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년 ‘천재’로 떠올랐을 당시. | ||
2002년 7월 28일 -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뒤
“처음엔 한국팀의 플레이가 너무 좋아 담담하게 응원할 수 있었어요. 그러다 결승전을 향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니까 조금씩 서운해지더라구요. 제가 없어도 너무나 잘 돌아가는 대표팀의 실력이 배가 아플 정도로 훌륭했어요. 그러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다음 월드컵이 또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2003년 2월 2일 - 상무 입대 전 영남대에서 재활훈련 중
“군대에 가야 할 운명이란 걸 깨달았죠. 이런저런 기회를 다 놓치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군대 문제가 해결돼야 다른 일이 풀릴 것 같았어요. 하나 둘씩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있는 중인데 이런 기회가 나쁘지만은 않다고 봐요. 한 가지만 보고 달려온 인생을 정리할 수 있게 됐잖아요.”
2004년 7월 25일 - 본프레레 대표팀에 소집됐을 때
“대표팀에 발탁됐다는 소식을 듣고 파주로 향하면서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세요? 딱 그런 거였어요.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때 처음 가방 메고 학교에 등교하는 그런 기분. 솔직히 예전에는 그런 거 잘 몰랐거든요. 태극마크 다는 걸 당연시했으니까요. 그런데 몇 차례 쓴맛을 보고 나니까 파주 입성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겠더라구요.”
2002 멤버들과의 보이지 않는 거리감
“저랑 (안)정환이 형이랑은 격이 다르잖아요. 그 형은 (월드컵을 통해) 완전히 올라선 선수예요. 예전과는 그 느낌이 분명 다를 수밖에요. 표현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더라구요.”
▲ 2003년 영남대서 재활훈련하던 모습(왼쪽), 2003년 상무 소속으로 대표팀에 소집. | ||
“월드컵 이후엔 제가 작아 보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자신감을 되찾은 거죠. 이제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요. 이건 분명 자만이 아닌 자신감입니다.”
김남일과의 운명 같은 인연에 대해서
“어떤 선배는 2002월드컵 이후 연락을 뚝 끊더라구요. 그러나 남일이 형은 달랐어요. 제가 힘들 때 가장 많이 챙겨준 사람이 그 형이에요. 군 입대 하기 전 남일이 형과 마지막으로 술을 마셨는데 그때 술 먹고 둘이서 대성통곡하며 울었던 기억이 나요. 절 위해서 울어줄 사람, 글쎄요,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거든요.”
아직도 히딩크 감독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느냐는 질문에
“원망보다는 아쉬움이 있어요. 제가 가진 걸 다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부상당한 상황에서 뭔가 보여주려고 발악하다가 더 힘들게 됐던 거니까 많이 아쉽죠.”
2006년 4월 11일 - 무릎 치료 위해 독일 출국 전 공항에서
“좋은 결과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시 공항에 절뚝거리며 나타나 머리를 숙이고 짧은 인터뷰를 대신한 채 출국장으로 향했던 이동국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는 공항에서 돌아와 ‘이동국을 위하여’란 기사를 쓰며 마지막에 이렇게 표현했었다.
‘잃은 게 많은 이동국이다. 그러나 이번 일로 얻은 것 또한 많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이동국의 얼굴에 그늘이 없어질 날을, 그래서 활짝 웃음꽃이 필 날을 기다려본다. 기자가 아닌 팬으로서 말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