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8일 열린우리당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한 정세균 의장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사실상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의장이 될 정 의장은 안으로는 잔류 세력들 간의 노선 갈등과 추가 탈당을 막고 밖으로는 제3 후보를 영입해 통합신당을 띄워야 하는 무거운 임무를 떠안 | ||
하지만 정 의장이 이끄는 열린우리당호의 항해는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란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지난달 28일 노무현 대통령의 탈당으로 여권 프리미엄이 사라졌고 잠시 소강국면에 접어든 탈당사태도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핵뇌관으로 잠복해 있다. 잔류파그룹에서는 노선·정책 갈등이 재연될 조짐도 일고 있고 통합세력 내 계파 간 주도권 싸움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그렇다고 출항하자마자 닻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암초에 부딪치더라도 항해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 의장으로서는 아마도 ‘열린우리당 마지막 당의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마지막 당의장’ 자리가 신당을 만들어 내는 영광스런 자리가 될지 당 와해를 바라봐야 할 참담한 자리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정 의장에게 정가의 이목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러분들은 ‘대통합신당을 위해 무언가 기여하겠다’는 소명을 가진 전도사가 돼 달라.”
통추위를 출범시킨 지난달 28일 정 의장이 통추위원에 선임된 위원들에게 던진 당부의 말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날 대통합신당 작업을 주도할 통추 위원으로 배기선 이미경 유인태 박병석 김부겸 임종석 박명광 민병두 문학진 이경숙 오영식 김동철 의원과 이호웅 전 의원을 선임했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과 문희상 전 의장은 상임고문으로 추대됐다. 정 의장은 “이분들(통추위 위원들)은 정규군으로서 대통합신당의 성공을 위해 밤낮없이 일할 것”이라며 성공적인 대통합신당 추진을 독려했다.
열린우리당도 이날 대통합신당 추진방향과 관련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천명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공유하는 중도개혁정당을 추구해나갈 것임을 공식화했다.
통추위 발족으로 대통합신당 창당 작업에 첫발을 내디딘 정 의장은 3월 말까지 통합을 논의할 협상테이블을 구성한 후 5월 말까지 대통합신당을 창당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확인했다. 정 의장은 이러한 신당 로드맵에 따라 통추위 내에 제도정치권과 시민사회를 담당할 두 개의 분과와 통합신당의 비전과 노선, 강령 등을 정립해 나가는 역할을 맡게 될 또 하나의 분과를 두고 대통합신당 창당 작업을 추진해 나갈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의장은 특히 범여권 대통합 세력에 합류시킬 대상으로 민주당과 국민중심당 등 기존 군소정당을 비롯해 제3 후보군으로 거론되고 있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박원순 변호사, 강금실·진대제 전 장관 등을 망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 의장은 또 참여정부의 개혁 일변도 정책을 비판하는 등 노 대통령의 탈당으로 여당 프리미엄이 사라진 정국 상황을 감안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와의 관계 재설정 의지를 피력하게도 했다. 그는 지난달 26일 기자간담회에서 참여정부 평가를 묻는 질문에 “균형이 깨지고 한쪽에 치우치면 국민에게 봉사하는 데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부분이 혹시 표출되지는 않았나 생각한다”며 참여정부의 개혁 일변도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처럼 정 의장은 열린우리당 사활과 정권재창출 여부를 가름할 수 있는 최대분수령이 될 통합신당에 자신의 모든 열정과 정치 역량을 쏟아붓겠다는 강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하지만 정 의장의 의지대로 열린우리당 중심의 대통합신당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오히려 회의적인 시각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실제로 정 의장이 구상하고 있는 신당 로드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대통합 대상인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이 열린우리당 중심의 통합신당 추진에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고 제3 후보군 영입작업도 이렇다 할 성과물을 내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잔류파 세력 간에 노선·정책 갈등이 재연될 조짐이 일고 있고 당내 최대 계파인 정동영·김근태 전 의장계의 추가 탈당 기류도 감지되고 있다.
▲ 지난달 22일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만찬에 앞서 정세균 신임 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28일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3월 정국의 최대 현안인 사립학교법 재개정안과 출자총액제한제도 처리 문제를 놓고 당내 노선 갈등이 재연될 조짐이 일고 있는 것도 정 의장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정 의장을 비롯한 당 지도부가 최근 한나라당과의 회담을 통해 사학법 재개정안과 주택법 개정안 통과에 서로 협조하는 방안에 합의한 것과 관련해 당내 개혁성향 의원들의 비판이 고조되고 있는 형국이다.
정동영 전 의장과 가까운 정청래 의원은 1일 “사학법 재개정 불가는 과거 정동영 전 의장 시절부터 당론으로 정해 확고하게 지켜온 것인데 이를 현 지도부가 번복하겠다는 것은 당론에 위배된다”며 강한 불만을 표출했고, 김현미 의원은 “출총제가 통과되면 중대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며 탈당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 28일 열린 정책 의원총회에서 제3정조위원장을 맡고 있는 채수찬 의원은 지도부의 일방적 결정에 반발해 당직 사퇴를 선언하는가 하면 박영선 의원도 “지도부의 노선을 이해할 수 없다”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김근태 의장계로 분류되고 있는 이목희 의원도 새 지도부 노선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이 의원은 28일 의총에서 ‘출총제 완화는 김근태 전 의장 때부터 추진해온 것’이라고 해명한 장영달 원내대표를 겨냥해 김 전 의장이 경제 5단체와 맺은 협정 문건을 제시하면서 “그때 추진한 것은 재계의 투자 확대를 전제로 출총제를 폐지하되 순환출자는 규제한다는 게 골자였다”며 반박했다.
이처럼 일부 의원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정 의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자신의 정치력과 지도력을 실험받는 첫 무대에서 정 의장이 현안 법안을 처리하지 못할 경우 위상 추락은 물론 신당 추진 동력도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당내 계파 간 이견이 팽팽한 법안을 강행 처리할 경우 노선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추가 탈당의 빌미로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개혁성향인 열린우리당의 K 의원은 최근 기자와 만나 “정 의장과 장 원내대표가 주도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법안 처리 ‘빅딜’이 현실화될 경우 우리당은 심한 정체성 논란에 힙싸여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고 노선 갈등은 결국 호시탐탐 탈당 기회를 엿보고 있는 세력들에게 탈당 명분을 제공하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새 지도부의 노선에 반발하고 있는 세력들 대부분이 정동영·김근태 전 의장과 가깝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이들 세력들이 탈당명분을 쌓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당내 최대 계보를 이끌고 있는 정동영계와 김근태계는 당이 싫으면 그냥 떠나면 그만이지 탈당 명분을 쌓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선 투쟁을 벌일 필요가 있겠느냐며 ‘탈당 명분 쌓기’ 의혹을 일축하고 있다.
하지만 정 의장 입장에선 양대 계보의 이러한 집단 반발 움직임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노선 갈등이 증폭될 경우 추가 탈당사태가 재연될 것이고 이는 결국 당세 위축과 더불어 통합신당 추진력 상실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사활 및 범여권 대통합신당 성패를 쥐고 출항한 정 의장이 출항부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형국이다. 정 의장이 노선 갈등이라는 악재를 넘어 곳곳에 잠복해 있는 크고 작은 암초를 극복하고 차세대 지도자로 거듭나게 될지 아니면 그 역시 거친 파고에 휩쓸려 표류하는 신세가 될지 그의 향후 정치 행보와 결단이 자못 궁금하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