위는 물론 통제 역할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GT가 직면한 현실을 잘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고 GT가 아무런 대안이나 승부수 없이 대망론을 포함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직접 국민을 상대하는 게 오히려 최상의 승부수가 될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실제로 GT계 일부 의원들은 당 의장이고 대권이고 다 버리고 ‘역시 GT’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GT계의 한 중진 의원은 “GT의 가장 큰 경쟁력은 진정성을 바탕으로 한 일관된 정치 소신”이라며 “권력 암투로 비치고 있는 정계개편 주도권 싸움에서 하루빨리 빠져나와 국민을 상대로 정치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평가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킹 메이커역으로 선회하든 차차기를 준비하든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이고 대망론은 이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는 논리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GT의 스타일과 정치적 소신을 감안하면 그가 사심을 버리고 모든 기득권을 포기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모든 걸 포기한다는 것은 역으로 더 이상 버릴 게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 강한 자신감을 불어 넣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독배를 마시는 심정으로 당 의장직을 수락한 GT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정계개편 문제 및 자신의 대망론과 관련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