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 정풍 당시 권노갑 전 고문과 정동영 전 의장의 어색한 악수. | ||
박정희 정권 때부터 권력의 단맛을 향유하면서 영원한 2인자로 통했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까지 반평생을 민주화 투쟁에 헌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97년 대선을 앞두고 이른바 DJP연대를 성사시켜 공동정권을 탄생시킨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에는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정치적 애증관계가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정 전 의장은 지난 96년 권 전 고문의 지원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권 전 고문은 정치 신인이었던 정 전 의장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했다. 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2000년 12월.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당의 실세들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가 잇달아 터지자 당내 개혁세력들을 중심으로 정풍운동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정 전 의장이 있었다. 정 전 의장은 당시 핵심 실세였던 권 전 고문에게 ‘2선 후퇴’를 요구하는 등 정풍운동 주역으로 우뚝 섰다.
반면 믿었던 정 전 의장에게 허를 찔린 권 전 고문은 결국 최고위원직을 사퇴하고 쇠락의 길을 걷다가 참여정부에서는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권 전 고문 입장에서는 정 전 의장에 대해 정치적 앙금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꼴이 됐다.
이처럼 적지 않은 정치적 애증을 쌓아온 두 사람이 지난달 26일 골프회동을 가져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 전 의장은 5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사면복권을 축하드리는 자리였고 과거 불편했던 관계도 완전히 해소됐다”고 말했다. 정 전 의장은 특히 권 전 고문을 ‘대인’으로 치켜세우며 자신이 대권에 출마하면 권 전 고문이 지원하겠다는 말도 했다며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민생행보에 주력하면서 지지율 반등을 기대하고 있으나 여전히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정 전 의장의 대권 복심과 사면 후 동교동계 역할론 등 정치외연을 확대하고 있는 권 전 고문의 정치적 셈법이 맞물리면서 묵은 감정이 봄눈 녹듯 풀리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두 사람이 어려운 정치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상호 의기투합에 교감했을 것이란 섣부른 관측이 나돌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범여권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두 사람의 화해무드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두 사람이 당장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의기투합에 공감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복잡한 대권방정식에 직면하면 입장을 달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정 전 의장은 대권과 호남 맹주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겨냥하고 있고 권 전 고문을 중심으로 한 동교동계 역시 호남맹주 자리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이 정치적 목표와 역할을 분담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다시 갈등관계로 돌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랜 정치적 앙금을 털고 화해무드로 접어든 정 전 의장과 권 전 고문이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할지 아니면 한시적인 오월동주를 마감하고 또다시 적으로 돌아설지 두 사람의 향후 행보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