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일 탈당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백범기념관으로 들어서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 백척간두에서 내디딘 그의 걸음이 살 길인지 죽을 길인지 아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구태의연한 낡은 틀을 깨고 새로운 정치를 펼치겠다”고 선언한 손 전 지사는 그 ‘첫발’부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눈보라 속으로 내딛은 셈이다. 과연 손 전 지사는 어떤 속셈을 갖고 한나라당을 뛰쳐나와 새로운 깃발을 든 것일까. 과연 그의 실험은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최근 그의 행보와 언행을 통해 그 속내를 살펴본다.
“들러리 경선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던 손학규 전 지사는 결국 한나라당을 떠나는 ‘초강수’를 선택했다. 사실 손 전 지사의 탈당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나라당 내 대권주자로서 5%대의 낮은 지지율을 이어가고 있는 그가 이명박 전 서울 시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버티는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런 반면 범여권 후보로 나올 경우에는 지지율 1위로 여론조사 결과 나타났다. 뿐만 아니다. 대학 교수 등 지식인 집단이나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지지율이 당당히 전체 1~2위를 기록했다. 더구나 각종 역술인들까지 앞 다퉈 그의 운세가 다른 어떤 후보보다 강하다며 불을 지폈다. 이런 각종 여론조사가 그를 유혹했는지도 모른다.
손 전 지사는 탈당 선언을 통해 “한나라당은 원래 민주화세력과 근대화세력이 30년 군정을 종식시키기 위해 만든 정당의 후신이지만, 지금의 한나라당은 군정의 잔당들과 개발독재시대의 잔재들이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 후 “한국정치의 낡은 틀을 깨뜨리기 위해 저 자신을 깨뜨리며 광야로 나선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과거 그의 발언과 문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 한나라당 사람들의 분노다. 손 전 지사는 지난 1월 31일 경남도당 당직자와의 간담회 직전 기자들에게도 “내가 한나라당을 자랑스럽고 꿋꿋하게 지켜 온 주인이고 기둥”이라며 “내가 한나라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고 주류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웃기는 소리”라고 말했다. 2월 6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내가 한나라당 그 자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탈당 발언은 앞으로 그의 발길을 잡는 족쇄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한나라당 사람들은 보고 있다.
손 전 지사도 이런 비판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20일 국립현충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난 손 전 지사는 “광야에 나선 정도가 아니다. 시베리아 동토를 넘어 북극에 와 있는 느낌”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현충원 방명록에 “미래·통합·평화의 새로운 정치로 국민에게 희망을 주겠습니다”라고 적었지만 자신에게 불어오는 바람이 결코 봄바람이 아님을 충분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날 참배에 앞서 문화일보와 가진 전화인터뷰에서 손 지사는 “언론이 (나를) 배신자, 변절자로 다루었다. 탈당이 죽음의 길인 줄 잘 안다. 모든 매를 맞겠다는 각오를 했다. 내가 몸담았던 당을 탈당한 건 알을 깨는 아픔이다”고 현실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순국선열이 나라를 지킨 정신을 되새겨 국민의 희망을 위한 새 정치의 밀알이 되겠다”고 각오를 말하기도 했다. ‘구여권 오픈프라이머리에 참여할 생각인가’라는 질문에는 “기존 질서에 참여한다기보다 새로운 질서를, 새로운 정치구도를 만드는 구상에 우선 몰두할 것이다. 그게 먼저다”라고 답했으며 “산사에 있으면서 최대 고민의 화두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일에 한알의 밀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치어리더가 되라면 되겠고, 불쏘시개 역할을 하라도 하겠다. 나라를 위한 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손 전 지사는 MBC 라디오에 출연해서도 범여권의 통합신당파와 연합설에 대해 “부정하거나 문을 닫을 필요는 없지만 중요한 전제는 그것이 새로운 정치가 되느냐, 안 되느냐다”며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 지난 19일 손 전 지사 탈당 기자회견장에 취재진들이 몰려 있다. 한나라당을 뛰쳐나와서야 카메라 세례를 받는 그의 심정이 어떨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래서인지 그동안 100일 민심대장정 등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던 손 전 지사는 탈당 후 행보가 조심스러워졌다. 언론과의 인터뷰도 자제하고 공식일정을 하루에 1~2개 정도로만 잡고 있을 정도로 매스컴에 노출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대처하고 있다. 대선을 향한 로드맵과 인맥, 조직 등 모든 게 백지 상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손 전 지사는 탈당 직후 서대문 캠프에서 회의를 주재하며 “정치적 플랜을 마련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탈당 후 첫 외부행사인 21일 구로 디지털 단지를 방문도 이날 오전에 급작스레 정해졌다는 후문이다. 그는 단지를 방문해 “(나의 탈당에 대해) 젊은 사람들이나 지식인 사회의 반향이 크다. 아주 놀랍다”고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지만 손 전 지사 캠프 관계자는 “탈당에 관해 내부에서 입장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전하기도 했다.
손 전 지사는 정치권 인사들보다는 오히려 문화계 인사들과의 접촉이 빈번해 주목을 끈다. 손 전 지사는 19일 밤 최열 환경재단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지지를 부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손 전 지사는 또 22일엔 ‘민주화 운동’ 선배인 시인 김지하 씨를 만나 의견을 나누었다. 김지하 시인은 “(중도개혁을 표방한) 다른 사람들은 말로 그쳤거나 기회주의로 흘러버렸지만 손 전 지사는 개혁과 안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고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정확히 공부했다”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손 지사가 정치인들보다 먼저 지식인 예술인을 접촉하는 데 대해 엇갈린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광야에 몸을 내던진 손 전 지사가 새로운 정치실험의 하나로 예술, 문화인들의 공감대를 이끌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손 전 지사는 김 시인과 만나 ‘문예부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지를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김 시인 또한 “정치인들 중에서 문예부흥을 얘기한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는 것이다. 손 전 지사는 김 시인에 이어 절친한 소설가 황석영 씨와 가수 김민기 씨, 방송인 손숙 씨, 만화가 이현세 씨 등 문화계 인사 등과 연이어 접촉한 것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정치인들 가운데 아직 접촉할 만한 인사가 마땅치 않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손 전 지사의 탈당과 관련 ‘전진코리아’와의 관계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전진코리아’는 작년 12월부터 공식 활동을 시작한 모임으로 ‘전진과 통합의 정치를 현실화하자’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전진코리아’와 손학규 전 지사와의 우호적 관계는 손 전 지사의 탈당 이전부터 감지돼 왔다. 전진코리아의 김윤 공동대표가 손 전 지사에게 공개적으로 탈당을 요구했는가 하면, 손 전 지사가 지난 3월 15일 전진코리아의 창립대회에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때문에 손학규 전 지사의 전진코리아를 기반으로 삼아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냐는 전망도 있었다.
그러나 전진코리아와 손학규 전 지사와의 연대가 매끄럽게 진행되리라고 낙관하긴 쉽지 않다. 전진코리아가 기치로 내건 중도세력 대통합과 손 전 지사의 뜻이 일맥상통하고 있지만, 전진코리아가 손 전 지사를 주도적으로 지지할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전진코리아 관계자 또한 “언론에서는 전진코리아에 대해 손학규 전 지사의 외곽단체, 산하조직으로 얘기하지만 이는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못 박았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손 전 지사만을 ‘모시는’ 조직이 아니다. 손학규 전 지사를 포함해 정운찬 전 총장 등 그 밖의 범여권 후보군들을 모두 모시고 아우르는 단체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손학규를 위한 정치세력’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손학규 전 지사 외의 다른 주자들을 대선후보로 지지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손 전 지사가 과연 중도개혁세력의 결집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이룰 수 있을지 아니면 이인제 의원과 같이 실패한 정치인으로 남을지 지금 정계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