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우리당의 운명이 격랑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 책임론의 중심에 선 김근태 당의장의 대권가도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다. | ||
열린우리당내 제 계파간 갈등이 다시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비대위)가 우여곡절 끝에 19일 오전 전당대회 준비위원회가 합의한 ‘대통합신당’을 추인했지만 이날 오후 법원이 일부 사수파 측 당원들이 제기한 당헌 개정안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면서 통합파와 당 사수파간의 감정대립은 대충돌 양상으로 비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신당파 일부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선도탈당론’이 다시 확산되고 있고 사수파 의원들은 법원 판결 이후 전대 논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신당파를 거세게 몰아붙이고 있다.
여기에 범여권 대권주자로 분류됐던 고건 전 총리의 대선 불출마 선언 이후 정동영(DY)·김근태(GT) 전·현직 당의장도 대선불출마 선언 등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침몰위기에 몰린 여권호를 진두지휘한 전·현직 당 수장으로서의 책임론과 함께 범여권 제3후보들이 대권레이스에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당내 최대 주주인 GT와 DY가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받고 있다.
하지만 GT와 DY 진영은 ‘GT·DY 2선후퇴론’을 애써 외면하면서 고 전 총리 퇴진에 따른 대권 유불리를 따지면서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대권과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정치권 일각에서는 여권 분열과 ‘고건 퇴진’에 따른 후폭풍이 두 사람을 강하게 압박할 경우 중대 결단을 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두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든 향후 두 사람은 가시밭길 정치행보를 걷게 될 것이란 시각이 많다.
김근태
요즘 GT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19일 오전 전대 준비위가 잠정 합의한 대통합신당을 추인하는 자리에서 “마침내 밝은 햇살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확신한다”며 모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던 GT는 불과 몇 시간 후에 법원에서 불어온 역풍에 또 한번 휘청했다.
이날 오후 서울남부지법이 ‘기간당원제 폐지’를 골자로 한 열린우리당 당헌 개정안 효력을 정지해 달라며 열린우리당 사수파 일부 당직자들이 제출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깜짝 개헌 제안과 고건 전 총리의 갑작스런 퇴진 등 굵직한 대형 이벤트로 잠시 봉합 국면을 맞이했던 열린우리당 내 계파간 갈등은 법원 판결 이후 또다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당 의장으로서 당헌 개정과 통합신당 추진을 주도했던 GT는 책임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일부 사수파 진영에서는 GT와 지도부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지도부 조기 퇴진론을 주장하고 있다. GT를 겨냥해서는 대선 불출마 등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도 거세지고 있다.
열린우리당 내 지분을 양분하고 있는 GT와 DY를 겨냥한 ‘2선 후퇴론’이 불거진 건 비단 어제오늘만의 얘기는 아니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백의종군을 선언한 DY나 당 의장직을 승계한 GT의 지지율이 바닥권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당 일각에서 두 사람에 대한 2선 후퇴론이 불거지기 시작했던 것.
지난해 연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유력한 범여권 제3후보로 급부상한 정운찬 전 총장이 “대권에 뜻이 없다”며 정치 입문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도 ‘GT·DY 2선 후퇴론’이 제기됐다.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정 전 총장이 아무런 버팀목 없이 대권에 뛰어들 리 만무한 만큼 최대 주주인 GT와 DY가 제3후보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하는 차원에서라도 2선 후퇴 내지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었다.
▲ 불출마 압박을 받고 있는 정동영 전 의장이 통합신당을 기치로 노 대통령과 맞설지 아니면 결국 대망을 접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 ||
게다가 고 전 총리가 대권포기 선언을 하면서 “기존 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고 술회한 배경에는 GT와 DY가 통합신당 추진에 합의하며 연대를 과시했던 대목을 겨냥한 측면이 강해 고 전 총리 퇴진 이후 두 사람에 대한 기득권 포기 요구는 더욱 거세지고 있는 형국이다.
설상가상으로 GT가 당내 혼란을 야기한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결단을 압박받고 있는 상황이다. 당내 실용파를 대변해온 강봉균 정책위의장으로부터 ‘좌파’라는 공격을 받는가 하면 비대위원인 박병석 의원에게는 면전에서 “지도자가 난국에서 결단이나 자기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상 2선 후퇴를 요구받기도 했다.
당내 호남권 의원의 좌장격인 염동연 의원과 통합파인 이계안 의원 등 선도탈당론이 확산되고 있는데도 이렇다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여권 내 잠재적 대권주자인 천정배 의원도 법원 판결 직후 “비상한 심정으로 방법을 모색하겠다”며 탈당 가능성을 시사해 파문 확산을 예고하고 있다.
이처럼 사면초가에 몰린 GT가 조만간 모종의 결단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도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GT가 공개적으로 정운찬 전 총장에게 구애의 손길을 내밀고 있는 것도 정치적 결단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일 가능성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즉 자신의 지지율과 경쟁력의 한계를 절감한 GT가 자신이 신뢰하고 있는 ‘정운찬 대안카드’를 담보로 대선 불출마 등 기득권 포기를 선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다.
하지만 GT 측은 2·14 전대까지는 당 의장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에 충실하고 대망론 등 향후 정치행보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예상치 못한 ‘고건 퇴진’ 후폭풍으로 범여권 대권구도가 재편될 가능성이 농후해진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정치상황 추이를 좀더 지켜보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노 대통령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 왔던 GT는 최근 “노 대통령도 신당에 참여해야 한다”는 다소 유연한 입장으로 선회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GT 측은 “신당 논의에 개입하라는 게 아니라 정체성의 차이가 없으므로 함께 가자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GT가 노 대통령과의 관계 재설정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GT가 15일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대북특사를 맡을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을 환영하며 하루 빨리 대북특사 파견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줄 것을 촉구한다”며 ‘DJ 대북 특사론’에 힘을 실어 준 것도 노 대통령과의 관계 복원을 염두에 둔 포석일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법원발 쓰나미’로 또다시 대혼란에 빠져든 열린우리당과 그 책임론 중심에 선 GT.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은 GT가 노 대통령과의 관계 재정립이라는 고육책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할지 아니면 책임론과 2선후퇴론 압박을 인내하지 못하고 고 전 총리의 전철을 밟게될지 그의 선택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정동영
DY의 처지도 GT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 의장인 GT가 법원 판결 등 민감한 정치 현안에 따른 부메랑을 직접 받고 있을 뿐 DY 또한 대선 불출마 등 기득권 포기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DY 진영은 “지난해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DY는 백의종군을 하고 있다”는 입장을 강조하며 당 안팎에서 일고 있는 ‘DY GT 동반 후퇴론’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기득권 포기 압박에 굴하지 않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로 다시 대권행보를 걷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한동안 조용한 행보를 보여 왔던 DY와 그 측근들은 고 전 총리 퇴진에 따른 반사이익이 DY에게 쏠릴 것을 기대하며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실제로 2% 안팎에 머물렀던 DY의 지지율은 고 전 총리 퇴진 이후 5~8% 정도 뛰어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DY 측은 지지율 상승 추세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면서 대권 로드맵을 재점검하는 등 움츠렸던 정치행보에 다시 가속도를 낸다는 계획이다.
DY 진영의 한 관계자는 19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고 전 총리와 연고지(전북)가 같아 지지층이 분산됐던 게 사실”이라며 “DY 대권행보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고건 카드’가 사라진 만큼 DY의 지지율 상승은 이제 시간 문제”라는 고무된 반응을 보였다.
▲ 김근태 당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이 지난 12월 28일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통합신당 추진을 전격 합의했다. | ||
DY도 18일 “국민의 고통과 함께하려는 진정성이 전해지면 여론조사란 민심의 온도계는 올라갈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다”며 최근 일련의 지지율 상승에 따른 고무된 입장을 피력했다. 친노그룹의 한 초선의원은 “고건이 정동영을 살렸다”는 표현으로 DY의 기사회생 가능성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DY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DY는 지난 18일 비정규직 교수노조와 정책간담회를 갖고 교육 정책을 설명하는가 하면 19일에는 서울 여의도 모 빌딩에서 웬디 셔먼 전 미국대북정책조정관과 만남을 갖고 대북관계문제와 고령화사회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DY는 특히 18일 정책간담회에서 교육제도 개선과 사교육비 해소책의 일환으로 이른바 ‘5-3-3-5’ 학제 도입 방안을 제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5-3-3-5’ 학제란 초등학교 5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5년으로 학제를 개편하는 방안을 말한다. DY는 이날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고리를 차단해야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시키고 특기 적성에 맞은 교육과 인성교육을 충실히 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학제 개편안을 주장했다.
DY는 또 21일 백범기념관에서 자발적 팬 클럽인 ‘정통(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출범식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하는가 하면 전문가 그룹인 평화경제포럼도 전국적인 조직망 구축작업에 착수하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고 전 총리 퇴진으로 반사이익을 톡톡히 보고 있는 DY가 본격적인 대권행보에 나선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 주변에선 DY의 대권행보가 순탄치 만은 않을 것이란 회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고 전 총리 퇴진에 따른 반사이익은 ‘반짝 효과’에 그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이들은 고 전 총리의 사퇴로 DY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지율 1, 2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지지율 또한 일정부분 상승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DY만이 고 전 총리 퇴진에 따른 수혜를 받고 있는 게 아니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DY 또한 GT와 함께 2선 후퇴 내지는 대선 불출마 압박을 받고 있다는 점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DY 입장에서는 이미 백의종군을 하고 있어 더 이상 내줄 게 없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만약 GT가 대선 불출마 등 기득권 포기를 전격 선언할 경우 DY도 대권레이스를 강행할 동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일부 정가 소식통들은 ‘고건 낙마’가 시사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즉 범여권 유력후보인 고 전 총리의 퇴진 배경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DY 역시 순탄치 않은 대권행보를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게 이들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노 대통령이 지난해 연말 고 전 총리와 함께 DY·GT 실명을 거론하며 ‘인사실패’ 발언을 한 배경에는 고 전 총리는 물론 DY와 GT도 자신의 대권후계자 리스트에서 지워졌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분석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21일 ‘탈당 불사’라는 초강수 카드를 꺼내든 DY가 통합신당을 기치로 노 대통령과 맞서 정면대결을 펼칠지 아니면 대선 불출마 압박에 시달려 대망론을 접게 될지 향후 여론 추이가 DY의 선택을 좌우하는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